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53화 (354/497)

Chapter 353 - 353. 준비 (3)

"······."

문득 수면 위로 떠오른 사실에 나는 밥 먹다 말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내가 커다란 방을 배정받았다는 건 벙커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없이 대부분 알고 있을 거다. 그도 그럴게,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오락 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니까.

누가 뭘 했다더라, 어제 어떤 어린애가 넘어져서 다쳤다더라, 군인들이 주변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옆에서 들었는데 그다지 좋진 않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것이 낯선 사람의 이야기라면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군대에서 소문이 빨리 퍼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전날 누가 잘못했다면 그 다음날 중대 전체로 퍼져 있는 것처럼.

'···혹시 가끔 여기 여성분들이 날 벌레 보듯 바라본 이유가······.'

가끔 남자들 쪽이 아닌 여자들 쪽에서 이상한 시선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시선이 섞여 있긴 했다. 그 시선이 원망의 감정이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그런 감정이 아닌 난봉꾼, 호색한을 보는 듯한 묘한 시선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누가 대놓고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자기들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은 탓에 조금 늦게 깨닫게 되고 말았다.

'그럼 저번에 내가 인사를 건넸을 때 황급히 자리를 피한 것도···?'

단순히 낯을 가려서 자리를 피한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정말로 낯을 가려서 그런 것일 가능성도 있겠지.

허나, 그 가능성보다는 내가 자신들에게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게 확실했다. 간혹 남자들 중에서 의미 없이 엄지를 올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난 그렇게 미친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된 것뿐이지만, 이번만큼은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한 명이 아닌 두 명과 연을 맺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 않은가.

내가 지금 연을 맺은 건 지수와 한세아뿐이다. 최미소는 내가 은혜를 입은 사람의 가족이고, 엘리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내게 부탁한 사람이며, 예린은 아직 미성년이다.

그리 외치며 억울하다고 호소해도 내가 맞다며 호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호소도 호응이 있어야 한번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지, 돌아오는 호응이 없다면 몰매를 맞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맞는 말이야. 처맞는 말.'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은다면 그대로 벌어질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주목한 점은 내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이 방에 나 혼자 남자라는 사실 하나뿐일 테니까.

"아저씨? 밥 더 안 먹어?"

"어? 어어, 먹어야지."

나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꼬리곰탕을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 엘리를 바라보았다.

"후아···."

그릇을 싹싹 비운 그녀는 만족스러운 소리를 흘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는 중이었다. 한껏 파닥거리던 귀도 나른해졌는지 살짝 늘어져 있었다.

"엘리."

"네?"

"혹시 말이야···."

"······?"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던 엘리가 내 부름에 고개를 살짝 들어 갸웃거렸다. 우울한 기색이 많이 날아간 덕분에 지어진 표정은 순진무구했다.

"아니, 뭐. 다른 방으로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별건 아니고, 혼자 지내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해 준 거야. 여기서 지내면 지금 이 인원들이랑 계속 부대끼면서 지내야 하니까."

솔직히 지금까지 엘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녀가 어디로 가도 되는지, 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선택권없이 강제적으로 이 방에 머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비록 형식상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직접 물어봐서 의중을 들어 보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일이었다.

"음···."

내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긴 엘리. 그녀는 이내 고개를 휙 들었다.

"저는 여기 있을래요! 그게 좋아요. 현우랑 언니들이랑 예린이랑 있고 싶어요. 혼자 지내면 너무 쓸쓸할 것 같아요."

"오구, 언니들이랑 같이 있고 싶었어? 귀여워라. 확 깨물고 싶네."

녹안을 반짝이면서 한 엘리의 말에 지수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꼬리를 좌우로 살랑거리면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깨, 깨무는 건 안 돼요···!"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야. 설마 내가 진짜 깨물겠어?"

"······."

엘리는 답하지 않고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지수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과 다르게 엘리가 지수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듯했다.

"엘리 언니! 이거 먹을래요? 저랑 나눠 먹어요!"

"이게 뭐예요?"

"아아, 이건 초코바라는 거예요···! 그야말로 신!"

"신···!"

"자요. 여기 절반. 오빠! 이거 엘리 언니랑 나눠 먹는 거니까 먹어도 괜찮죠?"

