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65화 (366/497)

Chapter 365 - 365. 준비 (15)

무슨 선이 보이는 건 좋다.

그 선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까지 눈치챈 것도 좋다.

하지만.

"···칸, 무슨 선이 보이고,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대강 알겠어요. 그래서 그 선을 어떻게 뽑아야 하는 건데요?"

그걸 단순히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는 건 큰 오산이고 별개의 문제다. 무슨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상대 기술을 보자마자 베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말이다.

나는 튜토리얼이 끝나고 챕터 1을 진행하기에 앞서 나오는 툴팁을 보는 사람처럼 난쟁이 칸을 바라보았다. 플레이어의 편의성을 위해서 어서 힌트를 내놓으라는 시선이었다.

"이제 그건 네가 알아서 연습해야 할 부분이지."

그는 내 기대를 무참히 부숴 버렸다. 입에 머금기 좋게 식은 녹차를 호록 마시면서 한 말에 나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제가요?"

"그래, 네가. 네가 아니면 누구 한단 말이냐? 결국 이능을 사용하는 건 너이거늘."

"아니, 물론 연습은 제가 해야죠. 칸 말대로 이능을 쓰는 건 저이니까. 근데 그 전에 뭔가 더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주는 게 다음 순서 아니었어요? 선의 형태를 잡는 법이라든가, 좀 더 수월하게 선과 연결된 힘을 회수하는 방법이라든가. 그런 것들 있잖아요."

"허어···. 숟가락으로 떠서 주니 이제는 입에 넣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너와 나는 이능을 쓰는 법이 일견 동일해 보이나, 사실은 메커니즘 자체가 다르다. 나는 너와 달리 푸른 입자를 쓰지 않아. 그저 날 때부터 체내에 가지고 있는 다른 에너지를 쓰는 것이지."

난쟁이 칸은 내가 볼 수 있도록 손에 담긴 힘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지 않느냐. 너는 입자로 우리의 능력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고유 특성을 따라 하는 건 내가 살다 살다 네가 처음이다. 그래서 그 부분은 우리가 어찌 알려줄 방법이 없어. 그저 네가 스스로 사용법을 깨닫는 것뿐."

입력값이 다르면 출력값이 다른 것이 거의 사실이고, 자신이 모호하게 조언했다가 중간 경로가 어긋나면 내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칸. 그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지 않으냐. 그냥 하니까 된다. 이렇게 쉬운 일을 너는 이게 왜 못 하는 거지? 같은 말 말이다."

"······."

"거 봐라. 기가 막히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무의식적이라고 해야 할까, 본능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우리는 생각한 대로 힘을 움직일 수 있거든."

"······."

"별다른 행위없이 의지만으로 땅울림을 행할 수 있기에 너에게 노하우같은 걸 알려줄 수가 없는 것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너는 내게 어떻게 숨을 잘 쉴 수 있는지, 어떻게 물이 목에 막히지 않게 마실수 있는 것인지를 물어본 것과 같다."

난쟁이 칸은 이래서 내가 너에게 힘이 움직이는 방향과 그 힘이 가져오는 결과물을 반복해서 보여 준 거라고 말했다. 반복 시범을 보여 준 게 그 나름대로 내게 기술을 알려주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말문이 막혔고, 그가 킬킬 웃으면서 말한 '사레 들리지 않고 물 마시는 법'의 이야기에 숨까지 막혔다.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뭐, 선이 보인다면 나머지는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다. 또 아예 감이 안 잡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렇긴 하죠. 칸 덕분에 적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약간 알게 됐어요. 막막한 게 좀 풀렸네요."

"만약 네가 선을 어떻게 뽑는지 깨닫고 방법이 숙련된다면 이런 것도 할 수 있겠지. 미래를 잠깐 보여주마."

난쟁이 칸은 내게 의욕을 고취시켜 주려는 듯 심화 단계 수준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찻잔을 옆 서랍장 위로 옮겼고, 석재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쿠르릉-

테이블 위에는 작은 병정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생겨났다. 정면으로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단단한 갑옷과 창, 방패를 장비한 군대였다.

툭-

"땅울림은 단순히 무게 중심을 흩트려 넘어지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칸이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는 기묘한 파장이 퍼졌고, 그건 위를 점거하는 작은 병정 군대를 덮쳤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 그러나 비효율적이야. 지속해서 땅을 흔드는 것이 아닌 일시적에 불과할 뿐이라면 적들은 금방 기세를 회복하니까."

그의 말마따나 작은 병정들은 넘어질 것처럼 기울어지다가 기다란 방패와 서로에게 의지해서 흔들림을 버텨냈다.

"이럴 때 적을 쉽게 와해시키는 방법은 밑에서부터 공격하는 거다."

칸이 다시 한번 테이블을 두드렸다. 기묘한 파장이 퍼지는 건 동일했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같지 않았다.

파바박!

이쑤시개 같은 가시들이 병정 부대 밑에서부터 뚫고 올라온 것이다. 한순간에 치솟은 돌 가시는 중심부에 뭉쳐 있던 병정들을 이리저리 흩어지거나 꼬챙이에 꿰여 위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절대로 밀리지 않을 것 같던 병정 군대가 눈 깜빡할 새에 무너진 순간이었다.

