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68화 (369/497)

Chapter 368 - 368. 준비 (18)

"갔다."

난쟁이 르한이 떠나는 걸 지켜본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이내 나와 엘리, 난쟁이 칸에게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도끼도 받았으니까 이제 우리 할 일 해야지! 훈련··· 하기 전에 몸부터 풀고. 엘리, 너도 얼른 몸 풀어. 아직 몸이 안 풀린 상태에서 격하게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아, 네!"

가라앉은 표정으로 손에 들린 활을 보던 엘리는 지수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몸 어떻게 풀어?"

그래도 이곳에 먼저 와봤다고 자연스럽게 스트레칭하면서 몸을 풀기 시작한 지수.

"네? 어떻게 풀다뇨? 어···, 그냥 언니처럼 팔다리 쭉쭉 뻗어서 풀죠···?"

난간에 다리를 올려 팔다리를 유연하게 쭉 뻗는 모습은 엘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숲지기라는 것이 허명은 아닌지 몸이 지수보다 더 유연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활을 다루는 만큼 기본적인 근력도 약하지 않았고.

비록 아직 체력의 문제가 남아 있으나,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겠지.

"역시 같은 사람이라 그런가. 사는 곳이 달랐어도 몸을 푸는 건 다르지 않구나."

"마을 어른들이 하는 특별한 체조가 있기는 한데, 저는 그거 안 배웠어요."

"왜? 특별하다고 할 정도면 무슨 좋은 효과가 있는 거 아니야?"

"아아, 특별이 아니라 특이였네요. 아직 단어가 조금 헷갈려서···. 아무튼 특이한 체조였어요. 막 이상한 기합도 내고, 나무에 등을 기대서 막 비트는데 아무리 숲지기라도 그건 좀 그래서 안 배웠던 거예요."

엘리는 숲과 친해야 하는 숲지기의 특성상 나무와 교감을 나누는 체조를 배우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이 그 체조를 하는 상상을 하니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부감에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아쉽게도 끝내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표정 보니까 하나도 안 아쉬워 보이는데.'

나는 엘리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킥킥 웃었다. 그녀가 설명한 체조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곰도 아니고 나무에 등을 긁는다니.

호록-

석재 단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만든 의자에 앉은 난쟁이 칸은 보온병에 담아온 녹차를 마시면서 나, 지수, 엘리의 몸 풀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피드백을 받기 위해 자신을 따로 부르거나 다른 난쟁이들인 조이, 탄이 자신을 붙잡아 가기 전까지 지금 시간을 한껏 즐기려는 모양이다.

이윽고.

"나는 몸 풀기 끝! 아저씨도 몸 다 풀었으면 훈련 시작하자. 그리고 어지간하면 여기는 넘어오지 마. 아직 속도 제어를 완전히 못해서 부딪치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스트레칭을 마친 지수가 나와 엘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알았어. 최대한 그쪽에 방해가지 않게 할게."

그리 말한 나는 엘리를 데리고 지수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다.

가지런히 정렬된 가건물들, 전차가 보관되고 있는 가건물 앞을 지키는 군인들, 도로와 건물을 타고 자란 넝쿨, 펄럭이는 태극기가 있는 게양대, 하늘을 일부 가릴 정도로 무성하게 뻗친 나뭇가지, 도로에 박힌 프로펠러, 한쪽 풍경을 담당하는 컨테이너 장벽, 그 위에 설치된 기관총.

지금 나, 지수, 엘리, 칸이 있는 곳은 여의도 공원, 문화의 마당이었다.

원래는 게양대 근처에 C-47 비행기 전시관이 있어야 하지만 그건 현재 반 토막이 나서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옅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잔해물만 있을 뿐이었다.

한때 사방과 하늘이 뻥 뚫려 있어 햇빛을 피할 곳이 없던 이곳은 이제 컨테이너와 넝쿨, 나뭇가지에 가로막혀 옅고 짙은 그림자가 생겨나 있었다.

나중에 훈련을 하다가 힘들면 그림자에 숨어 한숨 돌리면 될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와 엘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핫!"

뒤에서 힘찬 기합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은 지수였다. 그녀는 우리가 자리에서 비키자마자 바로 훈련을 개시했던 것이다.

타타탓-

지수는 몸에서 튀는 스파크를 제어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진 그녀는 목표로 한 나무 바로 앞에서 멈추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치지지직-

중간부터 감속을 시도한 흔적인 스키드 마크가 나무 앞까지 이어진다. 마찰이 얼마나 강하게 일어났는지 신발 밑창에서 연기가 살짝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밑창이 두꺼운 군화인 덕분에 지수는 달아오른 밑창의 열기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가 하는 건 자신이 원하는 속도와 원하는 만큼의 거리를 확실하게 정해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훈련.

