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48화 (349/497)

Chapter 348 - 348. 방향 (12)

"칸? 여기서 뭐 해요?"

"바람이나 쐬러 나왔다. 좁은 곳에만 있다 보니 영 답답해서 말이야."

"작업은 다 끝났나 보네요."

"아니, 다 끝나진 않았어. 이제 절반 정도 끝마쳤다. 남은 절반은 조율만 하면 되는 거라 금방 끝날 것이고. 너야말로 왜 나왔느냐?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늘."

"저도 바람이나 쐬러 나왔죠. 아무래도 지하에 있어서 그런지 알게 모르게 답답하더라고요. 환기는 계속 되고 있는데."

나는 난쟁이 칸 옆에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바닥을 툭툭 두드려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들어주었다. 비는 그쳤지만, 땅은 아직 젖어 있는 까닭이다.

털썩-

감사 인사를 표한 뒤, 앉은 의자는 단단해 보이는 외형과 다르게 생각보다 편했다. 바닥이 완전히 평면이 아닌 살짝 파여 있는 홈이 있는 덕분이었다.

"그래, 지켜보니까 그 아이 상태는 좀 어떻더냐."

난쟁이 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오늘 작업이 매우 고되었는지 피곤해 보였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데···."

"없는데? 뭔가 문제가 있긴 있나 보구나."

"엘프리데에게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엇을?"

"이 세상이요. 정확히는 세상이 이렇게 된 원인과 과정이요.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네요."

"흠···. 확실히 그게 문제긴 문제였지. 헌데 그리 고민할 필요가 있느냐? 그냥 전부 말해주면 될 것을. 있는 그대로 말이다."

난쟁이 칸은 깊게 고민할 사안은 아니라는 말과 함께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댔다. 원래는 등받이가 존재하지 않는 의자였으나, 칸이 땅울림을 이용해 추가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세계수가 오염되었고, 그 오염된 세계수가 세상을 망가트렸다는 걸 말하라고요? 엘프리데는 세계수의 영향을 많이 받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랬잖아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느냐?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 없는 이야기고, 언제고 드러날 진실이야. 그리고 그 아이는 네 생각보다 약하지 않다. 말했지 않느냐. 외형에 비해 나이는 제대로 먹었다고. 괜히 어쭙잖게 빙빙 답을 돌리는 것보다 바로 알려주는 편이 낫다. 너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정공법이라는 것이 괜히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난쟁이 칸. 그는 엘프리데가 보이는 것만큼 어린아이가 아니며, 월계수 모양의 숲지기 표식을 괜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이미 성인이라는 것.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속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단순히 오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것, 특히 그들이 원치 않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원래 그런 법이니 말이다.

지금 내가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건 칼카타가 내게 엘프리데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런가요."

내 입에서 나온 답은 어지럽게 엉킨 속내와는 다른 답이었다.

"그러게 내가 그냥 전반적인 기억도 수정으로 전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머리에 부담이 가는 정도야 며칠 쉬면 괜찮아졌을 텐데."

난쟁이 칸은 그런 내 속내를 꿰뚫어 본 듯 혀를 쯧쯧 찼다. 그는 자기 제안을 거부한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런 얼굴을 보여주고 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 모르죠. 수정으로 정보를 막 전해줬다가 훼까닥한 엘프리데가 발전기를 진짜 망가트렸을 수도요."

"흥, 그러기 전에 머리를 또 깨 놓으면 된다."

"칸 기술자라면서요···. 사람은 때린다고 안 고쳐진다고요. ···뭐, 일단 내일 해가 뜨면 위로 올라와서 지상을 보여주기로 했어요. 말로 전해주는 것보다는 이곳저곳 보여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나는 찌뿌둥한 몸을 비틀어 풀어 주었다. 수정으로 기억을 뚝 하고 전달하면 나는 확실히 편하겠지. 그러나 그건 엘프리데를 배려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강제적으로 주입된 정보는 본래 가지고 있던 인식과 상충될수록 머리에 부담을 가하고, 그렇게 전해진 기억 또한 좋은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라고 배웠다.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래, 현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그러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나한테 오고. 수정 파편의 여유분이 꽤 많아서 기억을 전해주는 것 정도는 별일 아니니까."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나와 칸의 대화는 여기서 끊어졌다. 정확히는 둘 다 멍하니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 옳았다. 반짝이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흐린 밤하늘을 말이다.

