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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346화 (347/497)

Chapter 346 - 346. 방향 (10)

수정 발전실에서 한바탕 난리를 끝내고 돌아온 방. 그곳에는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가 빠짐없이 있었다.

보글보글···

냄비 안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모두 각자 할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지안이에게 분유를 탈 준비이거나.

"아저씨! 일은 다 끝났어?"

지수가 반가운 기색을 띠며 튀어나왔다. 퇴근 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붕붕 휘두르는 그녀였다.

"어어, 오늘 할 일은 끝. 이제 따로 할 일은 더 없어."

나는 지수의 귀를 쓰다듬어 주면서 한세아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한세아는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뜨겁게 데워진 물을 다른 병에 담아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지안이에게 먹일 분유를 타는 것이 맞는 듯했다.

원래는 모유 수유를 주로 했지만,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지 모유가 수월하게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최미소에게 푹 쉬라고 말했던 것이기도 했다.

"오빠! 그 사람 데려왔어요? 지금 뒤에 있어요? 왜 안 나와요?"

한세아를 보조하고 있던 예린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다다 한 말이었다. 아이는 내 등 뒤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금발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지수, 한세아, 최미소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다들 소개를 기다리고 있는 표정이었다.

"자자, 괜찮다니까.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그들의 말없는 재촉에 땀을 삐질 흘린 나는 뒤에 있는 엘프리데가 부담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만 앞으로 이끌었다.

"······."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는 완전히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고 우선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방 내부와 안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신중하게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맞추는 엘프리데는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기다란 귀를 찡긋거렸다.

"···와, 확실히 귀가 우리랑 다르긴 하네."

"아,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나는 김지수. 그냥 지수라고 불러. 몇 살이야?"

나와 제일 거리가 가깝던 지수가 엘프리데에게 다가갔다.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면서. 둥근 인간의 귀나 삼각의 동물 귀와 다르게 기다란 귀를 본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항상 낯선 이에게 바짝 날이 선 경계심을 보냈던 평소와 다르게 지수는 엘프리데를 환영하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귀가 쫑긋거릴 때마다 엘프리데의 귀도 움찔거렸다.

"스, 스무 살이예요. 이름은 엘프리데고요."

친근하게 다가오는 지수를 본 엘프리데. 그녀는 내 손을 놓고, 두 손을 꼭 쥐더니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뭐야? 스무 살이라고? 나랑 한 살··· 아니지.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스무 살?! 내 친구가 아니라 언니였다니···! 어째서! 왜 나는 막내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나도 동생이 가지고 싶다아···!"

어느새 거리를 좁힌 예린이 엘프리데의 말을 듣고 충격받은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예린도 지수처럼 엘프리데를 환영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자신보다 6살이나 연상이라는 소리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일자로 서 있던 꼬리가 축 늘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체구가 자신과 비슷하니 나잇대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사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터라 실제 나이를 들었을 때 놀라기는 했다.

"어···. 그, 저기 죄송━"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아이의 눈을 본 엘프리데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고개를 숙이려고 했고,

"아니예요, 언니! 그냥 해 본 소리였어요! 저는 예린이예요! 최예린! 그냥 예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이는 언제 주저앉았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며 엘프리데의 손을 붙잡았다. 예린은 히히 웃으면서 엘프리데의 녹안을 자기 청안에 담았다. 축 늘어졌던 꼬리도 다시 일자로 섰다.

"언니, 이 옷 한번 만져 봐도 돼요? 뭐로 만들어진 거예요?"

"이, 이건 어머니의 껍질을 무두질한 건데 보이는 것보다 그··· 그, 아 신축성이 좋아요···."

"오, 그러네. 이거 보기와는 다르게 탄력이 있네. 뭔가 스판 같기도 하고? 마냥 질기기만 할 줄 알았는데."

지수와 예린은 엘프리데를 둘러싸고 각자 호기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엘프리데는 조금 어색한 말투와 서투른 몸짓으로 그녀들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내 생각보다 그녀들과 대화를 잘 나누는 엘프리데의 모습에 나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얼굴에는 아직 긴장감이 어려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서서히 몸이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근데 아저씨, 얘 머리에 혹 뭐야? 뭔 일 있었어? 이 활은 또 뭐고?"

"사소한 일이 좀 있었지. 활은 엘프리데 물건이니까 조심히 다뤄."

"사소한 일? 뭔 소리야, 그게."

"아무튼 지수야, 예린아. 그럼 엘프리데 너무 괴롭히지 말고 이야기 나누고 있어. 겸사겸사 체구에 맞는 옷도 찾아주고."

나는 난쟁이 칸이 수정 파편으로 엘프리데의 머리를 한번 깼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지수는 고개를 몇 번 갸웃할 뿐 더 묻지 않았다.

"알았어. ···흐흫, 어디 한번 볼까?"

"···어? 어어? 혀, 현우···!"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웃는 지수를 본 엘프리데는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혼자 잘 있다가 문득 엄마의 손을 놓친 것을 깨달은 아이처럼.

그녀는 내게 살려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멀어진 상태. 그 손이 나를 붙잡는 일은 없었다.

"지안이 옷 받았네요?"

나는 한세아와 최미소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지수와 예린이 선을 넘지는 않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살짝 앞으로 가는 것뿐이지 않은가.

엘프리데도 금방 지수와 예린의 선함을 깨달아 주겠지.

