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9 - 349. 방향 (13)
이틀.
2일이라는 시간은 짧게 느껴지기는 해도 무언가가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틀 동안이라는 시간 동안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아무리 강한 화력을 내는 무기라도 그걸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무용지물이었으니까.
강화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한세아는 총기류와 탄약을 지원받아 좀 더 능숙하게 사격을 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한편, 그녀가 만든 강화탄을 다른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몸놀림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지수는 난쟁이들에게 추가 기술을 전수받아 익히기 시작했다. 단순히 몸을 빠르게 움직이는 법만이 아닌 스파크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들어 주고, 파괴력을 올려주는 기술이었다.
비록 제대로 배운 건 아직 하루에 불과했으나, 총기나 새로운 이적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들이었다.
이곳, 여의도 세마 벙커까지 오면서 몸에 누적된 경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예린은 혼자 뭘 해 보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심각한 얼굴로 꼬리를 바닥을 탁탁 칠 때마다 걱정하는 마음에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답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면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는 아이였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벙커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푸른 수정의 봉인을 풀면서 나온 부산물로 기존의 수정 발전기를 보완했고, 그 덕분에 불을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현재는 시범 운용을 하는 중이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된 상태이지만, 벙커 사람들은 따뜻한 음식과 잠시나마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형! 이거 제가 아껴 놓은 건데 줄게요! 고마움의 표시예요! 저희 엄마는 아직 형을 안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저는 형 믿어요!"
···이렇게 이름 모를 어린 아이가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사탕 하나를 줄 정도로 말이다.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 개방되는 공동 주방과 새로 증축된 샤워실을 이용하기 위한 줄에서 빠져나왔던 아이. 녀석은 내게 사탕을 주고 간 다음에 돌아갔다.
아이 특유의 산만한 말이 우다다 지나간 탓에 나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손에 올려진 사탕을 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웃음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운 것은 깊은 한숨이었다.
'···엘프리데.'
이틀 동안 생긴 또 다른 변화. 그건 엘프리데의 상태였다. 어제 하루 동안 나와 함께 벙커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지상으로 올라와서 생긴 설렘에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바뀌었으니까.
멀리 보이는 세계수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오염되었다는 것을 본 순간부터 깨달은 엘프리데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오염된 세계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망가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었고.
그 뒤로, 다시 지하로 내려온 엘프리데는 침대에 걸터앉아 멍한 표정만 지었다. 누가 말을 걸어도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대꾸하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자기 기대와 달랐던 현실로부터 그녀가 받은 심적 충격은 장난이 아니었을 테니까.
여기까지가 어제의 이야기였고, 엘프리데가 이 세상을 좀 더 알아야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자리를 비운 것이 오늘 아침의 이야기였다.
정신을 차린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도 않은 채 바깥으로 나간 것이었다.
우리가 알아낸 사실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해준 것이 실수였을까.
하필이면 지수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일어난 일이라 엘프리데가 방을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았다.
오전 9시가 다 되도록 방으로 돌아오지 않은 엘프리데가 걱정되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 처음에는 다 같이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걸 막은 건 나였다.
괜히 소란을 피우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사라진 엘프리데를 찾는 건 나 혼자서 해도 충분했던 까닭이다.
그녀를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예린이 내게 준 반지를 사용하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 판단한 나는 지수, 한세아, 최미소, 예린을 안심시키며 훈련 받으러 가라고 등을 떠밀었고, 사라진 엘프리데를 찾기 위해 방을 나선 상황이었다.
"정말 이쪽이 맞아?"
나는 내 발치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회색빛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반지에 푸른 입자를 두르자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난 고양이. 벙커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지하에는 볼일이 없다는 것처럼 곧장 지상으로 올라가는 출입구로 향했다.
[까, 꾸-]
맞으니까 따라오라는 건지 뭔지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회색빛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햇빛을 부수면서 앞으로 우다다 뛰었다.
'···일단 따라가는 게 맞겠지.'
어차피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상황이니 지금 당장 믿을 것은 이 고양이뿐이지 않은가.
이윽고, 지상으로 올라온 내가 고양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벙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어느 고층 빌딩이었다.
휘이이이-
선선한 바람이 빌딩을 한차례 휘감고 지나간다. 건물 외벽에 달라붙어 있는 넝쿨의 잎사귀가 흔들리는 건 덤이었다.
"여긴가?"
나는 빌딩 입구에서 그루밍을 하는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고층 빌딩들처럼 유리창이 거의 깨져 있는 건물, 빗물에 먼지가 씻겨 나가 한층 더 반짝거리는 유리 파편, 흉하게 드러난 건물 골조.
경계 구역 안쪽에 있는 덕분에 주변 다른 건물들과 달리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눈앞의 빌딩은 폐건물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한 외형이었다.
주위에 들리는 소리는 내가 내는 숨소리밖에 없기 때문일까. 건물은 괜스레 음산해 보였다. 해가 짱짱한 낮인데도 말이다.
"후우···."
나는 건물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고양이가 모습을 감췄다. 아직 푸른 입자가 전부 소모된 것이 아닌데 사라진 것을 보니, 녀석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반지에 남은 푸른 입자는 다음에 또 쓸 일이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아침 햇볕이 망가진 로비를 비춘다. 훤하게 뚫린 유리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이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를 비춘다.
엘프리데가 몇 층에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높이는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이곳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고, 내가 다른 군인들에게 듣기론 이 건물은 중간에 계단이 뚝 끊겨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아무리 높이 올라가 봤자 10층 정도에 있으리라.
'···설마 부서진 계단을 훌쩍 넘어간 건 아니겠지? 아니면 좋겠는데.'
나는 희망 사항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비상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층씩 올라가면서 점점 높아지는 주변의 풍경과 주위에서 소리를 귀에 담았다.
턱-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공허한 발소리가 비상 계단을 타고 빙빙 돌았다. 외벽이 군데군데 무너져 있어도 메아리가 치는 건 여전했다.
찰박-
간혹 깨진 바닥 타일 사이에 고인 물이 밟혀 물방울이 튀기도 했다. 비가 그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으나, 그림자가 진 덕분에 아직 물이 증발하지 않은 모양이다.
빠그극-
건물 중앙을 뚫고 주변으로 퍼진 나무뿌리. 건물을 흉하게 만드는 원인인 그것의 잔뿌리가 벽, 천장, 바닥을 가리지 않고 박혀 들어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최근에 내린 비를 흠뻑 머금은 나무뿌리는 눈에 띄게 성장해 있었다. 이러다가 또 지진이 일어나거나 건물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수준이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씩 보면서 올라가고 있을 때.
내 귀가 작은 훌쩍거림을 인지했을 때.
"······."
나는 아무도 없는, 오로지 흉한 모습만 있는 건물의 중간층에 있는 엘프리데를 발견했다. 그녀는 유리창이 깨져 바깥 바람이 들어오는 가장자리에서 웅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풍기는 침울한 기색이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내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움찔!
긴 귀를 찡긋 움직이는 걸 보니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이미 인지한 모양이다. 솔직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각은 지수에 비할 정도로 좋았으니 말이다.
털썩-
내가 아무 말없이 다가가 옆에 앉자, 그 움찔거림은 몸 전체로 퍼졌다. 그럼에도, 엘프리데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더 웅크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 대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마리의 참새. 그녀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참새가 낯선 이의 등장에 소리 없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
지금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열기보다는 옆에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휘이이잉-
그리 판단한 나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녀가 입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다.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나와 그녀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멀리 떨어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가 너무 허전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