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9 - 369. 준비 (19)
"후우···."
엘리마저 보내고 혼자가 된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도끼를 든 상태로 한 번 더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혹시 다칠 수도 있으니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한 후, 이대로 도끼에 모인 입자를 앞으로 방사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든 순간.
카가가각!
곧은 선을 그리듯이 도끼날을 아래로 향한 채 도로를 그었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표면이 날카로운 도끼날에 인정사정 없이 갈려 나가는 소리를 낸다.
그와 동시에.
촤자자작!
내가 목표로 삼은 방향을 따라 일직선으로 돌로 된 가시의 바늘들이 마구잡이로 솟아났다. 우후죽순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진 얇고 뾰족한 바늘들. 칸이 예시로 보여 주었던 것을 따라한 결과물이었다.
생각만으로 땅울림의 선을 제어할 수 있는 난쟁이들과 달리 나는 이렇게 도끼날을 땅에 박아 넣어 위로 올려치는 행동을 수반해야 그나마 원하는 목표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의 단계를 넘어 면과 입체 단계에 다다랐을 때 만들 수 있는 의자 같은 각종 가구들은 아직 꿈도 못 꾸는 신세이지만, 선을 엉망으로 휘둘러서 가시를 만들어 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
나는 내가 만든 바늘에 가까운 가시의 창을 보면서 웃기는커녕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일견 위력적으로 쏘아졌고 전방의 적들을 한 방에 꿰뚫을 것처럼 솟았으나, 실상은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건드리면 톡 부러지는 데다가 사람의 연약한 피부조차 따끔하게만 만들고 뚫지는 못할 정도인데 이걸 어디에 쓰겠는가.
나무 인간의 껍질을 뚫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단순히 외견으로만 위협적으로 보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무슨 마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 위로하는 그때.
"응집도가 약해."
어느새 다가온 난쟁이 칸이 내가 만든 가시를 툭 부러뜨리면서 말했다.
부스스···
그가 가시 하나를 꺾은 기점으로 주변의 다른 가시들은 모조리 가루로 변해 폭삭 주저앉았다. 겨우 하나가 꺾였을 뿐인데 그 여파로 주변 가시들이 즉시 사라지고 있는 모습은 그만큼 내가 만든 것이 조잡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하고 이래서야 나무 인간을 죽이기는커녕 껍질도 못 뚫겠어. 너무 겉모습에만 신경 쓰는 게 아닌가 싶구나."
이어지는 칸의 비겁한 사실 지적에 나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피드백을 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순간 그런 표정이 지어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지수는 어찌하고 내게 온 것인가 싶었는데 그건 그의 뒤편을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지수가 계속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석재 허수아비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매번 하나씩 만들지 귀찮았는지 미리 한 번에 많이 만들어두고 나한테 온 모양이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라고요. 하루 만에 이 정도인데 계속 연습하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겠죠."
"그렇긴 하겠지. 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으니 도끼의 움직임으로 어떻게든 만든 것 같은데, 그렇게 만든 걸 감안 한다면 그리 나쁘진 않다. 무엇보다 방금이 첫 시도이지 않느냐. 열심히 해 보거라. 나는 옆에서 지켜볼 테니."
"칸, 뭔가 힌트라던가 더 해 줄 말은 없어요?"
"너무 형태에만 집중하지 마라. 일단 생김새를 보아하니 너는 적을 꿰뚫어서 죽인다는 인식에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한 것 같구나. 내가 어제 보여 주었던 예시의 영향일까. 너는 그 인식을 바꿔야 해."
난쟁이 칸은 방금 자신이 무너트린 가시의 창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인식이요?"
"그래, 인식. 무언가를 죽이기에는 굳이 뾰족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 말이다. 죽이는 방법이 어디 찔러 죽이는 것만 있더냐? 날카로운 무언가로 베는 것만이 죽이는 방법이더냐? 아니다. 죽이는 방법에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어. 날카롭지 않은 뭉둥이로 패 죽이는 것도 한 방법이고, 끝이 뭉툭한 망치로 머리를 부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느냐."
"······."
"그래서 인식을 바꾸라고 한 거다. 아주 단순한 사실이지만, 때로는 너무 단순해서 이걸 놓치는 경우가 있거든."
