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2 - 352. 준비 (2)
한껏 당황한 우리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꽈당-!
"악!"
불안정하게 몸이 흔들리다가 결국 넘어지는 엘리를 보았을 때였다. 그녀는 우리가 뭐라 말을 하지 못하자 다시 물구나무를 서려고 했다.
"동작 그만!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나는 그런 엘리를 황급히 말렸다. 한 번 더 했다간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매콤한 손바닥으로 바뀔 것 같았으니까.
"사과하라고 했잖아요···?"
물구나무를 서려고 몸을 다시 웅크렸던 엘리가 몸을 뒤로 물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가 미동도 안 하는 걸 보니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아니, 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하라고는 말 안 했잖아."
"이게 최고의 사과 방법이라는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다."
"······."
아무래도 수정으로 전달한 기억에 이상한 것이 섞여 들어간 모양이다. 난쟁이 칸이 언어를 포함해서 머리에 부담을 주지 않는 잡다한 정보들을 주겠다고 말은 하긴 했으나, 이런 이상한 것을 넘겨 주었을 줄은 몰랐다.
"···현우씨."
한숨을 폭 내쉬면서 나지막하게 나를 부르는 한세아. 그녀는 아무리 그래도 사과를 이렇게 시키는 건 장난이라도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시선을 보냈다.
"아니···! 아니···. 아니, 그."
뭐라 부정하고는 싶은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혀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엘리! 사과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하는 거야."
한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을 놀려 먹은 놈이 된 나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과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지수, 예린, 최미소까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 아! 알겠어요!"
내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살펴본 엘리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허리를 숙여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말없이 사라져서 잘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중심을 잡기 위해 몸에 힘을 꽉 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말끝이 흐려지거나 톤이 모호하게 어긋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빨개진 귀가 파닥거렸다. 처음에 자신이 한 행동이 정답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걱정은 많이 하긴 했지만,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잖아요."
한세아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엘리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대하듯 엘리의 등을 토닥거렸다.
"나도 세아 언니랑 같은 생각이야. 내 생각보다 아저씨가 빨리 찾아서 데려오기도 했고, 사과도 했으니까 혼은 내지 않을게. ···뭐, 애초에 내가 너를 혼낸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도 않고 말이야."
"맞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아···."
자신을 둘러싼 지수, 예린, 한세아를 본 엘리는 입을 작게 벌렸다가 꾹 깨물었다. 녹색 눈망울에 물기가 어리긴 했으나,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근데 엘리? 왜 엘리라고 불러, 아저씨?"
나는 지수에게 무어라 답을 주려고 했지만, 내가 답하는 것보다 엘리가 답하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이제부터 엘프리데가 아니라 엘리라고 불러 주세요! 그편이 부르기도 편하고,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뭐야. 애칭이야? 엘리···. 그래, 엘리. 이렇게 부르는 게 입에 더 감기기는 하네. 이제 그렇게 부를게."
"네···!"
고개를 크게 끄덕인 엘리를 보며 한차례 웃은 예린, 한세아, 최미소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당장 급한 일은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
꼬르륵···
그녀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사람이 배꼽시계를 울렸다. 범인은 확실하게 엘리였다. 소리가 워낙 커서 헷갈리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범인이 빨갛게 물든 고개를 숙이는 걸로 자백을 하기도 했다.
"······."
"···배고프지? 어서 밥 먹자. 세아씨, 그릇은 제가 꺼내오겠습니다."
"넵, 오늘은 따로 준비한 게 있어서 큰 그릇으로 가져다주세요!"
우리는 엘리가 창피함을 더 느끼지 않도록 분주하게 움직이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소용은 없는 듯했다. 주변을 곁눈질한 그녀는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녀가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사실상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 망가진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엘리는 물조차 넘기지 못했었다.
고작 하루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평소에 건강했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엘리의 경우에는 가뜩이나 몸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몸 관리에 힘을 써야만 상황이었고, 하루 이상의 공복은 건강을 크게 해치는 일이었다.
