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0 - 370. 준비 (20)
"···그만 웃어요, 칸."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이 기껏 허탈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고 있건만, 옆에서 초를 치다니.
"크흠! 너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라 그만 웃어 버렸구나. 미안하다. 가만히 있을 테니 계속 연습하거라."
그리 말한 칸은 뒤로 물러서더니 가건물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군인에게 손짓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와 지수의 이능 연습을 신기한 기색으로 구경하면서 근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군인은 칸의 손짓에 곧장 반응했다.
"내려가서···."
그리고 칸은 그런 군인에게 무어라 말을 전했고 군인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수였던 그 군인은 이어서 부사수에게 간단하게 말을 남긴 뒤 근무지를 이탈했다. 칸이 뭔가 시킨 모양이다.
"일하는 군인을 심부름꾼으로 써도 되는 거예요?"
"보통은 안 되지. 근데 나는 된다. 나는 여기 VIP거든.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이 오히려 저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난쟁이 칸. 그는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며 으스댔다.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몸을 돌렸다. 그와 한가롭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각은 없지 않은가.
대화보다는 4번째 시도를 할 차례였다.
이번에는 방금 만들어낸 두께를 유지하고 그 안에 힘을 좀 더 많이 담는 느낌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까가가강!
아래에서 위로.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땅을 파내듯이 올려 쳐서 그런지 둔탁한 금속 소리가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변으로 퍼진다.
그래서일까.
드드드!
엉성한 원이 아닌 사각 기둥들이 땅에서 솟아나며 위력적인 기세로 전진하는 중이었다. 마구잡이로 치솟는 기둥들은 간혹 자기들끼리 뒤엉키며 부서지기도 했으나 그 정도는 이전과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
4번째 시도 전까지 만들어낸 기둥이나 가시들은 서로 부딪치는 순간 가루로 변해 폭삭 주저앉았는데 이번에는 서로 부딪혀도 허무하게 가루로 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록 두께가 3번째 시도에서 만든 팔뚝만 한 두께가 아닌 손가락만한 두께이고, 내부도 꽉 차 있는 것이 아닌 스펀지처럼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지만, 그래도 속을 얼추 차게 만든 것이 어디인가.
시도하면 할수록 확실하게 나아지고 있다는 건 분명 고무적이었다.
저벅-
나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나무뿌리를 노리고 기둥의 위력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아직 위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강하진 않겠지.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전방의 나무뿌리를 목표로 삼은 이유는 최소한 저걸 꺾어야 나무 인간들에게 통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무리라면, 내일도 동일한 목표를 정해서.
최소치의 목표인 뿌리를 꺾는다면 지수가 하는 훈련처럼 난쟁이들이 만들어낸 석재 허수아비를 목표로 정해서.
조금씩 목표치를 높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제련할 수 있는 땅 울림이 매우 강해져 있으리라.
그걸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었다.
5번째 시도.
3차 시도에서 나왔던 두께의 기둥들이 하늘을 때리듯이 튀어나왔고, 그것들은 이내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전진하다가 전방에 있는 나무뿌리를 타격했다.
그와 동시에.
쿵-!
둔중한 소리가 여의도 공원 공터에 울려 퍼져 빙빙 맴돌았다. 꺾는 소리가 아니라 단순히 뭉개지는 소리였다.
내가 예상한 대로 대단한 파괴력은 없었다. 뿌리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껍질 표면이 살짝 벗겨졌을 따름이었다.
두께와 내구도는 눈에 띄게 올라갔으나, 끝부분이 뭉툭한 것을 넘어 거의 면이었기 때문에 뚫기는커녕 그저 장애물에 가로막혀 전진이 멈춰 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건만. 내가 상상하던 최소보다 좀 더 실망스러운 결과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수확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그동안 모호하게 잡혀 있던 감을 확실하게 잡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겨우 5번 만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나는 재차 푸른 입자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도는 20회차에 갈 때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25차 시도를 할 차례가 되었을 때.
"아저씨, 좀 쉬고 하지 그래? 한 번에 많이 한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이건 마라톤이라고. 장기적으로 봐야지."
"···그래야겠다······."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아내고 있던 지수의 만류에 동의한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건넨 수건을 받은 팔이 달달달 떨리는 것이 보인다.
