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7 - 367. 준비 (17)
여의도 공원 중앙 공터.
"반갑다. 나는 오늘 너희의 훈련을 도와줄 칸이라고 한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급조한 석재 단상 위에서 말하는 난쟁이 칸. 그는 어디에서 새빨간 모자를 구해왔는지 그걸 쓰고 있는 중이었다.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라는 그의 손짓에 나, 지수, 엘리는 일단 어느새 만들어진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로 훈련을 시작하는 줄 알았건만.
나와 엘리는 당황한 눈초리로 지수에게 평소에도 이러냐고 물었고, 그녀도 당황한 시선으로 화답했다. 역시 평소에도 이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칸. 그 모자는 어디서-"
"자, 그 전에 먼저 내 친우가 너희에게 줄 물건을 가져왔다고 하는구나. 르한, 이제 나오면 된다."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칸은 무대 위 진행자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할 말만 했다.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후딱 주고 끝내면 될 것을. 일을 참 번거롭게 만드는 재주는 여전하군, 칸."
칸의 말에 단상 아래에 있던 난쟁이 르한이 올라오면서 한 말이었다. 밑에 있는 우리도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동의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허,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한 행동이라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이냐. 솔직히 자네가 만든 결과물을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으면서. 표정에서 다 드러나고 있거늘."
"······네가 알긴 뭘 알아. 며칠 밤을 새서 진짜로 피곤하다는 말이다. 거기 너랑 현우. 위로 올라와라. ···아니, 생각해 보니 올라올 필요 없다. 이런 장난은 이제 충분해. 어울려 주기도 싫고."
눈가가 퀭한 난쟁이 르한은 손짓 한 번에 칸이 위로 올라가 있던 단상을 원래대로 판판한 땅의 형태로 되돌려 버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눈높이가 낮아지는 난쟁이 칸과 르한이었다.
그들은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지 않게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우리를 마저 불렀다.
"자, 받거라. 오늘 새벽에 막 완성된 참이다. 뜸 들일 것도 없이 바로 가져왔지."
난쟁이 르한은 둘러싼 천을 풀어 감추고 있던 내용물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렇게 드러난 건 2자루의 도끼. 일 전에 자신이 무기를 강화 시켜 주겠다며 가져갔었던 지수의 소방 도끼와 그녀가 내게 선물해준 벌목 도끼였다.
어쩐지 한동안 보이지 않던 르한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더라니. 이런 연유였다. 마침 합동 훈련하던 참이었는데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 내 도끼!"
자기 익숙한 무기를 본 지수가 반색하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소방 도끼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훈련용 도끼가 비참하게 버려진 순간이었다.
툭-
그건 이제 흙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훈련용 도끼도 생각보다 괜찮다고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버려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응? 이거 딱히 바뀐 게 없는데요?"
무엇이 달라졌는지 소방 도끼를 이모저모 살펴보던 지수는 이내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 말대로 외형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다. 아니, 거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외형이 그대로였다.
"겉은 그대로가 맞아. 하지만 내부가 크게 바뀌었다. 한번 푸른 입자를 운용해 봐라 다행히 내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와서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야."
깜짝 놀라지나 말라는 난쟁이 르한. 그는 곧 이어질 지수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수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평소처럼 도끼에 조각 속 푸른 입자를 넣어 스파크를 일으켰다.
파지직!
스파크가 평소보다 더 강하게 튀는 것과 동시에.
"뭐야!"
지수가 화들짝 놀라면서 푸른 입자 운용을 중지했다가 눈을 비빈 후에 다시 입자를 도끼에 둘렀다. 그리고 보여지는 결과는 동일했다.
파지지직!
"뭐야!!"
이번에도 지수가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랐다. 평소처럼 푸른 입자를 똑같이 두른 것뿐인데 예전보다 강한 스파크가 위협적으로 튀었기 때문이었다.
"뭐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전보다 입자가 더 자연스럽게 들어가는데요?"
"내가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떤가. 마음에 드나?"
"네!"
"그럼 되었다."
르한은 잠시 피곤한 기색을 지우고 킬킬 웃어댔다. 가만히 있던 꼬리가 붕붕 돌아가고, 귀를 쉴 새 없이 쫑긋거려 눈에 곧장 보이는 지수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현우, 너도 확인해 봐라."
그는 이어서 내게 도끼를 건넸다. 지수의 반응을 본 나도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기에 그가 건넨 도끼를 냅다 받았다.
그리고.
"······오."