예린은 반으로 나눈 초코바 한쪽을 엘리에게 준 후에 내게 물었다. 초코바 좀 적당히 먹으라는 내 말이 떠오른 모양이다.

"먹고 양치만 잘해. 하는 김에 엘리한테도 양치하는 법 알려주고. 방식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요. 제가 엘리 언니 잘 돌볼게요!"

나는 씩씩한 예린의 답에 피식 웃으면서 테이블 위를 어지럽히고 있는 그릇을 정리했다. 저번에 나를 대신해서 한세아가 설거지를 해주었으니 오늘은 내가 그녀를 대신할 차례였다.

예린이야 워낙 당찬 아이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편이니까 이번에도 알아서 잘하겠지.

내가 없는 사이에 일행을 알게 모르게 챙기는 사람이 예린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백조가 바로 예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콸콸콸-

수도꼭지를 틀자 아래로 쏟아지는 물이 그릇 위의 기름기를 밀어낸다. 물이 다 밀어내지 못한 기름기는 예전에 만들어둔 쌀뜨물 세제로 제거해주면 된다.

퐁퐁이나 다른 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 주방 세제들로 설거지하면 톡 쏘는 식초 냄새가 아니라 향긋한 냄새도 나겠지만, 그런 인위적인 냄새는 지수가 버티기 힘들어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묘한 냄새를 맡는 것보다 차라리 식초 냄새가 낫다고.

처음에는 거품도 나지 않는 천연 세제가 낯설었으나, 금방 적응한 우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끼릭

설거지를 끝마친 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낮이 이어지는 동안 수도관에 열이 모여 데워진 물이 뚝 끊겼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다시 돌아온 테이블. 엘리와 함께 사이좋게 초코바를 옴뇸뇸거린 예린이 엘리에게 초코바에 대한 찬양을 설파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때요? 맛있었어요?"

"맛있었어요! 엄청 달았어요!"

처음에 먹기를 조금 망설였던 엘리는 이제 손가락에 묻은 초콜렛만 아쉬운 듯 쪽 빨았다. 입맛에 맞은 모양이다.

지수와 한세아는 최미소 근처에 앉아 지안이를 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주로 나누는 주제는 아기 용품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체 무슨 대화하고 있나 싶어 궁금해진 내가 그녀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응? 누구 오는데?"

지수의 귀가 쫑긋 위로 솟았다. 그녀는 몇 차례 더 귀를 쫑긋거린 뒤, 꼬리로 침대를 탁탁지면서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런 지수의 반응에 나, 예린, 한세아, 최미소, 엘리 또한 그녀를 따라서 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똑똑-

"계십니까? 최명철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최명철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지수가 인기척을 느낀 사람이 그인 모양이다.

"여기 있어. 내가 나가 볼게."

나는 일어나려는 지수와 한세아를 말리면서 문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문 앞에 다다른 순간, 곧장 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이현우씨. 다행히 방에 계셨네요. 다름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연대장실로 같이 가주실수 있으십니까?"

"예? 저 혼자만요? 아니면 같이?"

"일단은 현우씨 혼자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같이 오셔도 되고요. 상관없습니다."

최명철은 이곳에 온 용건을 말하며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음···."

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몸을 돌려 방 안에 있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녀들은 하나 같이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지수야, 이따가 다시 기술 연습하러 나간다고 했었지?"

"어, 여기서 조금 있다가 배 좀 꺼지면 나가려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면서 배를 톡톡 두드리는 지수. 그녀는 기지개를 쭉 키면서 꼬리도 쭉 폈다.

"그래, 알았어.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세아씨는 오늘 더 할 일 없으시다고 하셨죠?"

"넵. 이제 나갈 일은 없어요."

굳이 따지면 오늘 쌓인 세탁물들을 처리하는 일이 남았다는 한세아.

"그럼 엘리, 예린, 미소씨랑 같이 방에 있으시면 되겠네요. 겸사겸사 엘리 호기심도 해결해주시고. 저는 연대장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나는 빨래는 혼자 하지 말고 나중에 같이 하자며 그녀를 말린 뒤에 입을 열었다. 연대장실에 가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할 듯했다. 인원이 더 필요한 일이었다면 최명철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겠지.

이윽고.

"안녕히 잘 다녀오세요!"

예린의 배웅을 받은 나와 최명철은 복도를 따라 연대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