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62화 (363/497)

Chapter 362 - 362. 준비 (12)

그그그극-

나무 거인이 움직이는 소리와 그것의 짙은 그림자가 군인들을 위를 덮쳤다.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의 체구를 가진 나무 거인은 천천히 두 팔을 들었고, 그대로 내려쳐서 지상을 한순간에 휩쓸었다.

콰-아아앙!

포탄이 떨어진 것이 아닌 단순히 무거운 질량이 대지에 내리꽂히기만 했건만,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부활 전보다 더 강해진 듯해 보였다.

쿠르르릉- 끼리리리리-

투쾅!

그나마 지근거리에서 유효 타격을 줄 수 있는 전차들은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를 뚫고 거인의 손아귀를 피하며 포를 연달아 쏘았으나,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콰아아앙!

꽈긱!

전차 포신에서 쏘아지는 철갑탄과 고폭탄은 나무 거인의 두꺼운 껍질을 뚫지 못했고, 오랜 시간 가혹한 기동으로 혹사를 당한 전차는 하나둘씩 납작하게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흡사 파리를 내려치는 모양새인 공격을 당한 전차는 파리가 터져 죽은 것처럼 짓눌려 본래의 외형을 잃어버렸다.

푸화아아악-

그렇게 납작하게 변한 전차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 피처럼 붉은 불길이었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

그리고 그런 불 위를 덮치는 것은 '피처럼'이 아닌 정말로 검붉은 피였다.

콰아앙!

거인의 손에 조금이라도 맞은 군인들은 제 몸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터져 죽었으니 말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풍압을 맞아도 죽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건 그나마 몸의 형태는 유지하고 죽을 수 있었다.

[구어어어어억!]

자기 부활을 재차 알리며 포효를 내지르는 나무 거인. 놈의 몸체 곳곳에 고폭탄이 만든 화염의 꽃이 만들어진다. 허나, 붉은 화염은 피해를 거의 주지 못하고 있었다.

"···개 씨발, 저게 왜 다시 살아나."

장 하사는 그런 거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었다가 다시 대었다. 혹시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보고 있는 현실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눈에 담고 있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투입된 전력을 알고 있는 그의 머리는 지금의 현실을 부정했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현재 세계수가 있는 곳을 기점으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총 5곳.

숭례문이 있는 소공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전장,

동대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전장,

금호역과 옥수역 사이의 선로를 선으로 삼아 형성된 전장, 이태원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장.

마지막으로 삼광 초등학교와 후암초등학교 사이에서 격전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이곳, 후암동이었다.

이렇게 총 5군데의 전장에서 국군이 가진 전력을 대부분 쏟아붓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심지어 작전 실행 전에 폭격을 수도 없이 가해서 괴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시작하지 않았던가.

특히 전면전이 벌어지는 후암동 일대는 지상의 힘 싸움이 중요했기에 대부분의 기갑 부대가 투입된 곳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지상 병력의 여유가 없어진 다른 전장들은 이제 몇 대 남지 않은 공격 헬기로 지원을 하기로 했고.

헌데 지금 상황이 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오염된 세계수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형성된 다른 4곳의 전장이 아닌 제일 중요한 힘 싸움이 벌어지는 후암동 전장은 절대로 밀려서는 안 되었다. 여기가 밀리면 주변 일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유인 작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작전이 되고 마니까.

하다못해 난동을 부리고 있는 나무 거인을 재차 무력화시키기 위해 조준했으나, 현재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는 각도가 나오질 않아서 시도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씨발! 씨발!!'

전장에서 오래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느껴지는 것이 있다. 앞으로 전황이 어떤 방면으로 흘러가게 되는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전멸.'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후방에서 최전방을 지켜보고 있는 장 하사는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그 끝에는 부대의 전멸이라는 결과가 올 뿐이라는 걸 직감하고 말았다.

'···후퇴 명령은.'

그는 무의식적으로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다급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토해졌던 무전기에서는 그저 치지직거리는 잡음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런 무전기를 보자 그는 무언가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뼈 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을 상부에서도 보고 있을 터다. 그러나 후퇴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쪽에서 명령을 하달할 시간이 없다거나 무전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겠지.

무전기의 상태는 아직 멀쩡했으니 잘못된 쪽은 상부일 가능성이 크다. 예상치 못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명철아, 장비 챙기고 내려가자. 이대로 있으면 다 죽어."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장 하사는 급한 대로 저격총을 케이스에 집어넣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2분대, 3분대! 이 무전 들리는 즉시 현 상태 보고하고 바로 퇴각해! 수신했으면 바로 응답해라!"

