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51화 (352/497)

Chapter 351 - 351. 준비 (1)

화들짝 놀란 엘리가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급하게 일어났는지 미처 무게 중심도 잡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면서 어깨를 털어낸 그녀는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꺄아악! 뭐야! 뭐예요···!"

엘리의 어깨에 편하게 앉아 있던 참새는 그녀의 격한 몸부림에 밀려 위로 날아올랐다. 그 새는 잘 있다가 갑자기 왜 이러냐며 불만스레 지저귀는 소리를 냈고, 나와 엘리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깜짝이야···. 뭐야, 저 새는···."

이내 훤하게 뚫린 바깥으로 날아가 사라진 참새를 멍하니 바라보는 엘리. 그녀의 눈에는 세계수가 보이는 풍경으로 멀어지는 참새와 뜬금없이 다른 곳에서 나타난 또 다른 참새 한 마리가 비쳐지고 있었다.

단정했던 금발이 약간 산발이 된 건 덤이었다.

"···이게 뭔. ······몰랐어? 네가 길들인 거 아니야?"

나도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그저 새가 어깨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여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 몰랐어요···! 왜 말 안 해줬어요···.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얼마나 놀랐는지 녹색 눈망울을 매우 크게 뜨고 있는 엘리였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려는 듯 가슴팍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새빨개진 귀가 파닥파닥거린다.

"아니, 널 여기서 처음 볼 때부터 새가 앉아 있길래 네가 길들인 줄 알고 있었지. 중간에 물어보고 싶긴 했는데,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워낙에 우울해해서 말이야."

비록 작고 귀여운 참새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참새와 눈이 마주쳐서 놀란 모양이다. 뭔가 숲지기에 대한 환상이 깨져 나가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엘리가 수정에 갇혀 있을 때, 내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가 난쟁이 칸에게 호통을 듣고 시무룩한 기색으로 놓아준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근처로 접근하니 둥둥 떠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일도 있었지.

그런 일들을 하나씩 짚어보니 엘리가 상당한 허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내가 보기에는 챙김이 필요한 사람이 맞다. 칸이 외형만 어릴뿐,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하긴 했어도 말이다.

"엘리, 혹시 수정안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 더 기억나? 내가 너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다닌 일이나 너 혼자 막 둥둥 떠서 빙글빙글 주위를 돌았던 일 말이야. 아까 날아간 참새처럼."

"···기억 안 나요."

엘리는 내 장난기 가득한 말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겨우 답했다. 귀의 파닥거림도 순간 멈췄다가 자신은 찔리는 구석이 없다는 듯 다시 조금씩 파닥이기 시작했다.

"아닌데? 기억나는 것 같은데? 너 아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고 했었잖아. 정말 기억 안 나?"

"기, 기억 안 나요! 몰라요! 이제 갈래요!"

"천천히 가! 그러다가 넘어질라."

나는 순식간에 멀어진 엘리를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푸르르 턴 그녀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으로 황급히 자리를 피한 상태였다.

벙커 사람들의 지구 바깥에서 온 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고 하기보다는 좋은 편에 속했다. 사람들이 난쟁이 칸 같은 사람들의 전후 사정을 얼추 알고 있고, 그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벙커에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엘리를 향한 시선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 또한 오히려 연민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런 시선을 받게 된 것에는 그녀가 약간 어린 외형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한몫하기도 했다. 실제로 나이가 어리지는 않지만, 눈으로 보이는 정보는 직관적이기에 무심코 그것을 믿어 버리고 마니까.

실제로 나도 그들이 잘못했다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무작정 떠넘긴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겠지.

내가 그녀를 따라 계단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손. 잡아도 돼요? 익숙해지고 싶어서···."

엘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면서.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린 아이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엘리. 가자. 다들 널 걱정하고 있을 거야."

나는 망설임없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괜히 밀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와 엘리는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올라올 때 한 사람의 발소리만 들렸던 계단에는 무게감이 다른 두 사람의 발소리가 겹쳐 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돌아가면 사과부터 해야겠네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아무도 너를 탓할 사람은 없으니까. 지금처럼 메모 하나만 남기고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생각보다 글씨체가 자연스러웠다며 놀리는 말에 엘리는 창피한 것처럼 얼굴을 더욱 더 붉게 물들였다.

"그럼 역시 사과부터 해야겠어요. 제가 언니들 신경 쓰이게 만든 건 사실이니까요."

