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0 - 360. 준비 (10)
뒤에서 들려온 최명철의 말에 그를 혼자 두고 나와 한세아 둘이 주변 경치에 너무 눈이 팔렸었다는 걸 그제야 자각할 수 있었다.
"크흠!"
나는 멋쩍게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거리를 살짝 벌렸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 3명뿐인데, 여기서 2명이서만 딱 붙어 있는 건 겉으로 보기에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지 않은가.
"왜 떨어져요. 체온 잘 나누고 있었는데."
한세아는 내가 멀어진 만큼 거리를 좁혔다. 떨어지지 않겠다는 몸짓에 나는 다시 몸을 맞대는 수밖에 없었다. 춥다고 하지 않나. 그럼 어쩔 수 없지.
"······혼자는 서러워서 이거 살겠습니까."
재차 딱 붙어 있게 된 우리의 모습을 본 최명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이현우씨,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뭡니까? 아니 뭐, 이현우씨가 절 따라서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는 얼추 짐작하고 있긴 합니다. 왜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냐 그거겠죠."
그는 이내 이곳에 올라온 이유를 상기시키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궁금해한 것이 주변 풍경이 아니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맞습니다."
나는 색다른 경치를 보면서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여기 올라온 건 높은 곳에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대체 왜요? 연대장실에서 말했듯이 처음 그 작전을 들었을 때, 저는 제가 갈 줄 알았습니다. 그게 맞다고도 생각하고 있었고요. 위험하잖습니까."
"잠깐만요, 현우씨. 그게 무슨 말이예요? 무슨 작전이요? 뭐가 위험한데요?"
한세아가 황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내가 연대장실에서 대략적인 활동 방향만 듣고 왔다는 걸 알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 끼어들었던 것이다.
"아···. 제가 자세한 이야기해준다고 해 놓고 아직 알려주지 않았었네요."
나는 연대장실에서 진행되었던 대화를 한세아에게 차근차근히 전달해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알려 준 것처럼 나중에 그녀가 다른 일행들에게 정보를 오해없이 전해 주어야 하니 말이다.
아르마딜로 변종이 동면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 본래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지금은 난폭하게 변했다는 것, 그 변종의 이동 경로 끝에 있는 게 이곳 세마 벙커라는 것, 그것의 이동 경로를 여의도가 아닌 한강 너머에 있는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바꾸기 위해 유인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작전에는 눈앞의 최명철이 자원했다는 것까지.
"말만 들어도 엄청 위험해 보이는데 그걸 현우씨 혼자서 결정하려고 했어요?!"
"아니, 저 혼자 결정하려던 게 아니고···. 만약에 누군가가 가야만 한다면 제가 가는 것이 맞지 않냐 이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는 건 제가 아니고 여기 최명철씨인 걸요."
"······."
열을 내려던 한세아는 내 말에 겨우 진정하는 기색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이내 최명철을 바라보았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쇼. 희생양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롯이 제 의지로 자원한 거니까요."
우리의 시선에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걸 직감한 최명철. 그가 말을 이었다.
"유인 장치 설치 작전에 어째서 자원했느냐, 라···. 우선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이 말부터 해야겠네요. 저는 1차 작전에서 살아남은 7명 중 1명입니다. 장 하사님이 살려주신 목숨이죠. 제가 이번 임무에 자원한 건 그 때문입니다. 저보다 저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없으니까. 아니, 거의 유일하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최명철씨가 그 생존자였다고요?"
갑작스레 나온 사실. 그것은 1자 작전의 생존자 중 하나가 최명철이었다는 것이다.
예전에 연대장이 지나가는 이야기로 해당 작전의 생존자들은 강한 트라우마로 인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었건만.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최명철이 생존자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이해가 더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아픈 곳 없어 보이는 사람이 뜬금없이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고 하는 게 말이다.
내가 계속해서 의문을 표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다. 분명 그런 연유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듣고 말았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장난기 가득하고, 약간 뺀질거리기도 하며, 여러 사람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는 최명철이 1차 작전의 생존자였다는 것을.