뾰족한 끝이 상대를 꿰뚫는 것보다 뭉툭하더라도 적을 꿰뚫을 때까지 단단하게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는 난쟁이 칸. 그는 쉽게 부러지지 않게 가시라는 형태에 집착하지 말고, 두께를 늘려 내구도부터 올려보라고 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실제로 내가 그동안 도끼만 써 온 것도 아니고, 오함마로 나무 인간의 머리를 깨부숴서 죽인 적이 있지 않던가.
그의 말처럼 굳이 베지 않아도 단단하고 뭉툭한 거로 나무 인간이나 변종들의 껍질을 부수는 것도 죽이는데 도움이 되고 말이다.
"지금은 네가 돌가시를 만들기 위해 도끼를 사용하고 있으나, 나중에 가면 힘을 무기에 싣지 않아도 가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다. 본디 힘이 가장 잘 전달되는 건 도구가 아닌 신체이니까."
내가 칸의 말을 곰곰이 곱씹고 있는 와중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팔과 다리. 인간이 가진 그 무엇보다 훌륭한 도구이자 가장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도끼의 움직임을 이용하지 않아도 선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고, 네가 사용하는 입자도 거의 손실되지 않겠지. 그것이 심화되었을 때, 단순히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힘을 제련해서 가시, 벽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을 조각할 수 있을 게야. 네가 내딛는 발판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멀어도 한참 먼 것 같은데요?"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뗄까 말까 하는데, 무슨 발을 굴러 진동을 만들고 그 진동으로 힘을 제련한다는 말인가.
"물론 이 부분은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나도 손으로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발을 굴러서 하는 건 못 해.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난쟁이 칸은 수염을 흔들면서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어떤 무언가에 한정시키지 않는 걸 최종 목표로 삼으라고 말했다.
높아도 너무 높아 지금 내가 쳐다보지도 못 하는 곳에 있는 최종 목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 갈 길이 머네요. 일단 칸이 말한 대로 두께를 늘려서 만들어 볼게요.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가 위에 도착하겠죠."
"좋은 마음 가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한 번 해 보기, 절대로 처음부터 지레짐작으로 포기하지 않기. 기억을 잃었어도 이런 부분은 그대로구나."
과거에 내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이라며 허허 웃은 칸은 내 활동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는 이내 그늘 진 곳에 가서 다시 보온병에 담긴 녹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석재로 만든 의자에 앉아 차를 호록 마시는 모습은 한결같이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카가가각!
나는 다시 한번 도끼와 팔에 입자를 두르고, 도로를 긁었다.
이번에는 칸의 조언대로 가시라는 형태에 집착하지 않고 부피를 확 늘렸다.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방사하는 힘, 정확히는 선을 겹쳐서 두께를 늘리면 되었으니까.
촤자작-!
허나, 이번에도 나오는 건 얇은 바늘 같은 가시. 전보다 두께가 늘고 좀 더 단단해지기는 했으나 전투에 유의미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두 번 시도해 본 것뿐이야.'
그래,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한 번에 성공했으면 분명 좋았겠지만, 벌써부터 기 죽을 필요는 없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작전 개시일까지의 시간도 많이 남았다. 나는 그 남은 시간을 잘 분배해서 계속 연습하면 될 일이었다.
하물며 난쟁이 르한이 무기를 개량해준 덕분에 입자 소모 효율이 올랐고, 그 결과 예상보다 더 많이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았나.
이어서 3번째 시도.
드드득!
도끼를 휘두른 방향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는 돌 기둥들. 그것들은 서로 뒤엉키며 솟아났다.
"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무심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리저리 찌그러진 사각의 형태에 가까운 기둥들은 손가락만한 두께에서 팔뚝만 한 두께로 바뀌었던 것이다.
모양이 형편없기는 했으나 외형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에 신경 쓸 것 없고, 나는 기둥의 두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에 주목했다.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만든 결과물을 툭 건드려 보았다. 내구성을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칸이 살짝 건드리는 정도로 가루로 변하지만 않으면━
퍼석-
얇은 껍질이 부서지면서 기둥이 조각조각 무너져 내린 것이 그때였다.
와르르-
허술하게 쌓은 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전진한 기둥들이 폭삭 주저앉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묵직한 막대기들인 것 같았지만, 실제로 가서 건드려보니 드러나는 건 속이 텅 빈 내부. 부피만 크고 속이 텅 비어 크기에 비해 실속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마치 공갈빵 같았다.
"···공갈빵?"
순간 숨이 턱 막힌 내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으하핫! 이래서 내실이 중요하다는 거지!"
옆에서 난쟁이 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 탓에 순간 마음이 꺾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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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삽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