"선으로 이루어진 파장을 네가 날카롭게 제련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을 할 수도 있어. 돌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창으로 적을 꿰뚫는 것이지.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벽도 세울 수 있다. 아군을 지키는 벽 말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쓸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지나간 길목마다 벽들이 도미노처럼 우후죽순 솟았다. 외부의 공격을 굳건히 버텨줄 벽이 만들어지자 병정 군대는 황급히 그 벽 뒤에 숨었다.

"하지만 이건 지금 네 수준으로는 무리다. 벽을 단단하게 유지시킬 수 없다면 그건 하느니만 못 하는 방법이니까. 형태가 무너지지 않아야 벽이지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진다면 그건 벽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

칸은 병정 군대를 숨겨 주고 있는 벽을 향해 바람을 훅 불었다. 고작 약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을 뿐인 벽은 부스러기를 흘리다가 이내 우르르 무너져 버렸다. 벽 뒤에 숨어 있던 병정 군대가 도미노처럼 무너진 벽에 깔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벽 무더기에 깔린 병정들은 얻어맞은 충격으로 해롱해롱하게 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돌로 이루어진 주제에 생각보다 생동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병정들이었다.

테이블 위에 일어난 작은 전쟁을 보던 나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단발성이 아닌 유지력이 중요하다는 것인지 말이다.

돌 가시는 한순간의 힘을 쏘아내서 적을 꿰뚫거나 위협적으로 보이기만 하면 제 할 일을 다하는 것이지만, 불완전한 석벽이 만들어지면 그건 오히려 아군에게 독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적들 주변에 불완전한 석벽을 만들어서 역으로 공격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상대할 적들이 비정상적인 근력과 체구를 가진 걸 감안했을 때 크게 의미는 없겠지.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질량으로는 별 피해를 주지 못할 테니까.

"싸울 때 엄청 도움이 되겠어요. 제가 칸이 보여 준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요."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 여기가 방이라서 이렇게 작게 만든 것이지 주변이 탁 트인 곳으로 가서 이능을 사용하면 광역으로 공격할 수도 있을 게다. 물론, 어디까지나 네가 땅울림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네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만큼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지."

"네, 열심히 해야죠. 이런 거 하나하나가 급할 때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요."

나는 칸의 말에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덧 12시를 넘긴 시간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며 생각한 나는 마지막으로 칸에게 물었다.

"칸, 아까 제가 푸른 입자로 땅울림을 흉내 내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이 푸른 불도 다른 특성을 흉내 낸 건가요? 이건 딱히 다른 사람에게 배우진 않은 것 같은데."

"그 불은 귀쟁이들의 고유 특성이다. 세계수 근처는 일반적으로 불이 금지되어 있지만, 유일하게 불이 허락된 인간들이 있거든. 네가 다루는 불은 그 녀석들이 쓰는 불과 같은 힘이야. 내가 들었던 거랑 색이 좀 묘하게 다른 것 같긴 하다만, 이 부분은 잘 모르겠군. 워낙 비밀리에 이어지는 힘이라서."

난쟁이 칸은 통칭 정화의 불이라 불리는 푸른 불은 소수의 숲지기와 사제들이 쓰는 이능이라고 설명했다. 불이 금지된 숲에서 유일하게 불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의 힘이라고.

그는 내가 정화의 불을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홀로 깨우친 것은 현재 내 심장 속에 박힌 세계수의 씨앗 덕분이며, 결국은 세계수의 힘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숲지기와 사제들이 사용하는 세계수의 힘이라···.'

나는 엘리를 위로하고 돌아온 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쩐지 그녀가 내가 피워 낸 푸른 불을 보고 그리움 가득한 눈빛을 보내더라니. 그런 연유였던 것이다.

숲을 망가트리는 오염된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존재하는 숲지기들이 사용하는 힘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다.

세계수의 사제들이 사용하는 힘이라는 건 예전에 칼카타에게 들어서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니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그런가요···. 설명 감사합니다, 칸. 이거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건 아닌가 싶어서 죄송하네요."

"무얼. 생각이 막히거나 궁금한 것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내가 아는 걸 알려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요? 그럼 내일 저 훈련하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뭘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는 건 아니고 제가 만든 결과물을 보고 이런저런 말은 해 줄 수 있잖아요."

나는 냉큼 그의 말을 받아먹었다. 내가 먼저 매달린 것도 아니고, 그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지 않나.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이런 건 앞뒤 순서가 중요했다.

"······허허. 바로 말할 줄은 몰랐구나. 알겠다. 그럼 내일 위에서 보는 걸로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다행히 흔쾌히- 아니, 흔쾌히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알겠다고 답한 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방에서 나왔고, 곧장 일행이 지내는 방으로 움직였다.

오늘은 이 정도 수확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이제 남은 건 남은 시간 동안 감을 최대한 잡는 것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방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지수가 예린, 엘리, 최미소와 함께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세아는 아직 강화탄 실험이 끝나지 않아 돌아오지 못한 상태라고.

나는 격한 환영을 하는 지수를 진정시키며 내일 훈련은 같이 하자고 말했고, 지수는 꼬리를 더 격하게 붕붕 휘두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나는 땅울림이라는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감을 잡는 것에 신경을 최대한 집중했다. 난쟁이 칸이 석재 테이블에서 보여 주었던 그 광경을 재현하기 위해서.

그건 한세아가 강화탄 실험에서 고무적인 결과를 얻고 돌아왔을 때를 넘어서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