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6 - 356. 준비 (6)
"겨울이 오기 전까지 최소한의 인프라조차 복구하지 못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군요."
흑복을 입은 남자. 박종수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연대장실 내부는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상황의 심각성을 재차 인지한 각 사람들이 저마다 탄식을 내뱉거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연대장의 말이 맞았다. 현재 수정 발전기가 개량되어 성능이 한층 올라가긴 했지만, 그건 겨울을 버틸 정도가 아니었다.
난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하물며 이상 기후가 팽배해진 세상이다. 처음으로 인프라없이 맞이하는 겨울이 얼마나 혹독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가 되었든 간에 아마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으로 끔찍하겠지.
"단순히 겨울뿐만이 아닌 동해쪽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도 매우 큰 문제이긴 하지만 이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방도가 없군. 당장은 눈앞에 직면한 문제들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니까. 연락은 되지 않고 있으나,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어."
연대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 이것이 벙커 사람들이 작전 실행을 최대한 앞당기는 가장 큰 이유였다.
"···만약 제가 오지 않았더라면, 수정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안개가 그대로였다면. 어떻게 하셨을 겁니까?"
나는 안개의 선이 사라진 지도를 보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가 안개를 없앴기에 변종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맞다. 그래서 이렇게 위험이 찾아오게 된 것이고.
하지만 내가 가져온 위기는 힘을 합치면 이겨 낼 수 있는 위기였다. 항거할 수 없는 자연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내가 이곳 세마 벙커에 온 덕분에 겨울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안개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저번에 말했지 않나.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고. 겨울이 온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았어. 안개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지. 허나, 단순히 다가올 위기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네."
"······."
"방열제로 벙커를 뒤덮든가, 겨울이 지나가기 전까지 벙커에 틀어박혀 매일 기도하면서 살든가, 수정 발전기에 과부하가 온다고 해도 인위적으로 열을 만들어 내는 장비를 만들든가 해서 우리 나름대로 방비하려고는 했으나, 그뿐이었어. 아무리 희망적으로 계산해도 긴 겨울을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 말이야."
연대장은 피곤한 듯 눈가를 마사지하며 말했다. 언뜻언뜻 드러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테이블 위 서류 뭉치였다. 여러 작전안들과 섞이지 않게 분류된 서류에는 현재 물자 상황과 수정 발전기 상태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네 일행이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라네. 지금 벙커 상황은 자네가 오고 나서 확실하게 더 좋아졌으니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키도 생겼고. 여전히 전체적인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긴 해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지."
-그 빌어먹을 연구소 정문을 열어서 지금도 진행 중인 사태를 멈출 수만 있다면 겨울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그리 말한 연대장은 테이블 구석에 마련된 생수 한 병을 따서 벌컥 들이켰다. 타는 속을 진화하기 위한 목 넘김이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기까지가 아르마딜로 변종 유인 작전, 그 이면에 있는 우리의 사정이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 작전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나?"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 변종의 이동 경로가 이곳이라고 하니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나으니까요."
나는 곧장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르마딜로 변종과 벙커가 서로 부딪치는 건 필연.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고, 무엇보다 여기에서 주저앉기 위해서 계속 발버둥 쳤던 것이 아니다. 세계수의 코앞까지 온 이상 끝을 보아야만 했다.
"···그래. 어차피 가만히 있어 봐야 말라 죽을 뿐이라면, 역시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낫지. 우리는 마지막 기회조차 놓칠 정도로 바보가 아닐세. 두렵긴 해도 말이야."
"······."
"작전 성공을 위해서 이현우 자네와 자네 일행들은 힘을 계속 키워주기를 바라네. 지금도 훈련을 개인적으로 받고 있다지? 내가 따로 부탁 안 해도 움직여 주어서 정말 고맙구만."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 걸요. 저도 여기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살려고 여기까지 올라왔고, 연구소로 진입하기 위해서 걸어왔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을 구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더 이상 힘이 부족해서 가까운 누군가를 또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지수가, 한세아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손을 한 번이라도 더 뻗어서 멀어지는 사람을 붙잡아야 하니까.
발을 한 번이라도 더 내디뎌서 멀어지는 희망을 따라잡아야 하니까.
나와 연대장, 나와 연대장실 내부 사람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달 사항은 여기까지입니다. 제대로 된 작전 개요는 저희 쪽 정찰과 유인 장치 설치가 끝난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일만 잘 풀린다면요."
