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5 - 355. 준비 (5)
"유인 장치가 따로 있어요."
내 말에 앞으로 나선 건 난쟁이 탄이었다.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위로 올려 두었다.
"군인들하고 합류한 뒤에 아르마딜로 변종의 이야기를 들은 저희 난쟁이들이 모여서 급하게 만든 거예요. 비록 형태는 조잡하긴 해도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해요."
탄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형광 막대기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얇아서 손으로 꺾으면 뚝 하고 부러질 것 같은 외형을 가진 유인 장치였다.
그는 여러 실전으로 검증을 끝마친 상태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쉽게도 아르마딜로 변종에게 직접 사용하지는 못했으나, 악성 변이자들에게는 확실하게 통했다고.
"이건 원래 군인들의 후퇴를 도와주는 장치였어요. 이걸 꺾은 다음에 던지면 주변 괴물들의 이목이 한순간 끌리거든요. 그렇게 괴물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군인들은 최대한 빨리 철수하는 거죠. 아무래도 재활용이 불가능한 일회성 장비인데다가 재료가 금방 떨어져서 여유분을 넉넉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요."
난쟁이 탄은 유인 장치가 들어 있는 보관함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뭐, 장치가 처음 만들어진 목적이 이랬다는 이야기고, 도구야 이제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쓸모가 달라지니 굳이 용도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죠."
"이걸로 변종을 한강 너머로 유인한다는 건가요?"
"네, 그걸 위해서 잠도 못 자고 새벽 내내 이걸 손 봤다고요. 지속 시간과 이목을 끄는 효과를 더욱 크게 만들어야 그나마 변종이 반응할 테니까요. 물론 그 탓에 장치에 이끌리는 건 변종뿐만이 아닌 주변의 다른 괴물들도 모조리 이끌리게 됐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정확한 사용 방법이 어떻게 됩니까? 단순히 꺾는 걸로 끝나는 겁니까?"
나는 장치가 보관된 상자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단순히 아르마딜로 변종 하나만 유인되는 것이 아닌 주변의 모든 괴물들이 장치가 있는 쪽으로 이끌린다면 위험 부담이 너무 큰일이지 않은가.
더욱이 장치가 수동으로 작동되는 물건이면 더욱 그러했다. 누군가가 괴물들이 모일 곳을 정하고, 그곳에서 장치를 가동시켜야 한다는 말이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꺾으면 장치가 가동돼요. 초기 버전은 사람이 손수 꺾어서 써야만 했지만, 개량된 버전인 이건 원거리에서 가동 유무를 정할 수 있게 만들어졌어요. 이현우 당신이 수정을 가져온 덕분에 장치를 손볼 수 있었네요. 비록 일회용인 건 여전하고, 리모컨이 작동이 안 되면 수동으로 꺾어야 하는 것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고요."
"그건 다행이네요."
다행히 원거리에서 장치를 가동할 수 있게 개량했다는 난쟁이 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가 세계수 근처까지 도달해서 장치를 설치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건 바뀌지 않았으나, 가동 유무를 원거리에서 정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험도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근데 굳이 손으로 꺾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까? 멀리서 총을 쏘든, 뭘 던져서 맞추든 해서 장치를 깨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깨지는 장치가 아니라서 그래요. 사람 손이 닿아야, 정확히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입자의 힘이 있어야 장치가 가동되거든요. 그전까지는 자물쇠에 걸린 상태라서 쉽게 깨지지 않는다고 보시면 돼요. 그냥 아무렇게나 깨지는 물건이었다면 다루거나 가지고 다니기 엄청 힘들었을 걸요?"
험한 움직임이 주는 충격을 버티기 위해 설계된 유인 장치는 연구소 정문을 막고 있는 장막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라 했다. 이러한 점 탓에 초기 버전의 유인 장치는 총으로 제대로 맞혀야 겨우 금이 갔다고.
그래도 총으로 계속 맞추면 결국 깨져서 가동된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리모컨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도 사격해서 깨면 된다는 말이지 않은가.
먼 거리에서 작은 막대기를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치고, 방법이 또 하나 있느냐 없는냐가 중요했다.
추가 선택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까닭이었다.
"그럼 제가 이걸 설치하고 돌아오면 되는 겁니까?"
