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0 - 350. 방향 (14)
목덜미에 월계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엘프리데. 숲과 관련이 있는, 세계수를 어머니로 따르는 그녀이기 때문일까. 작은 새 한 마리가 그녀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앉아 있었다.
그 새는 엘프리데를 위로해주려는 것처럼 얌전히 앉아 곁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가만히 그 새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저는요. 새로운 곳에 가거나 어딘가에 한동안 머물러야 하는 일이 생기면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요."
엘프리데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혼자서 많이 울었는지 눈가가 매우 붉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던 눈망울도 빛을 잃은 상태였다.
"주위가 한적한 나무 위의 가지, 나무뿌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생긴 공간, 시냇물이 졸졸 흘러 발을 담글 수 있는 물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 같은 곳이요. 그런 곳을 찾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눈에 익숙해지고···, 지나가는 사람이 마음에 익숙해지고···, 그렇게 주변의 풍경마저 몸에 익숙해지고 나면 깨닫는 것이 하나 있어요."
"······."
"'아, 이제 나도 여기 일원이구나. 익숙하지 않은 장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사히 자리를 잡았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그제야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돼요. 이때가 되면 더 이상 낯선 것이 없다는 안도감이 들거든요."
그녀가 멍하니 바깥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
나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어 주기만 했다. 엘프리데가 가슴에 담고 있는 말을 전부 꺼낼 수 있도록.
"나무는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어요. 물가는 있지만, 제가 있을 곳이 없어요. 그저 괴물들이, 오염된 식물들이, 불길한 기운만이 있을 뿐이라서. 그래서 그런가 봐요."
"······."
"······이현우."
엘프리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부른 녹안은 한동안 입술만 달싹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저를 구했어요? 그냥 수정에서 꺼내지 않았어도 되었잖아요. 저요. 얼핏 기억이 나요. 안개가 가득한 곳에서 누군가가 저를 꺼내 주었다는 것이요. 저를 안개에서 끄집어내준 그 손길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수정 안에 갇혀서 죽어 가고 있었겠죠."
나는 그 말에 순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언제 그런 웃음을 지었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사람을 구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던가. 내가 나 혼자만 챙기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 또한 내게 도움을 주지 않았겠지.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는 것. 이것이 누나가 내게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내 말에 엘프리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눈망울에 물기가 차올랐고, 뚝뚝 떨어졌다.
"···저는, 당신들에게 있어 죽이고 싶은 사람일 텐데, 죄송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조차도 모르겠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
"저는···, 우리는···. 그냥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음이 너무 아파요. 무언가가 자꾸 가슴을 가시로 찔러요. 무엇보다 저를 진짜로 아프게 하는 사실은 어머니가 이미 오염되었었다는 거예요. 저기 하늘을 뒤덮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요."
"······."
"어머니는 이곳에 와서 오염된 것이 아니예요. 처음부터, 공간을 넘기 전부터 오염되었다는 말이에요. 결국 시간문제였을 뿐, 어머니는 언제고 폭주하고 말았겠죠. 다 저희 탓이에요···. 저희가 고향을 지키지 못해서··· 고향에서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엘프리데가, 내가, 우리가 용서를 구해야 할 자들은 이미 다 죽었기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생명이 덧없이 스러지고 말았기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씨앗을 3개로 나눠서 폭주한 것이 아닌, 지구에 오기 전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구의 인간이 단순한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책임은 오로지 지구 바깥의 인간들만의 책임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수가 발아하지 못해 저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졸린 사가 세계수의 씨앗을 연구하지 않고 바로 폐기했더라면, 하다못해 탐사선을 화성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세계수의 씨앗이 재앙에 오염되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고향을 덮칠 재앙을 이겨 낼 또 다른 방법을 찾았더라면, 그래서 새로운 고향을 찾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한번 따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니까.
그렇기에 나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라는 말을 내뱉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입에 담았다. 이리저리 어긋난 방향을 한데 모아 꼭꼭 씹어서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염된 세계수를 불태울 거야. 그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내가 정한 길이거든."
"······."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가 아니야. 단순히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살고 싶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거지.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멈추지 않고 움직일 거야. 내가 믿는 방향을 향해서."
