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71화 (372/497)

Chapter 371 - 371. 준비 (21)

나도 지수처럼 놀랐다. 코앞까지 다가올 동안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둘째 치고 그녀의 복장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어, 충성. 오랜만이네. 아니, 오랜만은 아닌가? 끽해야 1주에서 2주 좀 넘게 못 본 거니까. 아무튼 지금 잠깐 복귀한 거야. 보고할 게 있어서. 바로 이따가 다시 나갈 거라 짐은 안 푼 거고. 그나저나 시설 많이 좋아졌더라?"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낯선 여성. 그 여성은 온갖 보호구를 착용한 채 등에는 여러 가방을 메고 있었다.

방금 막 돌아왔다는 말을 했으니 내가 모르는 외부 정찰조 중 한 명인 모양이다.

장비가 꾀죄죄한 것에 비해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외견은 말끔한 걸 보니 새롭게 추가된 샤워 시설을 이용한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지수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인식표에 걸린 작은 수정 조각이었다. 다른 장비와 결합하지 않은 수정 조각이 불출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전까지 수정 조각을 외부로 돌린 적이 없다고 했었으니 그녀가 매고 있는 군번줄의 수정 조각은 이번에 새롭게 받은 물건이 맞겠지.

아무래도 그녀가 많이 중요한 인력인 듯했다.

"예. 시설에 변화가 많이 생겼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덕분입니다."

"그건 행정실에서 들었어."

나, 지수, 난쟁이 칸에게 간단한 눈 인사만 하고 군인과 짧은 안부 인사를 끝마친 젊은 여성. 군인을 근무지로 돌려보낸 그녀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고쳐 메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뒤에서 잠깐 들어 보니까 전차 상태에 대해 궁금한 게 좀 있으신 것 같던데, 제가 마저 설명해드리죠."

읏차 소리와 함께 가방을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젊은 여성은 가냘픈 체구와 아리보리색 솜털을 가진 고양이 귀와 검은 털을 가진 일자 꼬리. 전체적인 느낌은 샴 고양이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저런 체구로 무거운 가방을 여러 개나 메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보다 누구━"

"우선 이 비호. 정확히는 비호 복합 버전은 원형과 동일하게 30mm 기관포 2정을 사용해요. 원형과 다른 점은 포탑 양측에 신궁이라는 지대공 미사일이 장착되어 있다는 거고요. 추가로 레이더 탐지 거리가 늘었고, 냉각기 용량이 커져서 좀 더 오래 교전할 수 있게 만들어졌죠."

자기소개도 없이 설명을 시작한 여성을 지수가 말문이 막힌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응시했으나, 여성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은 포탑 뒤로 접혀 있는 레이더가 시동을 걸면 위로 올라오고, 그 탐지 성능이 21km에 달한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자체적인 성능으로 독자 교전도 가능한 모델이며 상위 탐지 체계에 의존하면 더 높은 성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어디까지나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까지의 이야기긴 해요. 레이더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긴 해도 탐지 거리가 확 줄었으니까요. 지금은 기껏 해야 500m 정도 될까요. 이것도 레이더에 수정을 장비해야 나오는 예상치라고 하지만요."

각 레이더에 수정을 장비하지 않는다면 사방으로 쏘아 보낸 전자파를 수신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었다. 엊그제부터 벙커에 레이더를 설치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까닭이다.

지상의 적은 몰라도 대공의 적은 식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현재까지 날아다니는 변종들이 벙커를 습격한 적은 없으나 그건 이제 모를 일이라며.

제법 큰 수정 파편을 사용해야 레이더가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에 수정 여유분이 그리 많지 않은 지금은 기각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덕분에 제 성능을 우선시하는 것보다 최소치의 성능나마 낼 수 있게 작은 수정을 레이더에 배분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전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어디겠어요? 수키로 이상 뻗어지지못하고 고작 몇백 미터에 불과할지라도 레이더 유무가 전장에 있어서 아주 큰 무기인데. 뭐, 무기도 대공 특화이긴 하지만, 이건 그냥 Eots로 조준해서 지상에 있는 괴물들 쏴 버리면 그만인 일이니까."

그녀는 설명을 이어 나가면서 품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입에 물었다.

후우, 소리와 함께 매캐한 담배 연기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콜록! 콜록! 아니, 뭔 갑자기 담배를 펴요? 코 안 불편해요?"

그 연기 냄새를 맡은 지수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몸을 황급히 뒤로 물렸다. 코를 막고, 꼬리털을 바싹 곤두세우는 건 덤이었다.

나와 지수는 사람이 없는 고층 빌딩 구석에 흡연장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공동 주방, 보일러에 이어 일부 사람들의 요청에 만들어진 공간. 벙커 내부에서는 엄금인 탓에 지상에 만들어진 장소였다.