복잡한 생각에 내가 잠시 입이 다물린 사이, 최명철은 한세아에게서 저격총을 넘겨 받았다. 그는 간이 초소 한 켠에 마련된 넓적한 판에 총기를 올려놓고 스코프의 초점을 맞췄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일단 이 상태에서 스코프에 눈만 대서 보십쇼. 그럼 세계수 근처 상황이 잘 보일 겁니다. 연구소 정문이랑 같이요. 아, 여기에 비치된 쌍안경으로는 멀리까지 못 봅니다. 차례대로 와서 이걸로 보세요."
최명철은 내게 손짓하며 고정된 저격총을 가리키는 한편, 쌍안경으로 세계수가 있는 곳을 보려던 한세아를 말렸다.
"현우씨 보는 동안만 볼게요."
그의 말에 한세아는 얌전히 쌍안경을 내려 놓으려다가 쌍안경으로 세계수가 보이는 일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
나는 최명철이 시키는 대로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보았다.
"···이런 씹."
세계수 근처의 건물이 모조리 붕괴된 모습과 잔해물 사이사이를 전부 채우고 있는 엄청난 수의 괴물들을.
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 인간들과 그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 거미 변종, 나무의 형상을 한 거인, 이상하리만치 가느다란 체구를 가진 정체 모를 변종 같은,
각종 괴물들을 말이다.
***
상상 이상으로 몰려 있는 괴물들. 그것들은 마치 둥지를 지키고 있는 모양새였다.
영역이 겹치면 같은 동족이 아닌 이상 배척하는 습성들을 가진 주제에 세계수 근방에 자리 잡은 괴물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있었으니까.
'···저기가 연구소.'
나는 괴물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두터운 철문을 보았다. 묵빛의 철문에는 어떤 문구가 쓰여 있었다.
비록 거리가 거리인지라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내 그 문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낯이 익은 문구였던 덕분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컨테이터 장벽에 쓰여져 있는 문구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하얀색 페인트가 아닌 연구소 정문에 쓰인 것은 붉은 글씨였다는 것일까.
연구소 정문에 짓이기듯 새겨진 문구에 나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문장에 불과한 말이었으나, 정문 앞에 도착한 군인들이 저 문구를 쓸 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아서.
군대는 처절하게 싸웠을 것이다. 아니, 처절하게 싸웠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군인들이, 시민들이, 사람들이 죽고 말았지만 그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주 명백한 사실이었다.
주변 건물들이 모조리 붕괴된 모습과 전차와 장갑차들이 검게 녹 쓸어 있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예전 전차들의 무덤이라고 칭했던 석수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눈으로 세기 힘든 수가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며 배회하는 나무 인간들과 함께 말이다.
"···세아씨도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한세아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스코프를 통해 세계수 일대의 상황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문은 해결되지 않고 더 커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게, 저런 지옥은 단순히 지리를 잘 안다고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이, 이게 뭐예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죠···?"
한세아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이내 스코프에서 눈을 떼더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와 최명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최명철씨, 미쳤습니까? 저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가 가겠다고 말한 거지만, 당신은 저런 상황을 다 알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기를 들어가겠다고요?"
세계수 밑기둥 근처에 자리 잡은 나무 형상의 거인을 보고 내 의문은 더욱더 커졌다. 아마 내가 본 그 거인이 저번에 최명철이 말했던 세계수를 지키는 수호목인 나무 거인이겠지.
각종 합금으로 이루어진 전차들을 엉망으로 찌그러트린 것이 바로 저것이리라.
저런 것들이 즐비한 곳을 단신으로 들어가서 유인 장치를 설치한다는 건 그저 죽으러 간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하물며 특별한 이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평범한 사람일뿐이지 않은가.
"그거 아십니까? 전우라는 명칭은 사실 처음에는 맨정신으로 내뱉기에는 부끄러운 단어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다른 소속 군인들을 전우라고 부릅니까? 영화도 아니고 낯간지럽게···.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지."
좀 더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본 최명철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초소 구석에 마련된 보관함을 들어 넓적한 판 위에 올려 두었다.
절그럭-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목에 걸린 인식표가 늘어갈 때마다, 너무 많아져서 보관함을 따로 만들고 그 안에 넣어진 인식표가 또다시 가득 찰 때마다, 전우라는 단어가 점점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보관함 내부에서 들리는 묵직한 철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안에는 인식표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미처 살아남지 못한 전우의 남은 생이 인식표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몇 개나 쌓였는지···."
전부 주인을 잃은 인식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