"아니, 그건 자네가 할 일이 아닐세."
내 말에 고개를 젓는 연대장.
"······? 제가 아니라고요? 장치 설치하고 오라는 말을 전달하려고 저 부른 거 아닙니까?"
"그래, 자네가 아니야. 유인 장치를 설치하는 일은 다른 이가 맡을 걸세. 자네는 설치 임무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지. 이미 자원자도 받았고."
"···누굽니까? 자원한 사람이."
나는 위험한 임무에 자원한 사람이 있다는 연대장의 말에 눈을 끔뻑거렸다.
바로 그때.
"접니다. 제가 가기로 했습니다."
뒤로 물러나 있던 최명철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그가 연대장이 말한 자원자인 모양이다.
"제가 임무에 자원한 것이 그렇게 이상합니까?"
복잡해진 내 표정을 본 최명철이 한 말이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이상하기보다는···. 솔직히 위험하잖아요. 이 임무는. 단순히 설치만 하는 거라고는 해도 적진 한가운데로 가는 일이고."
"위험하긴 하겠죠. 하지만 저만큼 이번 임무에 딱 맞는 인재가 없습니다. 눈도 좋고, 체력도 좋고, 눈치도 좋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름 저격총도 다줄 줄 안다는 겁니다. 이현우씨가 방금 말했듯이 원거리 작동이 안 되면 멀리서 총으로 쏴서 맞출 줄 알아야 하니까요."
최명철은 벙커에 자기만한 명사수가 없다며 피식 웃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격으로 장치를 강제 가동한다는 건 단순하게 말할 사안이 아니잖아요."
그래, 단순하게만 볼 사안이 아니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사격음이 누구를 자극하겠는가. 유인 장치에 이끌리고 있는 모든 괴물들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몰려들지 않겠는가.
조금 전까지는 내가 가는걸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상황을 그냥 넘긴 것이지, 그게 내가 아니게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지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은 군인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무슨 말하고 싶으신지 다 압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가야 합니다."
최명철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굳은 결심을 한 표정은 내 입을 막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 분명했지만, 여기서 물어볼 것은 아니었다.
"본래는 시간을 충분히 더 두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네. 급하게 정했다는 것 또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우리에게는 생각보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일세."
나와 최명철을 잠시 바라본 연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도 급하게 수립된 작전안이 그리 탐탁지 않은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대장실에 있는 난쟁이 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사람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서로 협력하면 이겨 낼 수 있는 위기라고 믿는 연대장. 그가 말을 이었다.
"비록 탄약과 전차가 적을 휩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풍족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개량된 수정 발전기도 있고, 이현우 자네도 있지. 무엇보다 강화탄이라는 새로운 무기가 생겼으니 작전은 어떻게든 성공할 것일세."
그리 말한 연대장은 테이블 위에 총알 하나를 올려 두었다. 얼핏 보기에는 일반 5.56mm 소총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한세아가 만들어낸 강화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푸른 입자가 탄에 박혀 있는 총알 말이다.
"자네 연인이 만든 강화탄을 일반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은 이미 진행 중이고, 이 강화탄이 어떤 파괴력을 내는지에 대한 실험은 내일 진행할 예정이네. 둘 중 하나라도 고무적인 결과를 낸다면 이 강화탄은 아주 위력적인 무기가 될 테지. 총탄을 모조리 튕겨 내는 아르마딜로 변종에게도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비장의 한 수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고."
그는 현재 다른 난쟁이들이 수정 파편으로 강화탄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보조 장비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르마딜로 변종에 대한 문제는 우리 인간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 것이네. 솔직한 심정으로는 변종은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아. 진짜 큰 문제는 따로 있어. 겨울.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
"···겨울."
나는 겨울이라는 단어를 입에서 굴려보았다. 숨을 작게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에서 지하 특유의 찬 공기가 입안을 채웠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우리가 최대한 빨리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려는 가장 큰 이유일세.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러지 못한다면···."
연대장은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연대장실에 있는 모두가 뭉개진 그의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시설이 부족한 벙커는 이번 겨울을, 냉혹한 한기를 버틸 수 없다는 것.
이게 미처 그가 끝맺지 못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