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72화 (373/497)

Chapter 372 - 372. 준비 (22)

박지영의 말은 얼핏 다른 누군가가 최명철에게 나가라고 등을 떠민 것이 아니냐, 라고 들릴 수 있었다. 어쩌면 실제로도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아무래도 그녀는 나를 의심하는 모양이다. 내가 그에게 위험한 임무를 나가라고 부추겼다고 말이다.

"지금 아저씨를 의심하는 거에요? 뭔가 그런 느낌이 드는데."

지수도 그런 느낌이 든 것인지 팔짱을 착 끼며 물었다. 그녀의 꼬리가 상대를 위협하듯이 일자로 섰다. 꼬리털을 살짝 부풀리는 건 덤이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어요. 명철이가 바보도 아니고, 누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걔가 주먹부터 날렸겠죠. 의도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당신들이 벙커를 위해서 한 일이 이렇게 버젓이 증거로 남아 있기도 하고요. 이런 사람들을 의심한다는 건 제 성미에 안 맞아요. 그냥 믿고 말지."

자기 말투가 조금 까칠한 면이 있다면서 사과한 박지영. 그녀가 아이보리색의 머리칼을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하나에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이 명철이와 나눈 이야기를요. 그거면 돼요."

"······."

박지영 소위는 내가 최명철과 같이 동반 근무를 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긴, 모를 수가 없겠지.

행정실에 비치된 근무 일지에 내 이름이 그의 이름에 나란히 붙어 있을 것이고, 최명철과 친분이 있는 박지영이었기에 그와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 테니까.

"최명철씨는 제게 과거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고, 하나둘씩 입에 담아 박지영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1차 작전 당시의 상황, 세계수를 지키는 수호목인 나무 거인, 부상자를 후방으로 이송 시킨 것, 그의 사수였던 장 하사가 목숨을 걸고 최명철과 다른 군인들을 퇴각시켜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매일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대부분은 박지영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 또한 1차 작전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명철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개인적인 결심 같은걸 알지 못했던 그녀는 내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묵묵히 들어 주었다.

중간에 난쟁이 칸이 다른 난쟁이들에게 잡혀가는 일이 있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칸이 지금까지 쉴 수 있었던 건 다른 난쟁이들의 용인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지수는 칸을 순순히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

"하,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명철이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나한테는 그냥 괜찮다고만 했으면서. 이 멍청이가."

일련의 이야기를 들은 박지영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묘하게 서운한 기색을 풍기는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최명철씨가 박 소위님에게 별말 안 했어요? 평소에 자주 했던 말이라던가."

"···네. 무슨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으라고 종종 묻긴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항상 자기는 괜찮다라는 말뿐이었어요. 제가 못 미더운 걸까요. 아니, 못 미덥겠죠. 항상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데 누가 절 믿겠어요. 속으로 골칫덩이라고 생각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리 말한 박지영은 검은 테두리가 있는 동물 귀를 축 늘어트렸다. 검은 고양이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최명철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이런 상태가 된 그녀는 땅을 파고들 기세로 한숨을 재차 내쉬었다.

"······."

"······."

나와 지수는 서로 곁눈질하면서 당황한 시선을 보냈다.

박지영을 만난 것이 오늘이 처음이고, 최명철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그다지 없었던 탓에 그들이 서로 무슨 사이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생각보다 더 긴밀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일방적인 관계이거나.

내 생각에는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화살표가 최명철에게서 뻗어지는 것이 아닌 박지영에게서만 뻗어지는 쪽이었다. 그도 그럴게, 눈앞의 박지영은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으니까.

아이보리색 머리칼, 검은 솜털 테두리를 가진 고양이 귀, 뒤에서 살랑거리는 꼬리, 바다를 품은 눈, 하얀 피부.

다크 서클이 좀 짙어서 바다가 좀 음침하게 보인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전체적으로 보기에는 매력적인 여성에 가까웠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이성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내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튼 최명철에게서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애틋함이 박지영에게서 느껴지고 있었기에 후자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것도 애틋함의 강도가 꽤나 강했다.

"어···, 그. 최명철씨는 박 소위님을 존경하는 것 같던- 아니, 존경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처럼 가만히 버티는 것이 아닌 주저앉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골칫덩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어요."

"······명철이가 그렇게 말했어요?"

내 말에 고개를 휙 드는 박지영. 그녀는 크흠, 큼! 헛기침하면서 작게 말했다. 묘한 기대감이 담긴 물음이었다.

"네, 확실하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명철씨가 박 소위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랑 위험한 임무에 자원해서 나간 것 둘 다요."

"······."

그녀는 고양이 귀를 살짝 쫑긋거리면서 내 말에 집중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박 소위님이 말했듯이 최명철씨는 바보가 아니잖아요. 최명철씨는 박 소위님처럼 본인의 선택으로 나간 거예요.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요."

나는 박지영에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최명철은 다른 누군가가 떠밀어서 억지로 임무를 맡은 것이 아닌 오롯이 본인의 의지로 자원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날 본 그의 눈은 아주 확고한 결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러네요. 제가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저도 제 선택으로 나가는데 명철이라고 다르진 않을 테죠···. 아니, 오히려···."

박지영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내 칸이 만들어 주고 간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구름이 둥둥 흘러가는 하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박지영은 한동안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시간이 상당히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던 부분이지만, 저는 죽을 각오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져와요. 아니, 죽을 각오가 아니라 죽일 각오로요. 죽는 걸 상정한다는 건 패배를 인정한다는 거잖아요."

"······."

"명철이가 말했던 것처럼 저희는 더 패배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렇게 결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가 그렇게 못 살아요. 당한 건 반드시 되갚아준다는 게 제 모토라서요. 제가 어떻게 되든 괴물 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일 거예요. 벙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여기서 주변을 경계하는 명철이가 더 위험해지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안개가 사라지기 전부터 계속 외부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위험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을 텐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조사를 이어 나가셨던 거군요."

"풋, 마음가짐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제가 좀 더 움직이면,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그냥 제가 좀 더 힘들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좀 더 마음 놓고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활동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결과를 얻지도 못했는데요 뭘."

박지영은 자기 발버둥을 대단한 말로 포장하지 말아 달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장난스레 킥킥 웃는 모습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쓴웃음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위험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다른 사람에게 남을 도우라는 말을 듣는 것이, 다른 사람이 남에게 도우라고 눈치를 주는 모습이 싫은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정작 본인은 안전한 곳에 있는 주제에 남을 낭떠러지로 미는 꼴이니까요. 처음 명철이가 후암동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현우씨가 그런 사람들처럼 명철이에게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은 줄 알았어요. 오해해서 죄송해요.

"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에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전한 박지영.

"아뇨,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중한 사람이 그럼 위험한 임무에 나갔다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화가 날 테니까요. 이해합니다."

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한 말에 박지영은 순간 꼬리를 일자로 세우며 몸을 바싹 굳혔다. 그와 동시에 당황한 듯 말을 다다다다 쏘아냈다.

"네? 소중한 사람이요? 누가요? 명철이가요? 아닌데요? 누가 그래요?"

사실상 자진 고백한 것과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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