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9 - 359. 준비 (9)
"이 자식들이? 선임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최명철은 군 기강이 이리 해이해져서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라고 투덜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하늘과 같은 선임이 무슨 말을 하든 받아주기는 해야 했다는 말과 함께.
"···밑에서 자꾸 뭐가 반짝이길래 뭔가 싶었는데, 그게 최명철 상병님일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다음 근무자가 최명철 상병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군복 상의에 김명진과 반효석이라는 이름이 오버로크된 일병 둘은 선임의 말에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돌렸다.
"와, 이젠 대답도 안 해주네. 에휴. 그래, 원래 내 근무 시간은 후반야가 맞긴 하지. 근데 내일 아침 일찍 외부로 나갈 일이 생겨서 시간대 좀 바꿨다. 자세한 내용은 내려가서 듣는 게 나을 거야."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근데 옆의 두 분은···?"
"오늘 동반 근무 서실 분들. 그렇게만 알아 둬. 행정실에는 보고하고 왔으니까 너희들이 따로 더 신경 쓸 건 없고. 아, 그리고 이것도 어차피 내려가면 알게 될 텐데 이제부터 무전기 사용 가능하다."
최명철은 허리춤에 메고 있던 작은 케이스에서 무전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무전기 하단부에는 좁쌀만 한 수정이 하나 박혀 있었다.
우주를 떠다니는 통신 인공 위성들 대부분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지만, 지상의 설비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망가졌기 때문에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통신 장비.
그런 상태에서 수정은 각 장비들끼리 통신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날수록 중계기가 따로 필요 없는 무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 다른 통신 장비들도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하겠지.
세계수가 불타고, 전후 복구가 끝난다면 말이다.
"수정 여유분이 늘어나서 우리가 쓰는 장비들 정상화에 힘쓰고 있다더라. 이건 그 일환이야. 그러니까 아직 무전기 사용법 숙지 못한 애들한테는 너희들이 알려 줘. 방금 내가 처음으로 받고 올라온 참이라 이 소식 모르는 애들 많을 거거든. 너희들은 그나마 어떻게 쓰는지는 알잖아."
"알겠습니다!"
"그래. 근무 수고했고, 어서 내려가서 쉬어라. 조금 빨리 온 거 고맙지?"
마찬가지로 작은 수정 조각이 박힌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씨익 웃는 최명철.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15분. 교대 시간이 4시 30분 전후라고 했으니 충분히 빨리 온 것은 맞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겨우 15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무 교대하기 전의 15분은 그 무엇과 비교하기 어려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 최명철, 초병들은 알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외부를 경계하는 일은 주변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니 말이다.
"예, 오늘 저녁은 최명철 상병님- 아니, 저분들 덕분에 빨리 먹을 수 있겠습니다. 서둘러 내려가면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 마감 시간이 살짝 애매했는데···. 감사합니다, 두 분!"
화색을 띤 초병들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최명철이 아닌 나와 한세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 이 자식들이 또 선임을 놀려?"
"하지만 이게 맞지 않습니까. 저 여성분 아니었으면 최명철 상병님도 계단 올라오느라 죽어 가는 표정을 지으셨을 것이고, 교대 근무 시간도 조금 늦었을 겁니다. 아까 밑에서 저희 예상보다 늦게 나오신 것 다 봤다 이 말입니다."
"하여튼 한마디를 안 져요. 알았으니까 얼른 내려가기나 해라. 근무 중 특이 사항은 없었지?"
최명철은 그런 그들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냐.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꼭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어서 내려가서 쉬라는 손짓을 받은 김명진과 반효석은 곧장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인수인계를 끝마친 초병들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날아서 왔는지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들은 결국, 나중에 묻기로 한 듯 어깨에 멘 총끈을 고쳐 메며 발길을 완전히 돌렸다.
"···후임들이랑 많이 친하게 지내시네요."
나는 시야에서 사라진 초병들이 있던 자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불쌍한 애들이거든요."
"불쌍하다고요?"
"세상이 이런데 입대를 한 애들이 불쌍하지 않으면 누가 불쌍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뭐라도 돕고 싶다며 자원 입대한 애들이라면 더욱 그렇죠."
벙커가 만들어진 초기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 현재 일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최명철.
"······."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불쌍보다는 대견이 맞는 말이지만, 안타까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군기가 빡세서 뭐 하겠습니까. 괜히 애들만 잡는 꼴이지. 다른 나머지 후임들도 다들 잘하고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그는 후임들을 편하게 대하는 것이라 했다. 선임과 후임의 관계가 아닌 그저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최명철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하는, 할 수 있는 일은 후임들이 상황 대처를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어쩐지 어려 보이는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있더라니.'
갓 성년이 된 사람들이 군에 자원 입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본래는 이런 상황이 오면 군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차출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 허나, 이곳 세마 벙커 책임자인 연대장은 그리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선을 넘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벙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금처럼 조성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컸다. 군이 다른 시민들을 억압하면서 위에 서게 되었다면 벙커는 가라앉은 분위기만 맴돌았을 테니까.
나는 최명철에게 대강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세아는 아까부터 옥상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고층 빌딩 옥상에 설치된 간이 초소, 비를 막아주는 지붕, 구석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 추락 방지용 난간, 무언가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 총기 거치대, 최명철이 가져온 검은 케이스, 건물 외벽을 뚫고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넝쿨.
그리고 가리는 것이 없어 뻥 뚫린 풍경.