그는 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최명철을 챙기는 한편, 허리춤의 무전기로 다른 장소에 있는 저격조들에게 무전을 날렸다.

- 치지직··· 치직···

그러나 돌아오는 응답이 없었다. 가끔 잡음을 뚫고 파열음이 간혹 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까득!

이를 악문 장 하사는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미 한차례 망설였으니, 여기서 더 망설인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최전방에서 싸우는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반드시 살려주겠다고.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치이이익-

장 하사와 최명철은 옥상 난간에 설치된 로프를 타고 곧장 지상으로 내려갔다. 원래라면 속도를 적당히 조절해서 내려 갔어야 하지만 한시가 급한 그들은 다리의 뼈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해서 최대한 빨리 하강했다.

이윽고.

쿵!

지상을 내딛는 군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장 하사는 자신이 메고 있는 케이스를 최명철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는 이대로 본부가 있는 곳으로 퇴각해! 나는 저기 쟤들 좀 구해서 데려갈 테니까!"

"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 동기들이란 말입니다!"

"···에이 씨! 나는 말렸다! 그럼 빨리 따라와!"

실랑이할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그들은 죽음이 가득해진 전방을 향해 죽어라고 내달렸다. 전방의 군인들은 여전히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괴물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그들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건 아주 자명한 사실이었다.

장 하사와 최명철이 앞으로 달릴수록,

기동을 멈추는 전차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전장을 이탈하려던 병사가 뒤에서 급습한 괴물에게 물어뜯길수록, 검은 연기가 푸른 하늘을 점점 더 많이 물들일수록, 나무 거인의 공격을 받은 건물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수록, 지상을 뒤덮는 붉은 화마가 멀리 퍼지면 퍼질수록,

패색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으니까.

뒤늦게 상황 정리 혹은 판단이 된 것인지 숭례문 쪽 전장에 있던 공격 헬기가 급하게 지원을 왔으나, 이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듯했다.

어디서 공격을 받고 온 건지 헬기의 상태가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두두두두-

푸화악!

공격 헬기는 날개에 달린 소형 미사일과 캐노피 하단에 있는 기관포를 발사해 나무 거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기관포 사격은 악성 변이자들 무리를 갈아버렸고, 잠시나마 전장에 숨통을 불어넣어 주는 결과를 낳았다.

퍼퍼퍼펑!

사격과 함께 거인의 몸체에 제대로 적중한 미사일은 크고 작은 폭발을 만들어내었다. 적중만 했을 뿐, 유효타는 아니었기에 큰 피해를 주진 못했다. 그래도 나무 거인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구어어어어억!]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기 손을 이리저리 피하는 공격 헬기가 짜증이 났는지 놈은 거센 포효를 내질렀다. 허공을 웅웅 울리는 포효에 한순간 헬기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다.

전차와 군인들은 헬기가 이목을 끌고 있는 사이에 정비를 마치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전력을 모아 재집결했다. 다시 한번 연구소 정문을 뚫을 속셈인 모양이다.

그와 동시에.

타아앙!

후방에서 날아온 저격 탄환이 거인의 눈을 노리고 날아갔으나 거인은 손을 들어 간단하게 막았다.

까드드득!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는 듯 나무 거인은 바닥에 널린 건물 잔해물을 크게 집어 포환처럼 날렸다.

콰콰콰콰콰쾅!

크고 작은 파편들이 거인이 목표했던 일대를 휩쓸었다.

이번만큼은 공격 헬기도 피하기 어려웠고, 결국 꼬리 모터 부분을 맞은 헬기는 원을 그리며 지상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빌딩 사이로 사라진 헬기가 추락한 곳에서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엔진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동하는 전차가 나무 거인의 시선을 교란시키고, 그 틈에 연구소 정문에 모인 군인들은 설치한 폭약을 터트렸다.

퍼어엉!

고막을 찢는 소리와 함께 정문에서 거대한 화염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문은 여전히 굳건했다. 남은 폭약을 모조리 쏟아 부었어도 열리지 않는 문을 본 군인들은 개인 화기로 문을 두들겼다.

캉! 캉! 캉!

"왜!! 안 열려!!!! 왜!!!! 이 개새끼들아!! 제발!!!"

흠집도 나지 않은 두터운 철문을 보고 울부짖으면서.

광기와 혼란이 가라앉지 않는 전장 속에서.

"형택아! 숨 쉬어! 정신 차려라! 빠져나가야지! 내가 살려줄 테니까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장 하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잔해물에 등을 기댄 어느 병사 앞이었다. 그 병사는 가슴이 철골에 관통당해 있었다. 찢기듯 뚫린 가슴팍에서 피가 울컥 솟고 있는 중이었다.