위치상으로는 아래에 수정 발전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건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나는 담배 연기를 피해 물러나는 것으로 잡생각을 치웠다.

"그렇게 달라고 했던 수정을 이제서야 받은 기념으로 피는 거죠. 진짜 오랜만에 피는 거라 몸에서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아주 그냥 짝짝 감기네요."

"···너는 하나도 안 바뀌었구나."

지친 눈으로 담배 연기를 보던 여성의 말에 입을 연 건 난쟁이 칸이었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면서 수염을 흔들었다.

"어르신, 사람은 원래 쉽게 안 바뀝니다. 아시잖아요? 저분은 몰라도 어르신이 불편하시면 담배는 끌게요."

"나는 네 눈을 말하는 거다. 바깥을 나가면 눈빛이 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눈빛이 더 죽었어."

"······사람 쉽게 안 바뀐다고 했잖아요. 아무튼 전차에 대한 궁금증은 좀 풀리셨을까요? 소개가 늦었네요. 반갑습니다. 전차 부대 소속 소위 박지영이라고 합니다. 우리 직접 보는 건 처음이죠?"

무어라 중얼거린 박지영 소위는 칸에게 답하지 않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답을 하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었다.

"아, 예. 박 소위님. 저는-."

"아니,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이제 더는 전차 부대 소속이 아니니까. 반갑습니다. 1차 작전 생존자 중 한 명인 소위 박지영입니다."

박지영은 입에 문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군화로 비며 불을 껐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사람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사. 악수였다.

"······!"

나는 박지영이 한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최명철에 이어 1차 작전 생존자를 연달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사람이 여군이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반갑습니다. 이현우라고 합니다."

여전히 작은 손을 내밀고 있는 박지영. 나는 그녀의 손을 서둘러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누군지 정도는. 제가 다시 외부로 나가기 전 이곳에 온 건 행정실에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온 거거든요. 너무 믿기 힘든 이야기들뿐이라서요."

박지영은 나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이라 했고, 뒤이어 그녀는 자신을 외부 정보 수집조라고 소개했다. 얼마 전에 아르마딜로 변종에 대한 정보를 벙커에 알려 준 것이 그녀였던 것이다.

지금 내 눈앞의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당신을 아직 믿지 않아요. 아니, 정확히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바로 믿을 수 있겠어요? 그 지옥을 만들었던 연구소 문을 당신이 열 수 있다는 것을요. 저희가 무슨 수를 써도 열리지 않았던 문인데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당신이 악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악마는 인간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순간에 손을 건네니까."

소원의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쟁취해내야만 하는 것이 있을 때, 말을 거는 것이 악마이지 않느냐, 라는 박지영. 그녀는 지금 자신이 그런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런 순간에 벙커에 활로를 불어넣어주는 나는 악마이고.

물론,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이니 그냥 흘려 들으라는 말을 전하는 그녀였다.

"······."

"안개가 사라진 것도 당신이 한 일이고, 수정 발전기를 개량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신 덕분이고, 그 덕분에 시설이 좋아진 것도 당신과 연관이 있고. 제가 자리를 비운 건 고작 일주일을 조금 넘겼을 뿐인데, 참 많은 일이 있었더라고요."

안개가 벙커를 덮치기 직전, 안개의 전진 속도를 조금이나마 느리게 만들 무슨 방도라도 구하기 위해 안개 속으로 들어갔었던 그녀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안개가 사라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다.

내가 칼카타와 함께 안개의 진원지에 있던 거대한 꽃을 없애는 순간이 공교롭게도 그녀가 외부로 나가 있었던시기와 겹쳤던 모양이다.

"그런데 제가 여기 와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저를 가장 크게 놀라게 하는 건 따로 있어요. 명철이가 그 지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유인 장치인가 뭔가 하는 걸 설치하는 임무에 자원했다는 걸 듣고 저는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니까요?"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최명철씨가 그 임무에 자원했다는 게요. 뭐, 복수라든가 그런 거로 나갈 수도 있잖아요."

근무 시간에 나, 한세아, 최명철이 나눴던 이야기를 대강 듣기만 했던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최명철이 무슨 마음가짐으로 임무에 자원했는지까지는 몰랐다.

"그야 당연히 이상하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랑 명철이는 알고 있거든요. 눈앞에서 지옥이 뭔지 보고 나서야, 그 지옥을 바로 앞에서 본 이후부터 깨달았어요. 제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나서라는 건 정말로 좆 같은 소리라는 걸요."

박지영은 불이 꺼진 담배를 보더니 품속에서 담배 하나를 더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숨을 깊게 빨아들였고, 천천히 길게 내뱉었다.

허공에 휘날리는 하얀 연기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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