"···방향······."
"그래, 방향. 너를 내게 부탁한 사람이 해준 말이야. 믿음보다 믿음의 방향이 중요하다고 하더라."
"저를 부탁한 사람···? 누구예요? 저를 꿈에서 구해 준 건 당신이었잖아요."
엘프리데는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피부가 쓸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붉었던 눈가가 한층 더 붉어졌다.
"너를 봉인해서 풀어 준 건 내가 맞아. 하지만 안개가 가득한 도시에서 가장 먼저 너를 구한 사람은 따로 있어. 대전사. 대전사 칼카타. 그가 너를 구했지. 나도 구했고. 방에 있는 사람들 전부 그가 구한 거야."
"칼카타···. 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부족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아요. 아마 검은 산맥 부족일 거예요. 대전사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 부족은 거기밖에 없거든요. 근데- 아······."
칼카타의 이름을 곱씹던 엘프리데. 그녀는 고향의 이야기에 순간 기운 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다가 끝으로 갈수록 말을 흐렸다. 지금까지 칼카타를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아무튼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니? 살고 싶어서 넘어왔다고 했잖아. 고향에서 이 지구로."
나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녀가 괜스레 또 자책을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우울해하는데 여기서 침울한 이야기로 힘 빠지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맞아요. 살고 싶어요. 아니, 살아야 해요."
"그럼 여기에 가만히 있는 건 정답이 아니야. 정확히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답에 가까운 답은 살고 싶으면 움직여야 한다는 거고. 이대로 가면, 정확히는 저 오염된 세계수를 그대로 두면 우리 인간은 전부 죽고 마니까."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세계수가 지금보다 더 성장하게 된다면 정말로 끝장이라는 것이었다.
막을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세계수의 성장은 끝이 없으니 말이다.
거대한 나무가 점점 더 성장해서 가지가 하늘을 뒤덮고, 뿌리가 지상을 완전히 뒤덮는 순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답을 하기를 한참 망설였던 엘리프데는 태양의 오른편에 있던 기다란 구름이 완전히 왼편으로 움직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아니, 오염된 세계수를 불태운다고 하셨죠. 저도 도울게요. 제가 돕게 해주세요."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아뇨, 솔직히 말하면 진짜 괜찮지는 않아요. 저 같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거든요.
모든 생활과 문화가 어머니와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구요. 하지만 저건 더 이상 저희가 부르던 어머니가 아니예요.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아직 저희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잘못을 바로잡는 건 제가 되어야 해요. 그게 숲지기의 사명이니까.
"
숲지기의 사명.
그것은 오염된 환부를 도려내어 숲이 망가지지 않게 지키는 것.
비록 그 환부가 자신들이 지키던 세계수가 되고 말았지만, 숲지기가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오염된 부분을 제거해서 숲을 지키는 것이 숲지기가 할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목덜미의 월계수 문양을 드러내보이며 말한 엘프리데는 자신을 이제부터 엘프리데가 아닌 '엘리'로 불러달라고 했다. 과거의 이름을 되찾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라는 말과 함께.
"숲지기라···. 그래, 엘리. 이제부터 그렇게 부를게."
고작 내가 몇 마디 해주는 것으로 엘리의 마음이 전부 나아지진 않겠지.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신도 아니고 어찌 말 몇 마디로 사람을 달래겠는가.
그러나 지금만큼은,
내가 건넨 그 몇 마디에 힘입어 일어설 수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엘리가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당장 주저앉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일을 마쳤을 때, 결국 그녀는 끝내 당당히 이곳이 익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근데 어깨에 있는 그 참새는 네가 길들인 거야? 신기하네.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진짜 동물은 보기 힘들거든."
무거운 이야기를 끝맺고 싶은 나는 화제를 돌렸다. 아까부터 시선을 강탈하고 있는 참새에 대한 이야기였다.
"네? 무슨 새요?"
"······? 참새 말이야. 지금 네 어깨에 앉아 있는 거."
"어깨에 있는···?"
엘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내 내 시선이 보고 있는 곳을 따라 시야를 옮겼다.
짹-
뭘 보냐고 말하는 듯한 참새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친 것과 동시에 엘리는 몸을 비틀면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