"쿨럭! 자, 장 하사님···? 왜 여기에···."

후방에서 지원 사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냐는 병사의 물음.

"그래, 나다! 너희들하고 약속했잖아! 살려주기로! 다행이다. 눈을 떠서. 이제 일으킬 테니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여기서 당장 빠져나가야 해!"

"저···."

"말은 나중에! 살게 되면 뭐든 들어 줄 테니까!!"

"집에 가고 싶어요······. 엄마···."

점점 숨을 흐릿하게 쉬고 있던 병사는 결국 장 하사가 뻗은 손을 잡지 못하고, 고개를 툭 수그렸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부상이 워낙 심했기에 살 가망이 없었으니까.

"······아."

한순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장 하사는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내민 손에는 어느새 피에 젖은 인식표가 올려져 있었다.

"···전사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최명철이 인식표를 회수했고, 장 하사의 손에 올려 준 것이었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핏물이 손등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장 하사는 손에 올려진 인식표를 부들부들 떨 정도로 꽉 쥐었다. 그의 눈에는 길거리의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가 가득 담겼다.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단순히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총을 쥐고, 이런 위험한 곳에서 싸워야 하는가.

군인이 하는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불순하지만 대체 자신보고 어떡하라는 말인가.

본래라면 힘들더라도 안전한 부대에서 2년 동안 시간을 보내고, 무사히 집에 돌아갔을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책임지고 이뤄내는 것이 본래의 내 임무이고, 그렇게 해주기로 약속했단 말이다.

그런데.

뭐? 나만 믿으면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줘?

이 어찌나 오만한 소리인가.

사방에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괴물들의 눈은 장식품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의를 품은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이 죽어 간다.

내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도착하는 건 언제나 항상 한 발 늦고 말았다.

언제나 보이는 건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과 이어서 되살아나는 괴물.

그들을 죽이는 건, 쉬게 만들어 줘야 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럴 때마다 손이 떨렸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아직 살아 있는 애들이 있을 거야. 걔들부터 빼낸다."

"···알겠습니다."

장 하사와 최명철은 전사한 병사의 눈을 감겨 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부상이 심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다른 병사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모조리, 전부 다 죽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지옥에서 꺼내야만 했다.

그 뒤로, 그들은 잔해에 깔리거나 다리에 부상을 입어 거동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을 들쳐 메고 격전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후방으로 이송했다.

목에서는 쇠맛이 느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들은 절대로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멈춘다면 한 사람이 더 죽고 말 테니 멈춘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살고 싶다."

과다출혈로 인해 정신이 흐려진 병사가 멍하니 흐린 하늘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 병사의 한쪽 팔은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강한 힘으로 뜯겨나간 듯 드러난 단면은 매우 거칠었다.

"싶다는 반말이고, 이 새끼야! 시발, 네가 원하는 대로 살려줄 테니까 절대로 정신 놓지 마라! 명철아! 얘 데리고 후방으로 빠져! 응급처치가 급하다!"

장 하사는 병사의 상태를 급히 확인하면서 최명철에게 지시를 내렸다.

"예!"

최명철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부상자를 데리고 나무 거인의 시야가 닿지 않는 후방으로 빠졌다. 그가 향한 후방에는 어림잡아 스물에 달하는 병사들이 누워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이미 숨을 멈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꺼낼 수 있으면 꺼냈고,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왔다. 그렇게 장 하사는 불타고 있는 전차 해치를 열고 들어가 연기에 질식 직전이던 조종수를 꺼냈다.

가슴팍이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다행히 아직 살아 있는 병사였다. 비록 피부가 짓무를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퍼-엉!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전차가 기동을 멈췄다. 내부와 전차 후미에서 뿌연 연기가 뿜어지는 걸 보니 내부 부품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기동을 잃은 전차가 당할 꼴은 하나밖에 없었다.

콰아앙!

까긱!

바로 거인의 손에 맞아 납작해지는 것. 포탑과 차체가 엉망으로 찌그러진 것과 동시에 비틀린 장갑 사이로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르륵!

퍼-어엉!

이내 연료 탱크에서 새어 나오는 연료와 만난 불길은 순식간에 옮겨 붙어 더 큰 불로 이어졌고, 내부에 장전되어 있던 포탄과 만나 끝내 큰 폭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구어어어어억!]

전차의 폭발을 손으로 밀어낸 나무 거인은 이제 몇 남지 않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방에서 지속해서 움직인 장 하사와 최명철 일병을 직시했다.

"······."

"······."