"오늘은 특식이에요!"
내가 그릇을 가지러 간 사이 뒤에서 짜잔 소리가 들려왔다. 한세아가 배급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외친 것이다.
"어?! 고기! 고기탕이다!"
"꼬리 곰탕이야. 공동 주방 생긴 기념이라며 배급해주시더라구. 사골 국물이랑 고기로 몸보신하라고 하시더라."
그녀가 꺼낸 것은 예전 군대에 있을 때 가끔 나왔던 꼬리 곰탕이었다. 정확히는 그것이 담긴 캔이었다.
어쩐지 엘리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올 때 주방이 개방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앞에서 줄 서 있더라니. 그 사람들도 뜨거운 국물을 먹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고기···!"
한세아가 무어라 설명해 줘도 예린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저 잔뜩 신나서 방방 뛸 따름이었다. 갑작스레 한세아가 커다란 꼬리 곰탕 캔을 꺼낸 터라 아이도 주머니에 든 것을 이제서야 안 모양이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을 테니까.
지수, 예린은 점심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녀들의 시선은 캔이 열리면서 드러난 굳은 기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단지 굳은 기름일 뿐이지만, 냄비에 담아서 가열하면 뽀얀 국물이 되겠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냄비를 보며 우왕좌왕하던 엘리도 그녀들을 도와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미소는 냄비 밥의 뜸이 다 들었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기대감을 한껏 가진 점심 식사의 준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났다.
이윽고.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요. 양도 많이 남았어요."
너무 짜지 않게 간을 마친 한세아가 실리콘 국자로 냄비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자잘한 고기 조각들이 둥실둥실 떠올랐고, 국자에 담겼다.
"잘 먹겠습니다!"
항상 밥을 먹기 전에 외치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내뱉은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엘리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전에 후후 불어서 식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뽀얀 국물과 뜨거움이 몸이 녹아 내리게 만들었다. 적당히 감칠맛이 있는 국물이 주는 만족감이 최고였다.
엘리도 그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국물에 밥을 말아서 와구와구 먹는 중이었다. 사실 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지구 사람이 아니었을까.
'예린이를 따라 하는 건가?'
나는 엘리 옆에 앉은 예린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근처에 있는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크···!"
국물을 막 들이킨 참인 예린은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록 생김새가 달라지긴 했지만, 아이는 토종 한국인이 맞았다.
"근데 엘리, 너 고기 먹어도 돼?"
"네? 저 못 먹는 건 없는데요···? 아, 혹시 제가 너무 많이 먹었어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왠지 풀만 먹게 생겨서 한번 물어본 거야.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잘 먹는 게 보기 좋네."
지수의 말에 순간 옴뇸뇸대는 입을 멈춘 엘리에게 그녀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녀는 이내 국자를 휘저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고기 조각들을 움푹 펐고 엘리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내용물이 반쯤 줄어들어 있던 그릇에는 다시금 꽉 차게 되었다. 사골 특유의 고소한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솟는다.
"감사합니다···!"
화색을 띠며 넙죽 고개를 숙이는 엘리. 곧장 고기를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는 모양새가 귀엽기는 했다. 원체 생김새가 미형이기도하고.
'···가만.'
지수와 엘리를 보며 피식 웃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눈만 슬쩍 굴려 방 내부 인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엘리가 화기애애하게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허나, 내가 주목한 점은 그것이 아니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꼬리를 붕붕 휘두르는 지수나,
국물을 들이킬 때마다 귀가 뒤로 확 젖혀지는 예린이나,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고 킥킥 웃는 한세아나, 지안이에게 딸랑이를 흔들어 주면서 천천히 밥을 먹고 있는 최미소나, 입안 가득 넣은 밥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는 엘리나,
전부 여자라는 점이었다.
큼지막한 방 안에 남자라고는 나 혼자. 나머지 인원이 전부 여성이라는 점을 이제서야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래도 괜찮나?'
새삼 알게 된 사실. 뜬금없이 자각한 사실에 괜스레 얼굴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