"비가 그쳤는데 하늘은 여전히 흐리네요. 폭우가 지나간 다음이라 오늘만큼은 진짜 맑을 줄 알았거든요. 별이라도 구경하려고 나온 건데 흐려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언제쯤 별을 볼 수 있을까요."

"언제 별을 볼 수 있느냐, 라···. 그런 말은 틀렸구나. 아니, 틀렸다고 하기보다는 누가 어느 상황에서 별을 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더 옳겠지. 별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으니 말이다. 별은 달라지지 않아. 달라지는 건 그 별을 보는 사람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하늘의 구름이 걷히면 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칸. 그는 그러니 단순히 별을 보는 것보다 그 별을 보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라 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밤하늘의 별 정도야 밤만 되면 질리도록 볼 수 있었으니까. 지금의 밤하늘에서도 구름이 조금만 걷히면 틈 사이로 별빛이 희미하게나마 살짝 보이기도 했고.

"그럼 나중에 일이 다 끝났을 때, 다 같이 모여서 별이라도 볼까요? 오염된 세계수를 불태우고,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요."

나는 우리 인간이 다시 만들어 낼 세상을 상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상상하는 미래에는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그리고 난쟁이인 조이, 칸, 르한, 탄을 비롯한 벙커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하나 벽 안에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세상이었다.

"그거 좋구나.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캠핑이 취미였거든. 세계수를 태워서 만든 캠프 파이어라니··· 참 볼 만 하겠어."

"캠프 파이어요? 와···, 칸이 저보다 한 술 더 뜨네요. 저는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세계수로 캠프파이어라니. 나는 칸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도 그럴게, 우리 지구 사람이야 세계수를 그냥 큰 나무로 인식할 뿐이지만, 난쟁이 칸은 세계수를 하나의 신으로 보고 있지 않던가.

"제일 재밌는 구경이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더냐. 마침 여기 위치가 최적이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구경하면 술 안주가 따로 없겠지."

난쟁이 칸은 오늘 남은 작업만 없다면 거나하게 취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신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에서 생수 두 병을 꺼냈고, 한 병을 내게 건넸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자꾸나. 내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술을 마셔서 속을 덥히는 건 아직 일러. 지금은 냉수로 속을 식힐 때다. 차가운 이성으로 시기를 기다릴 때지.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맞아요. 때를 기다려야죠. 아 참, 수정 발전기를 보완하면 벙커 설비도 바뀌겠네요? 자체적으로 입자를 모을 수 있게 되면 여기 사람들에게 화기를 쓸 수 있게 해준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손에서 전해지는 냉기를 느끼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내일도 바쁘다는 거다. 일단 공동 주방을 만들기로 했으니, 아마 지금쯤 조이랑 탄이 창고에서 필요한 자재들을 꺼내고 있을 거야. 나중에 더 여유가 생기면 보일러도 만들 생각이고."

"오, 보일러실 생기면 더 이상 차가운 물로 안 씻어도 되겠네요."

"물이 많이 차갑더냐? 밤에 씻은 모양이지?"

"네, 어제 늦은 밤에 씻었는데 얼어 죽을 뻔했다니까요. 물이 너무 차가워서."

나와 칸은 한동안 흐린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부분은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어두워 보여도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밤하늘처럼.

밤하늘이 아무리 어두워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푸른 하늘보다 더욱더 많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 태양 대신 뜬 달, 달과 별을 지나가는 구름, 제일 뒤에 서서 여러 빛무리들을 지켜보고 있는 배경.

낮보다는 밤에 더 많은 것들을 품는 것이 하늘이었다. 다만, 크게 티가 나지 않아 유심히 살펴봐야 할 뿐이지.

지금 우리도 그런 하늘과 같았다.

연대장은 벙커 사람들이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고 표현했으나,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이 힘들지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었다. 아이부터 시작해서 힘겨운 근무를 이어 나가고 있는 군인들은 전부가 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다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살고 싶어 하는 행동만이 중요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살고 싶어 했고, 생의 의지를 담아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수정의 봉인을 푼 지 2일이 지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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