거인의 시선에 몸이 바싹 얼어붙은 장 하사는 직감했다. 마지막 전차가 파괴된 순간부터 이 전장에서 순순히 빠져나가기에는 틀렸고, 한 명이라도 살려면 누군가가 남아 저 괴물의 시선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 전차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기 전에 전장에서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한 사람만 더, 한 사람만 더 라고 되뇌며 버티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말았다.

대한민국 육군, 17사단 저격수 하사 장지석.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지석 하사는 사태 발발 이후에 만난 병사들과 한 약속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약속의 대부분은 자신보다 먼저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약속의 전부는 반드시 집으로 되돌려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체력단련 시간만 되면 온갖 핑계를 대며 빠졌던 박준석 병장은 세상이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 민간인 대피 임무를 맡았던 그는 후방에서 기습한 악성 변이자 무리에게 무참히 뜯겨 전사했다. 인식표에는 괴물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자칭 분대 분위기 메이커라던 김찬수 상병은 화성시 캠프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왔으며 얼마 전부터 그들의 안부 연락이 끊겼다. 그는 지진으로 인해 갈라진 땅의 틈새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식표조차 가져올 수 없는 깊고 깊은 저 아래로 말이다.

남들을 챙기는 것을 좋아하던 이재석 일병은 동반 입대한 동기를 잃어 트라우마가 강하게 새겨진 상태였다. 그는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물로부터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 밀쳤고, 대신 잔해물에 깔렸다. 잔해를 부수고 힘겹게 꺼낸 인식표는 반으로 꺾여 있었다.

남은 가족을 악성 변이자들에게 모두 잃어 자원 입대한 신병인 김명수는 시력이 좋아 저격수 부사수로 뽑혔었다. 그 덕분에 그는 그나마 최전방보다 안전한 후방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었으나, 경계 작전 수행 중 갑작스레 땅을 뚫고 휘둘러지는 나무뿌리를 피하지 못해 전사했다. 인식표는 멀리 날아간 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장 하사는 그들이 당한 죽음을, 미처 감지 못한 눈이 발하는 감정을, 제대로 치러주지도 못한 장례식을, 죽기 전에 그들과 나눈 약속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땅에 묻었다.

지하에 묻었다.

어둠에 묻었다.

기억에 묻었다.

가슴에 묻었다.

그들과 한 약속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묻을 자리가 없었다.

그는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자기 아내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지금은 제주도에 있는 그의 아내는 살아서 여기까지 와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연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진원지인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 있어서 여기보다 더 위험하진 않을 것이라는 게 다행일까.

'······아니.'

그는 제주도에서 비정상적인 검회색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겼을 거라는 생각에 몇 날 며칠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 보고 이후 제주도와 통신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다른 애들은 모르는 정보였다.

망가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상은 그에게 슬픔을 삭힐 시간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낭떠러지로 밀었다.

제주도에 비정상적인 연기가 치솟는 걸 확인했다는 전보가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들은 아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와 고통 어린 신음 소리에 그는 결국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위험에 처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준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알겠나?'

'···넵!'

'목소리 봐라, 더 크게! 알겠나!'

'네!!'

그래, 수원역에서 병사들과 한 약속을 떠올린 장 하사는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으니까.

뿌득!

이 악물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무 거인을 마주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사한 전우의 인식표가 쥐어져 있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군번줄은 하나의 생명이 또 명을 달리 했다는 걸 알려주었다.

"···명철아. 조금 전차에서 꺼낸 애 데리고 여기서 나가라."

그는 지금이 아니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없다는 걸 직감했다.

"예? 그러면 장 하사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후퇴를 안 하면 여기서 죽겠다는 거냐? 걱정 말고 나가. 나는 너랑 반대쪽으로 움직여서 저 괴물 새끼 시선을 분산시킬 테니까."

"하지만 장 하사님! 하사님 형수님은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최명철 일병 또한 직감했다. 지금 이대로 장 하사를 보내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도 그럴게, 그가 보고 있는 장 하사의 눈은 그동안 숱하게 보았던 눈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눈이었으며, 마지막 결심을 마친 눈이었다.

"······내 와이프는 제주도 여행 갔어, 임마. 거긴 안전할 거야."

장 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웃었다. 그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탄창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후에 앞으로 내달렸다.

"그게 무슨! 하사님!!"

뒤에서 자신을 부르짖는 최명철 일병의 외침을 뒤로한 채.

탕! 탕!

"날 봐라!"

그는 앞으로 달리면서 나무 거인에게 총을 쏘았다. 미약한 공격이었지만, 장 하사를 보고 있던 나무 거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공격은 놈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픽 ···픽

소총탄도, 저격탄도, 전차 포탄도, 미사일의 공격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데, 그가 쏜 권총탄이라고 통할까. 작은 탄환은 그저 나무 껍질에 맞아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봐라!!"

