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3 - 363. 준비 (13)
"그렇게 저는 장 하사님이 시간을 벌어 주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최명철은 장지석 하사가 쏜 푸른빛의 탄이 거인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킨 덕분에 부상자들을 데리고 본부가 있는 곳까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장지석 하사가 마지막에 퇴각시킨 2명의 군인들과 최명철이 후방으로 이송한 10명의 군인들. 최명철을 포함해 총 13명의 군인들이 후방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부상이 심한 전우들은 격한 도주를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결국 1차 작전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7명뿐이었다고.
그리고 최명철은 겨우 살아남은 7명조차 멀쩡하게 살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들 중 절반은 트라우마로 미쳐 자살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현재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그런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명철 본인과 다른 한 사람. 그 사람은 안개가 사라지기 전부터 주변 동향을 살피는 외부 정찰 임무에 자원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 했다.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내심 존경하고 있는 그 사람과 한 번쯤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최명철. 그는 난간 너머 지상의 풍경을 보면서 자기 인식표를 만지작거렸다.
"저기 연구소 정문에 쓰인 문구는 전사하신 장 하사님이 쓰신 겁니다."
나무 거인의 손에 완전히 짓이겨지기 직전, 놈을 무력화시키고 가까스로 탈출한 것인지 장 하사는 정문에 등을 기댄 채로 발견되었고, 정문에는 피로 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피로 쓰여져서 지워져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비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더군요. 우리가 컨테이너 장벽에 동일한 문구를 쓴 것이 그때였습니다."
17사단의 슬로건. '우리는 항상 승리한다'를 변형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문구가 적힌 정문을 보면서 그날의 실패를, 희생을, 죽음을, 분노를 하나도 빠짐없이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는 초소 근무자들.
시체조차 되찾지 못 하는 현실에 피눈물이 흘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그날을 잊지 않는 것뿐이었다는 최명철.
"아까 말했었죠. 저는 장 하사님이 살려주었던 목숨이라고. 모두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에게 압사당하고 있을 때, 그분은 다른 전우들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젠 제가 그럴 차례가 온 것뿐입니다."
"······."
"1차 작전에서 전사한 제 수많은 동기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같은 기수 중에서 남은 건 저 혼자뿐이더라도. 이현우씨 당신이 연구소로 가야만 하는 것처럼 제가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겁니다.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전우들의 진정한 안식을 위해서. 전우들의 넋을 기려야 하니까."
-제가 당신과 다른 점은 저는 좀 더 빨리 연구소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거네요.
그리 말한 최명철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
"······."
나와 한세아는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무어라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가 가슴속에서만 품은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을 때마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짓기도 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저기가 사지라는 건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선 가야 한다는 것도 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사지로 들어가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이 길밖에 없는데. 당신에게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처럼, 제게도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십쇼."
최명철은 그런 우리의 표정을 보더니 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자기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네요."
이 정도면 답이 되었냐는 시선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라고 말을 더 하겠는가. 이 이상 묻는 것도 실례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명철씨, 혹시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한세아가 대신 앞으로 나섰다.
"예, 됩니다. 뭡니까?"
"이야기 마지막 부분예요. 푸른빛이 나무 거인의 머리를 뚫었다고 했잖아요. 그거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강화탄인 것 같아서요."
"아, 그거.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제대로 본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는데, 제 눈에는 일단 그렇게 보이긴 했었습니다. 그 뒤로 그런 푸른빛을 본 적이 없어서 한세아씨가 말씀하신 강화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강화탄이 맞을 거예요. 제가 만든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테지만 유사하긴 하겠죠. 총기로 푸른빛의 선을 쏘아내는 건 강화탄밖에 없기도 하구요."
자신이 물어놓고, 자신이 결론을 내리는 한세아였다. 그녀는 역시 강화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며 말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비록 그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받아요, 명철씨.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래도 부적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녀가 이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7.62mm 탄이었다. 정확히는 푸른 입자가 최대치로 담긴 강화탄이었다. 아무래도 그걸 건네주기 위해 말을 꺼냈던 모양이다.
"이건···?"
그녀가 건넨 총알을 받은 최명철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푸른 입자가 이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인 최명철의 눈에서도 보일 정도로 매우 많이 응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화탄이예요. 거의 과포화 상태가 될 정도로 입자를 집어넣은 거라 다른 보조 수정 없이도 그냥 발사가 될 거예요. 저도 입자를 이렇게 많이 담은 탄을 직접 써 보지를 못해서 뭐라 말하긴 어렵긴 한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걸 쏘면 적어도 전방은 뚫을 거라는 거에요. 무엇이 앞을 가로막든 간에 상관없이요."
"······감사합니다."
최명철은 한동안 말없이 그것만을 눈에 담았다. 전사한 장지석 하사가 마지막에 만들어 낸 푸른빛의 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나와 한세아는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근데 왜 총알이 주머니에서 나옵니까? 실탄은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을 텐데요."
멍하니 강화탄을 보던 최명철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니까 저는 그, 강화탄 제작 실험하느라 탄약 상자를 통째로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몇 개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 혹시 필요한 일이 생길까 봐요. 남들한테 준 건 현우씨를 제외하고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실탄이 유출되는 건 너무 걱정 마세요. 다른 사람한테 줄 일도 없구요!"
순간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 맺힌 한세아는 떠듬거리면서 말했다. 확실히 그녀가 난쟁이들과 강화탄에 관한 실험을 진행 중이라는 건 나와 최명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답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한세아가 잘못을 들켜 속으로 뜨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몰래 하나 빼돌린 건 아니겠지···?'