1단계는 장애물 앞에서 멈추는 것이고, 2단계는 장애물이 없이 원하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멈춘다는 건 일견 똑같다고 할 수 있으나,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앞에 실제로 장애물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나무 앞에서 멈춘다는 생각을 한 머리는 목적지에 있는 나무를 확실하게 인식을 할 테고, 그 결과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 나무 앞에서 멈출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겠지.

그 다음 단계 훈련이 앞에 장애물 없이 멈추는 훈련인 것은 위와 같은 까닭이었다. 앞에 장애물이 없으면 머리는 1단계에 비해 경각심을 늦출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기에 몸에 부상을 입는 횟수는 1단계가 많지만, 난이도를 따지자면 2단계가 훨씬 어렵다고 할 수 있었다. 정확성을 요구하는 단계이니만큼 오차를 용납하지 않지 않겠나.

그녀는 내가 보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심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구를 착용한 채로.

후웅!

파지직!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지수는 난쟁이 탄이 전에 만들어둔 석재 허수아비에게 돌진해서 도끼를 휘둘렀다. 푸른 스파크가 위협적으로 튀는 도끼는 돌로 된 허수아비를 그대로 반으로 갈라버렸다.

서걱!

깔끔하게 잘리는 소리와 함께 매끄러운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단단한 돌을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도끼의 날은 전혀 상하지 않았다. 여전히 위협적인 스파크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쿵!

떨어진 머리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녀는 후방으로 이동해 있었다. 다만, 균형을 잃고 몸이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걸 보니 아직 숙련이 되진 않았나 보다.

지수의 말에 따르면 훈련은 3단계까지 있다고 하던데, 방금 한 행동이 3단계인 모양인 듯하다.

'원하는 곳에서 멈추고, 그 앞에 있는 상대에게 한 방 날리고, 곧장 자리를 피해 상대의 공격에 맞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게 3단계라고 했었지.'

일명 치고 빠지기 전술.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고 잽싸게 공격을 피하는 것이 속도가 빠르고 강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지수에게 딱 맞기는 했다.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간 난쟁이 칸이 석재 허수아비를 재생시켜 주는 모습을 끝으로 엘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기 쥐- 아니, 전기 강아지 같은 지수가 스파크를 화려하게 튀기면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내가 아침부터 지수, 엘리와 함께 지상을 올라온 건 단순히 구경을 하기 위함이 아니지 않은가.

이왕 방구석에서 혼자 이능을 연습하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이면서 체화시키는 것이 더 빨리 익숙해지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러니 나도 내 할 일을 해야겠지.

"엘리, 혹시 그 활 안 써도 바람으로 화살 만들 수 있어?"

나는 전기 강아지를 구경하는 엘리에게 물었다. 원래는 활로 바람 화살을 쏴서 내가 만든 벽의 강도를 실험해보려고 했는데, 르한에게 활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들은 이후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많이 쓰지 못하는 활을 이런 훈련에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아, 네! 활을 사용하지 않아도 바람 화살은 만들 수 있어요. 비록 그 위력은 많이 약해지지만요."

"다행이네. 그럼 내가 이따가 한번 벽 만들어 볼 테니까 거기에 화살로 때려줄 수 있어? 그냥 손으로 툭 치는 정도로도 충분한데."

"알았어요. 그 정도야 쉽죠."

"고마워."

엘리는 내게 준비되면 말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전까지 갑자기 사라진 정령들을 한번 찾아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지상으로 올라온 이유에는 내 훈련을 도와주기 위한 것도 있고, 예린에게 부탁 받은 일하기 위함인 것도 있었다. 이틀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령들의 행방이 궁금하다면서 말이다.

엘리는 예린이 말했던 것처럼 정령들은 워낙 변덕스러운 존재들이라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난다고 했으나, 내심 이 현상이 신경 쓰였는지 사라진 정령들을 찾으려는 엘리였다.

"혹시 뭐라도 찾으면 나 불러. 알았지?"

나도 반지를 써도 나오지 않는 정령들이 찜찜하던 참이었기에 그녀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어차피 그녀가 돌아다니는 활동 반경은 컨테이너 장벽 내부라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 테지만, 엘리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힘차게 대답한 엘리는 활을 비스듬히 메고 다다다 뛰어가 사라졌다.

휘이이이-

그녀가 향한 길목에 붙어 있는 넝쿨 잎사귀와 금발이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부스스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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