푸른 입자를 한 번에 많이, 여러 번 다루다 보니 입자의 통로가 되어 주는 뼈와 혈관, 근육에 무리가 간 듯했다. 입자 소묘 효율이 오른 것과 별개로 운용하는 입자의 양이나 속도를 매번 바꾸면서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실험을 한 까닭에 예상보다 무리가 빨리 오게 되고 말았다.
휘이이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나와 지수는 여러 잔해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몸을 숨겨 따가운 햇빛을 피했다.
바로 그때.
"뭐냐? 쉬는 시간이느냐? 마침 잘 됐구나. 간단하게 먹을 걸 가져 왔으니 먹으면서 쉬고 있어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칸이 공터로 돌아오며 물었다. 일을 시켰던 군인과 함께 돌아온 그는 스포츠 음료와 간식거리들이 올려진 쟁반을 하나 들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아침에 챙겨 온 걸 다 마셔버려 가지고 내려가서 좀 챙겨올까 하는 생각 중이었거든요."
기진맥진한 상태라 난쟁이 칸과 군인의 접근을 빠르게 눈치채지 못했던 지수. 그녀는 반색하며 쟁반을 잽싸게 건네받았다.
"어르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냐, 수고했다. 근데 솔직히 입구 앞에서 멍 때리는 것보다 날 따라서 움직인 게 더 편했지?"
"하하···."
군인은 칸의 짓궂은 말에 어색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시 근무지로 돌아가려고 했고, 나는 그를 붙잡았다.
"아, 저기 잠시만요.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어···, 예. 물어보십쇼. 어떤 겁니까?"
"저 가건물 안에 지금 전차 정비 중이잖아요."
"그렇습니다."
"배터리는 어떻게 유지시키고 있는 거예요?"
가건물 내부에서 군인들이 전차 부품에 기름칠을 하며 정비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든 의문이었다.
지금 바깥에 방치된 차량들의 배터리들은 하나둘씩 슬슬 완전 방전이 되기 시작했고, 이미 절반 이상이 완전 방전이 된 실정.
이런 상황에서 약 10대 가량의 전차 배터리를 어떻게 유지시키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 개량 전의 수정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력은 벙커의 시설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지 않았던가.
배터리를 유지시키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전력이 들 터다.
"아, 전차 내부에 배터리 차단 스위치가 있습니다. 그 스위치를 내리면 더 이상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무언가에 의해 전기와 각종 전자 제품들이 먹통이 된 이후에 저희가 바로 취한 조치였습니다. 저희가 전자 제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 기기 안에 담긴 전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
"뭐, 스위치를 내려도 병렬로 연결된 배터리들이 서로 충방전이 되면서 자연적으로 전력이 소모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전차 배터리들이 완전 방전이 되지만 않도록 최소치로만 충전해서 살려 두고 있는 중입니다. 연료가 변질될 것을 감안해서 내부에 든 연료는 미리 빼두었고요."
이런 관리 방법은 최악이며, 배터리의 수명에 악영향을 끼친다라는 걸 알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이렇게라도 배터리를 살려 두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군인의 설명.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덕분에 전차는 아직 제대로 시동이 걸리고, 나중에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매우 큰 전력이 될 테죠. 기갑 전력은 사람에 비할 수가 없으니까요."
"······."
"그러고 보니 행정실에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현우씨 당신이 연구소를 뚫을 수 있다면서요. 그날이 오면 저희 부대가 제일 선두에 설 겁니다."
군인은 가건물 내부에 보관되고 있는 K-2 흑표, K-21 보병전투차량, K-30 비호 복합 등등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차 하단부에는 정비병들이 들어가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내가 무어라 답하려고 할 때.
"애들이 검댕이가 되어 가면서 전차를 매일 닦고 조이는 건 그때를 위해서죠. 미래를 위해서. 뭐, 전차 장갑 특성상 관리를 하루라도 안 해주면 녹이 엄청 쓸어 버리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지수의 쫑긋거림과 동시에 어떤 여성의 말소리가 후방에서 들려왔다. 존재감이 없다가 말소리와 함께 존재감이 드러난 느낌이었다. 뜬금없는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 꼭 고양이 같았다.
"엇, 박 소위님! 충성!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뭐야. 여기까지 다가오는 걸 내가 왜 눈치를 못 챘지?"
우리에게 설명해주던 군인이 그녀를 보자 곧장 경례를 한 것이 그때였고, 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린 것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