나는 아닐 것이라 믿었다. 설마 진짜로 실탄을 하나도 아니고, 몇 개를 빼돌렸겠는가. 그것도 다른 난쟁이들 몰래 말이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부적처럼 잘 가지고 있겠습니다."
내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처럼 최명철도 그녀를 의심쩍어 하기는 했으나, 그냥 넘어가려는 듯했다. 그는 망설이다가 한세아의 말에 수긍했으니까.
그 뒤로, 나, 한세아, 최명철은 무거운 이야기에서 벗어나 시시콜콜한 이야기하면서 남은 근무 시간을 보냈다. 주로 빨대의 구멍은 2개인가 1개인가에 대한 격한 토론이었다.
최명철은 구멍이 2개라는 쪽이었고, 나와 한세아는 1개라는 쪽이었는데 중간에 한세아가 설득을 당하는 바람에 결론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잡다한 이야기가 이어졌으며 어쩌다 보니 최명철의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처음 본 군인들이 근무 교대를 하러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들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나니 시각은 어느덧 오후 7시 38분. 원래 근무 시간인 3시간을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근무를 마친 우리는 이제 근무를 시작해야 하는 초병의 부러움 섞인 배웅을 받으면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주위가 생각보다 어두워져서 날개를 피지 않고, 계단으로 말이다.
***
세마 벙커 내부.
"두 분 근무 서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행정실에 가서 근무 보고 해야 하니 이쯤 해서 따로 가겠습니다. 현우씨랑 한세아씨는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네, 명철씨도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언제 출발할 예정입니까?"
"음···. 늦어도 오후가 되기 전에는 출발할 것 같네요. 왜 그러십니까?"
"아뇨, 그냥. ···살아서 보자고요."
"그래요. 살아서 봅시다."
내 말에 피식 웃은 최명철은 그 말을 끝으로 복도를 걸었고, 우리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이내 코너를 돌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세아씨, 저희도 이제 방으로 돌아가죠. 위로 올라가니까 어땠습니까?"
나는 한세아의 손을 잡아 앞으로 걸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위에서 주변을 감시하는 것뿐인데 생각보다 힘드네요. 계단을 내려가기만 했는데 이 정도면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 둘 다 하는 분들은 진짜 힘들겠어요. 그래도 시간이 생각보다 잘 갔고, 옥상에서 본 풍경은 좋았지만요. 아, 그 스코프로 본 풍경만 빼구요."
"오늘은 근무가 처음이라 나눌 이야기도 있고, 볼 것도 있어서 시간이 잘 간 편입니다. 매일 근무를 서다 보면 나중에는 할 말이 하나도 없어지거든요."
"그거 경험담인가요?"
"경험담이죠. 저도 군대를 다녀오긴 했으니까요."
나와 한세아는 지수, 예린, 최미소, 엘리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가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 벙커 사람들이 저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공동 주방을 이용하는 줄에 서 있거나 홀에 모여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니 우리도 방에 가면 일행과 함께 저녁 식사부터 해야겠지.
이윽고.
벌컥!
"저희 왔어요!"
방에 도착한 우리는 문을 열면서 외쳤다.
"아, 오빠!"
심각한 표정으로 방을 뽈뽈 돌아다니고 있던 예린이 나와 한세아를 보자마자 표정을 풀고 도도도 달려왔다. 엘리는 여전히 입을 헤 벌린 채로 자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러고 있어? 지수랑 미소씨는?"
"언니들은 씻으러 갔어요. 저는 아까 씻고 와서 방에 있는 거구요."
"그래?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아까 표정이 좋진 않았던 거 같아서."
나는 예린의 얼굴을 이모저모 살폈다. 우리를 본 예린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걸 보니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 맞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게···. 친구들이 안 보여요."
"요정 친구들? 아, 정령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걔들이 한 마리도 안 보인다고?"
우리가 처음에 요정이라 불렀던 그들은 엘리가 말해주기를 정령이라는 존재라 했다. 주로 오래 쓴 사물에서 자연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네, 맞아요. 정령들이 이상하게 안 보여요···. 그 고양이도 안 보이구요."
마치 숨은 것처럼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반지로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는 예린.
"···심각한 거야? 아니면 예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어?"
한세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예린과 달리 평소에 정령을 보지 못 하는 그녀였기에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조금 드문드문 있는 편이긴 했지만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건 처음이예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큰일은 아닐 거예요. 워낙 변덕이 심한 친구들이니까요! 내일이 되면 언제 없어졌냐는 듯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겠죠!"
아이는 애써 웃으면서 나와 한세아의 걱정을 일축시켰다. 예린은 우리가 더 뭐라 할 새도 없이 자는 엘리를 깨웠다.
"엘리 언니! 그만 자고 일어나서 밥 먹을 준비해요!"
"······?"
나와 한세아는 그런 아이의 모습에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예린에게 다가가 같이 저녁 식사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 비몽사몽인 엘리를 챙기면서.
그렇게 식사 준비를 간단하게, 마치고 난 직후, 목에 수건을 두른 지수와 최미소가 지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 아저씨, 언제 왔어?"
"온 지 얼마 안 됐어. 일단 의자에 앉아 있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미소씨도요."
"오늘 식사 준비는 저희가 하려고 했는데, 조금 더 빨리 올 걸 그랬네요."
최미소는 해맑게 웃고 있는 지안이를 침대에 눕혀 둔 다음에 테이블에 수저를 착착 내려놓았다.
나, 지수, 예린, 엘리, 한세아, 최미소는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저녁 식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야기는 나와 한세아가 식사를 끝내고, 씻고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모두가 잠이 들기 전까지 계속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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