"언니들?"

"···? 예린이랑 지안이 말고 다 언니 맞잖아요?"

혹시 호칭이 틀렸냐고 묻는 엘프리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건 맞는데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고. 그냥 내 생각보다 더 친해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했잖아요. 조금씩 익숙해지겠다구요. 처음은 호칭부터예요. 언니들이 잘 챙겨 주기도 했으니까 저도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요. 그게 사람으로서 도리이기도 하구."

여자들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엘리가 침울한 기색을 벗어 던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들었어?"

"그, 그건 실수예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아까는 저한테 탓할 사람 없다고 했잖아요!"

"지금처럼 메모만 남기고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라고 말했잖아. 다른 건 몰라도 이번 건 혼나야지."

나는 킥킥 웃으면서 엘리가 놓친 사실 하나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잡은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잡았다.

"그럴 수가···!"

곰곰이 생각한 엘리는 이내 내 말이 맞다는 걸 깨닫고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 걸음은 강제로 다시 내딛게 되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내가 앞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저 잠깐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잠깐만! 진짜 잠깐이면 되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안 돼."

"아···!"

엘리의 탄식 소리와 함께 신발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계단 통로를 빙빙 맴돌았다.

그 뒤로, 건물에서 빠져나온 나와 엘리는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원래 사과, 화해, 용서 같은 일들은 후딱 해치워야 마음이 편한 법이니까.

***

벙커 방 앞.

"···저 들어가요? 진짜 들어가요?"

엘리가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면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방 앞까지 속절없이 끌려온 그녀는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뭘 자꾸 망설여. 어차피 우리 이 앞에 있는 이미 다 알고 있을걸?"

"그럴 수가···!"

"그러니까 어서 들어가서 좀 쉬자."

그리 말한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뒤에서 작게 들리는 엘리의 비명을 무시한 채로.

그와 동시에.

"아저씨!"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수가 나를 반겼다. 붕붕 돌아가는 꼬리가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물 속이었다면 뒤로 소용돌이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어? 벌써 왔어? 오늘은 빨리 왔네?"

나는 제일 먼저 반긴 지수를 보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부에는 지수 혼자 있는 것이 아닌 예린, 한세아, 최미소도 있었다.

한세아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시각은 아닌데 벌써 돌아온 걸 보니 바깥으로 나간 엘리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뭐, 점심도 먹어야 하고, 이왕 먹는 거 다 같이 모여서 먹으면 좋으니까 잠깐 온 거야. 먹고 다시 나가려고."

"세아씨도요?"

"아, 저는 오늘 더 할 일 없어요. 강화탄 만든 걸 보더니 난쟁이분들이 좀 더 연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할 일은 이제 끝!"

한세아는 강화탄을 잔뜩 만드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며 축 늘어진 흉내를 냈다. 그러나 가슴만큼은 당당했다.

나, 지수, 한세아는 아직 문 바깥쪽에 있는 엘리가 부담을 가지지 않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녀들도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실실 웃었다.

"욱···. 오빠! 저 약속 잘 지켰어요!"

흘러가는 상황을 고양이처럼 슬쩍 살핀 예린은 손에 쥐고 있던 초코바를 누가 볼 새라 급하게 입에 욱여 넣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숨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아이였으나, 이내 정면 돌파가 답이라고 판단한 듯 당당하게 나온 것이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초코바를 계속 먹고 있었다는 건 이미 들켰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초코바 억제책을 한번 구해야할 듯싶다.

최미소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작게 웃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아기 용품이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난쟁이들의 이쁨을 독차지하고 있는 지안이 앞으로 온 물건들이었다.

난쟁이들의 선물 공세 덕분에 한때 어디에서 구해야하나 막막한 심정을 만들었던 지안이의 용품은 이제 넉넉할 정도였다.

바로 그때.

"걱정하게 만들어서 죄, 죄송합니다앗···!"

뒤에서 튀어나온 엘리가 물구나무를 서면서 외쳤다. 흔히 그랜절이라고 하는 구도였다.

'뭐야, 저 자세는.'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서로 당황한 얼굴로 마주 보다가 이내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치 네가 저렇게 하라고 말한 거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나를 탓하는 듯한 시선에 나는 억울함을 담은 시선으로 화답했다. 저런 걸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알려 준 적도 없으니까.

이번만큼은 진짜로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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