나와 한세아는 세계수가 있는 일대까지 전부 훤히 보이는 경치에 무심코 감탄사를 내뱉었다. 워낙 고층이라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태 발생 진원지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세계수의 모습 또한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있는 높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185m 건물보다 더 높은 높이에서 나뭇가지로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세계수의 밑기둥 둘레는 어림잡아 300m는 되어 보였다. 위로 점점 올라갈수록 기둥은 얇아지지만, 이내 중반을 넘어서 상단부에 다다르면 그것의 전체적인 둘레는 확 커졌다. 사방으로 뻗어진 나뭇가지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늘을 지탱하는 모양새인 나뭇가지는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휘이이이-
한껏 쌀쌀해진 바람이 우리의 몸을 스쳐 지나간다. 닭살이 오소소 돋게 하는바람에 우리는 무심코 팔을 쓸어내렸다.
"명철씨, 이 케이스에는 뭐가 들어 있어요? 총을 따로 하나 들고 오셔서 총은 아닌 것 같은데."
옥상을 잠식한 한기를 느낀 한세아는 내게 바싹 붙으며 검은 케이스를 가리켰다.
"아, 그것도 총입니다."
"여기 안에도 총이 들어 있다구요?"
"네, 한번 보여드릴까요?"
"그럼 저야 구경도 하고 좋죠."
새로운 구경 거리가 늘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환해진 한세아. 그녀는 빨리 보여달라고 최명철을 시선으로 재촉했다.
지이익-
"보고 놀라지 마십쇼. 이건 저라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총이니까요."
최명철은 천천히 케이스의 지퍼를 열기 시작했고, 이내 지퍼를 완전히 열었다. 개봉 전 뜸을 한번 들이려던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움찔 떨더니 곧장 케이스를 개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오! 저격총이네요?"
나는 케이스의 내용물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군인이었을 적, 상황이 터졌을 때나 가끔 보던 총기가 들어 있었다. 다양한 부가 장비와 함께 말이다.
"K14 저격 소총입니다. 저격수 부사수 아니, 이제는 제가 사수라서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멋지지 않습니까?"
"아, 저격총이었구나. 어제 조이가 강화탄으로 만들어 보라는 탄이 여기에 맞는 탄이었나 보네요. 크기랑 구경이 똑같아요. 총기는 처음 보지만요. 이거 한번 들어봐도 돼요?"
한세아가 탄창과 안에 장전된 총알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저번에 강탈하셨던 저희 총처럼 마구잡이로 분해만 하지 마십쇼. 고장 나면 진짜 골치 아파져서요. 분해 금지와 바닥에 떨어트리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만지시거나 들어 보셔도 좋습니다."
"에이, 그거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요? 알았어요. 그냥 보기만 할게요."
"······."
순간 말문이 막힌 최명철을 뒤로 한 한세아는 묵직해 보이는 저격총을 들어 보더니 곧장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의문이 담긴 소리를 내뱉었다.
"응? 왜 안 보이지?"
"세아씨, 이걸 열어야 보일 겁니다."
나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갸웃한 한세아를 보며 킥킥 웃었고, 스코프 전면부 렌즈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가림마개를 열어 주었다.
"아, 이제 보여요. 어떻게 알았어요, 현우씨?"
"이렇게 만져 본 적은 처음이지만, 예전에 몇 번 구경해 본 적은 있거든요."
"그렇구나···. 현우씨! 이거 봐봐요! 이렇게 스코프를 보면 뭔가 벌집 모양 같은 게 보이는데 초점을 잘 맞추면 엄청 멀리까지 잘 보여요! 저기 지수도 있어요!"
엘리가 호칭을 정리한 것처럼 자신도 지수를 편하게 부르기 시작한 한세아였다. 비록 아직까지는 가끔 존댓말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잔뜩 신난 기색인 그녀는 스코프로 이곳저곳을 보더니, 내게 총을 넘겨 주었다. 자신이 본 것을 나도 보라는 뜻인 모양이다.
"지수는 저기 공원 쪽에 있어요. 찾았어요?"
"잠시만요. 찾고 있습니다."
"아이 참! 저기 바로 있잖아요! 저기요!"
"아, 찾았어요. 찾았으니까 너무 밀지는 마세요. 이러다가 넘어지겠습니다."
나는 한세아의 인도에 따라 간이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여의도 공원 일대를 둘러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수는 주변이 뚫린 공터에서 난쟁이 탄에게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푸른 스파크 사이 가끔 번뜩이는 적색 스파크가 훈련용 도끼에서 튈 때마다 그녀는 우당탕거리며 빠르게 움직이다가 급정거하거나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속도 조절에 실패한 그녀는 넘어질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으나, 다행히 어찌어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뭇내 자랑스러운지 두 팔을 허리춤에 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난쟁이 탄은 처음에 박수를 몇 번 치다가 피드백을 하는 듯 공터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손짓을 했다.
탄의 손짓이 이어질 때마다 짐짓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지수가 몸을 점점 축 늘어트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의 꼬리가 기가 죽어 아래로 늘어진 것도 잘 보였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피드백이 호되나 보다.
지수와 난쟁이 탄이 하는 행동들을 본 나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한세아도 그 모습을 본 것인 지 킥킥 웃었다.
우리는 한동안 지수를 관찰하면서 사이좋게 붙어 있었다.
바로 그때.
"······조건 하나 더 추가하겠습니다. 두 분이 스코프로 여기저기 보는 건 좋지만 제 앞에서 너무 붙어있지는 마십쇼. 안 그래도 옆구리가 시려운데 혼자 서럽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우리를 울적한 얼굴로 보던 최명철이 말을 툭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