"네, 탄이 세아씨 기다리면서 신발을 만들어줬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조이가 만들어줬구요. 이거 봐요. 엄청 귀엽죠."

지안이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던 최미소는 난쟁이들에게 받은 옷과 신발을 보며 밝게 웃었다. 제일 부드러운 천으로 대충이나마 감싸 두었던 지안이의 발에는 아기자기한 슬리퍼 모양의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아기의 발에 부담이 가지 않게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작은 발에 신겨진 작은 신발이 주는 느낌이 심장을 강타한 것이다.

"네, 되게 귀엽습니다. 디자인도 그렇고 솜씨가 장난 아닌데요?"

귀여운 아기 돼지 얼굴이 장식된 아기 신발은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기 힘들 만큼 마감 처리도 잘되어 있었다. 역시 손재주에 자부심이 가득한 난쟁이답게 정교한 솜씨였다.

"그렇죠? 신발 만들어진 거 보고 한동안 저것만 멍하니 봤다니까요. 그리고 조이가 나중에는 장난감도 만들어 주신대요. 딸랑이 같은 거요."

"장난감 보관 상자도 하나 필요하겠네요. 아, 세아씨. 탄에게 진찰 받으셨죠?"

"네, 받긴 받았는데···."

한세아는 냄비에 오늘 먹을 저녁인 즉석 카레팩을 넣으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자신이 불리자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했어요? 어디 몸 안 좋은 부분이 있다던가."

"아뇨, 그런 말은 안 했어요. 배에 무언가가 있지도 않고 아니, 알 모양 같은 것이 모호하게 잡힌다고는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고 했어요."

"몸에 이상은 없다는 말이죠?"

"네. 몸은 건강하대요."

"다행입니다."

나는 한세아의 설명에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일단 몸에 큰 이상이 없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었다. 관계를 맺은 이후 알이 나오지 않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으니 남은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지 않은가.

바로 그때.

"으아···."

뒤에서 힘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한세아, 최미소와 짧게 대화를 나눈 사이에 지수, 예린에게 잔뜩 시달린 엘프리데가 내는 소리였다.

그녀는 정신없이 자기 주위를 돌아다니는 지수와 예린에 의해 눈이 해롱해롱하게 변해 있었다. 가뜩이나 잠을 너무 오래 잔 탓에 몸을 가누기 힘든 엘프리데였기에 그녀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 모양이었다.

"지수야, 엘프리데 그만 괴롭히고 여기 잠깐 와봐."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그래. 그냥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는 행동이지. 그러기 전에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은 빼먹을 수 없는 과정이라고."

그리 말한 지수는 엘프리데를 보며 코를 마저 킁킁 거렸다.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몸에 각인시키기 위한 지수 나름의 과정이라는 걸 알긴 알지만, 뭔가 살 내음에 심취한 지수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지수야."

"알았어, 알았다고. 엘프리데라고 했지? 이제 가. 통과야."

"네, 네···!"

엘프리데는 중간에 붙잡힐까 두렵다는 듯 도도도 달려가 예린의 뒤에 숨었다. 기껏 친해지라고 내버려 두었더니 어째 사이가 더 멀어진 것 같았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예린만 득을 본 셈이다.

"그래서 뭔데?"

내 손짓을 따라 가까이 몸을 붙인 지수.

"뭐 별 건 아니고, 혹시 오늘 여기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소리 들은 적 없어?"

"이상한 소리? 무슨 소리 말하는 거야?"

"괴물 소리라던가, 짐승 소리라던가. 그런 소리들 있잖아."

"음···, 괴물 소리라···."

내게 팔짱을 낀 지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좌우로 흔들리던 복슬복슬 꼬리가 멈춘 걸 보니 진지하게 기억을 헤집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긴 했는데 괴물 소리는 들은 적이 없네. 근데 갑자기 왜? 뭔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고 엘프리데가 눈을 뜨면서 무슨 말을 외쳤었는데, 칸에게 물어보니까 그게 '여기에 괴물이 있어요!'라는 말이었다고 하더라고. 나는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지만 너는 감각이 좋으니까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야."

못 들었다면 되었다며 고개를 흔든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난쟁이 칸이 말하기를, 그때 엘프리데는 꿈이 덜 깬 상태라 횡설수설한 말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기도 했고.

그리고 경계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는 군인들이 지키는 벙커에 괴물이 들어와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이지 않은가.

바로 그때.

"아! 무슨 소리가 들리긴 들렸어."

아직 기억을 헤집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휙 들었다.

"무슨 소리? 확실해?"

한세아를 도와 식사 전 테이블을 정리하려는 내가 지수의 말에 몸을 휙 돌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묘하게 장난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일단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겠지.

"짐승 소리는 들리더라. 이야,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복도 구석이긴 해도 거기서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었지. 너무 뜨거워서 나도 모르게 세아 언니랑 호다닥 도망치고 말았지 뭐야."

"······."

내가 찾는 짐승 소리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였기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에 지수가 음흉하게 내 팔을 감싸 비비적거렸다. 복슬복슬한 꼬리로 내 등을 살살 간지럽히고, 목에 걸린 초커를 내보이면서.

"오빠. 솔직히 바깥에서 하는 건 아직 무리고, 우리 개인실 하나 달라고 할까···?"

"······."

···뭐라는 거야. 이 암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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