장 하사는 멈추지 않고 총을 쏘았다. 최명철이 부상자를 옮길 시간을 벌어 주어야 하니까.

후웅!

콰아앙!

그의 노력이 아예 쓸모없지는 않았는지 나무 거인은 손을 들어 그가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짙은 흙먼지와 함께 바닥에 깔려 있던 각종 잔해물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콜록! 콜록! 큭, 날!! 봐라!!!"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장 하사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지도 못한 채 재차 외쳤다. 조금 더 커진 목소리였다.

[구어어어어억!]

한낱 작은 인간이 자신에게 대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나무 거인은 장 하사를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자기 목소리가 더 크다는 듯이.

"그래, 이 괴물 새끼야! 날! 봐라···!!"

고막의 손상이 심해 이제는 잘 들리지도 않는 거인의 포효 소리. 장 하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신이 외칠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질렀다.

탕! 탕! 탕!

그의 손가락 또한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쏘아지는 탄환에는 조금씩 푸른빛이 담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미약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탄창이 절반 이상 비워지게 되었을 때는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푸른 섬광이 내뿜어졌다.

그리고 그 푸른빛을 본 나무 거인은 주춤거렸다. 작은 인간이 가하는 공격이 자기 자랑인 두꺼운 껍질을 뚫었기 때문이었다.

[그아아악!]

위기감을 느낀 나무 거인은 작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위협이 더 커지기 전에 장 하사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쿨럭! 그래···. 날, 봐라···. 콜록! 콜록!"

이미 체력이 바닥나고, 나무 거인이 공격했을 때 사방으로 튄 파편이 몸 곳곳에 박힌 장 하사는 자신에게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는 놈의 손을 피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 거인의 손을 보는 대신, 부상자들을 짊어지고 필사적으로 후퇴하고 있는 최명철을 바라보았다.

최명철은 부상자들이 올려진 들것과 연결된 로프를 잡아당기며 전장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다. 지금까지 시간을 끈 정도로 후퇴하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그에게 일말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타타타타탕!

근처에서 연발로 당기는 사격음이 들린다. 아직 정문 쪽에 남아 있던,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전차의 기총으로 거인을 쏘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 거인은 그쪽에는 신경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으니까.

놈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관심을 준 것은 장 하사였다. 그는 아직 매달린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입을 열었다.

"현재- 콜록! 콜록! 전차에 있는 자들에게 전한다···. 지금 당장 후퇴해라. 어서···! 콜록!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그럴 시간에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라는 말이었다. 다행히 그의 목소리가 닿았는지 전차에 매달려 있던 두 명의 군인들은 최명철이 이동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툭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전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은 살렸을까. 더 살릴 수는 없었을까."

거인의 손아귀에 잡힌 그는 시야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다급하게 후퇴하는 그들을 노린 악성 변이자들이 있었지만, 그것들 정도는 어찌어찌 처리하며 나아가는 군인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전력이 투입되었는데.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전진했는데.

남은 것이라고는 승리는커녕 10명 남짓한 병사들뿐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들만이라도 살릴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런 허무한 결과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정도로 끔찍한 죽음이 가득한 전장이었다.

장 하사는 권총 슬라이드를 살짝 밀어 흐릿해진 눈으로 남은 탄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탄창은 비워졌고, 약실에 남은 한 발이 전부. 결국 이제 사격할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흐흐···, 이 괴물 새끼···. 어디 한번 죽어봐라."

마지막 남은 탄은 누가 보아도 푸른 입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으니까.

왜 총알이 이렇게 변했는지 그의 눈에 보이는 푸른 입자는 무엇인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는 모른다.

허나, 지금 그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지금 오직 중요한 건 이 정도의 푸른빛이면 저 거인에게 지울 수 없는 흉터를 크게 새겨 주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철컥!

장 하사는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간신히 들어 거인에게 겨눴다.

나무 거인의 붉은 안광에 자신이 비쳐진 순간, 그는 온 힘을 다한 외침을 토해냈다. 자기 말을 똑똑히 들으라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절대로! 너희 괴물 새끼들에게!! 패배하지 않는다━!!"

과거 17사단, 현재 대한민국 통합 국군. 하사 장지석.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의 분대원들과, 위로 전진하면서 만난 다른 부대의 병사들과, 시민들과, 그의 가족과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타아아아앙!!

······콰직!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푸른빛이 나무 거인의 머리를 뚫은 것과 동시에 거인의 손에서는 붉은 핏물이 뚝뚝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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