나도 지수처럼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만큼 격한 반응은 아니지만 지수가 그렇게 놀란 반응을 보여 준 것이 이해가 갔다. 그녀가 놀랄 만도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예전이었다면 푸른 입자를 무기 안으로 집어넣었을 때 절반 가까이 깎여 나갔을 것을 지금은 반의반 정도만 깎여 나갔으니까.
효율 자체가 체감이 확 될 만큼 올랐고, 그 효율만큼 더 강한 공격을 여러 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쉽게 해결할 수 없었던 푸른 입자 소모량 문제. 그것을 난쟁이 르한이 무기 개선을 통해 해결해 주었다.
"확실히 엄청 좋아졌네요. 감사합니다, 르한."
"만족스럽나 보군. 다행이야."
"내부를 어떻게 손 보셨길래 이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무기뿐만이 아닌 각종 사물이 푸른 입자 덩어리에 오래 노출되면 내부에 점점 스며들게 되는데, 이때 스며든 입자 파편들은 서로 연결된 상태로 이어진다. 나는 그 순서를 조정한 것뿐이야. 조금 더 입자가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말이다. 일종의 규격을 맞춰주었다고 이해하면 돼."
"허허. 이 친구 좀 보게. 말은 참 쉽게 하는군. 자네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겸손을 떠나? 그냥 평소처럼 버럭버럭 소리치면서 자랑하라는 말일세."
르한의 말을 이은 건 난쟁이 칸이었다. 그는 수염을 절레절레 흔들다가 나와 지수를 바라보았다.
"현우야, 말은 저래 쉽게 해도 무기 손상 없이 내부를 바꾼다는 건 나조차도 쉽게 못 하는 일이다. 아마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들어갔겠지."
며칠 잠도 못 잔 것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어서 그가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매우 퀭한 르한의 눈가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르한 아저씨!"
도끼를 보고 희희낙락하고 있던 지수가 허리를 팍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꼬리가 아직도 붕붕 움직이는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바뀐 도끼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르한에게 무기를 맡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든 나도 한 번 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흥. 내부 회로를 정리하고, 그 덕분에 입자 운용이 더 쉬워지고 손실률을 낮추는 건 내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상황이 낯간지럽다는 듯 애써 코웃음을 치는 난쟁이 르한을 보며 우리는 킥킥 웃었다.
"아, 꼬마 귀쟁이. 네 이름이 엘프리데라고 했더냐."
"네, 네···."
옆에서 소심하게 따라 웃던 엘리는 퀭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네가 지금 들고 있는 활."
"제 활은 왜, 왜요···?"
"그래도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이라 내가 네 활도 손 봐주려 했는데, 그건 안 될 것 같군. 확실하진 않으나 내가 섣불리 내부를 건드릴 수 없는 상태야. 손상이 회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사용한 것 같고. 내게 줘 봐라. 가까이서 한번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겠다."
"······."
나와 르한을 번갈아 바라보는 엘리의 녹안에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가 엘리의 활에 시선을 준 건 직업병 탓인 것 같았으니까. 맡기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지 않겠나.
엘리는 눈을 꼭 감고 난쟁이 르한에게 활을 내밀었다.
"···흠. 역시 강화를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겠어. 이미 어느 정도 회로가 정리가 되어 있기도 하고, 세계를 넘는 과정에서 손상을 크게 입기도 했군. 이건 내 손을 떠났다. 괜히 건드리면 되려 손상만 더 입히게 되겠지."
그는 활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힘을 살짝 흘려 내부 상태를 관조해보기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르한은 이내 현재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딱히 없다는 말과 함께 활을 돌려주었다.
"그럼 앞으로 몇 번이나 쏠 수 있을까요···?"
"최대 장력 기준으로 10번 남짓. 여기에 힘을 담는다면 3번 남짓. 그 이상은 활이 더 버티지 못할 거다. 소중한 물건이냐?"
"네. 엄청 소중한 물건이에요. 선대 숲지기가 저한테 물려준 활이거든요."
"선대 숲지기라···. 월계수 문양의 숲지기면 내가 좀 알지. 그럼 나중에 이 활이 부러지면 나를 찾아와라. 어떻게든 고쳐주마. 비록 완전히 회복시킬 순 없어도 재료를 보강하면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으니까."
"······감사해요!"
자기 활을 잠시 눈에 담은 엘리는 입술을 짓씹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얼. 나는 이만 가 보마. 훈련 잘하고."
그리 말한 르한은 곧장 몸을 돌렸다. 이제 제정신으로 있는 것이 한계에 달한 듯 흔드는 손이 흐느적거리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