박종수의 말을 끝으로 난쟁이 탄이나 최명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방에서 하나둘씩 나가기 시작했다. 숨을 턱 막히게 했던 회의가 일단락된 순간이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편승하지 않고, 자리에 남았다. 연대장이 아직 내게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이 남아 있는 듯한 기색을 풍긴 까닭이었다. 실제로 내게 잠깐 남으라는 눈짓을 보내기도 했다.
이윽고.
"수정에 갇혀 있던 소녀가 무사히 나왔다는 보고는 받았네. 그래, 그 아이 상태는 어떻던가?"
나와 연대장. 그리고 언제나 구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민머리 사내만이 방에 남게 되자, 연대장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많이 혼란스러워 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심성도 착한 애라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크흠! 내가 무슨 걱정했다고 그러는가?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만."
"정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이렇게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긴 하지. 아무래도 어제 받은 보고가 그다지 좋진 않아서 말이야. 자네와 함께 다니는 여성. 이름이 엘프리데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 여성의 표정이 꼭 무언가를 저지르기 전 신병의 표정이었다고 하더군."
어제의 보고라면 내가 엘리를 데리고 지상을 보여주었을 때였다.
그때는 일부러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을 때였으니 많은 사람이 엘리의 표정을 본 것일 테지.
기대와 다른 현실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표정을 말이다.
"확실히 어제는 그랬었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부터는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엘리랑 대화를 나누고 왔었거든요. 그러니 이제 무슨 일을 저지르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더 묻지는 않겠네. 자네는 자기 사람들을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 주는 스타일인 것 같으니."
연대장은 그러면 되었다며 허허 웃었다. 그 뒤로, 그는 내게 엘리에 대한 것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한세아가 강화탄을 만들어 낸 순간의 이야기나 우리 일행에 관련된 이야기를 물었다.
그것도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것이 아닌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에 묻는 것 같았다.
여전히 마체테를 손질하는 민머리 사내도 알게 모르게 나와 연대장의 대화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
달칵-
이야기를 마친 나는 연대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손목 시계로 확인한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36분. 1시 조금 넘어서 연대장실에 왔다는 걸 감안 한다면 꽤 오랫동안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옆에서 자꾸 혼잣말로 가장한 물음을 툭툭 던지는 민머리 사내 탓에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후우···."
앉아서 이야기만 했더니 몸이 찌뿌둥한 느낌이었다. 굳은 어깨를 풀기 위해 괜스레 팔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어? 이현우씨. 이제 나오십니까?"
복도를 걷고 있던 최명철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복장은 연대장실에서 보았던 것과 달라진 상태였다. 근무 나가는 중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는데 마침 잘 만났다.
"네, 계속 잡혀 있다가 이제 나왔네요. 근무 나가세요?"
"맞습니다. 이제 근무 교대하러 갈 시간이거든요. 아무래도 빌딩 옥상까지 올라가야 해서 시간 넉넉하게 미리 출발하려고 나왔습니다."
"내일 아침에 바로 다른 임무 나가시는데, 그래도 근무는 서야 하나 보네요."
"쉬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냥 제가 나간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근무인 셈 치는 거죠. 갑자기 제가 근무를 쉬어 버리면 다른 애들이 근무를 두 번 서야 하는 것도 있고요."
"음···."
"왜 그러십니까?"
내가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의아해하는 최명철.
"혹시 거기에 저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예? 근무지를요?"
그는 갑작스러운 동행 요청에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눈짓으로 진심이냐고 물었다.
하긴, 누가 근무하러 나간다는데 따라오려고 하겠는가. 그가 당황할 만도 했다.
허나, 내가 최명철을 따라 가려는 건 이유가 있었다. 어째서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는지. 그에 대한 답을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계속 물어볼 이야기는 아니었고,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것도 좀 아니었기에 연대장실에서는 대충 넘어갔지만. 이렇게 따로 자리가 마련되는 것과 다름없는 근무지를 따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겠나.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겠지.
"네.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서요. 안 되면 괜찮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최명철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안 될 건 없긴 합니다만···. 뭐, 일단 알겠습니다. 안 될 것도 없고요."
"사람이 한 명 더 따라올 수도 있는데 그것도 괜찮습니까?"
"한 명 더요? 으음···.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근무만 제대로 선다면야 너무 빡빡하게 잡지는 않으니까요. 행정실에는 제가 말해 둘 테니 현우씨는 준비해서 나오십쇼. 계단 앞에서 봅시다."
다행히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는지 내 부탁을 들어 주는 최명철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행정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나는 일단 그의 말대로 간단하게 준비할 것을 챙기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군화 소리와 함께 복도를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