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73화 (374/497)

Chapter 373 - 373. 준비 (23)

"뭐에요.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 몸짓을 본 지수가 의뭉스레 물었다. 물론, 어투만 그러할 뿐 얼굴에는 장난기가 한가득 있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본 것처럼 그녀의 꼬리가 티 나지 않게 흔들린다.

"아, 아닌데요? 사람 몰아가지 마시죠?"

"아니~ 저는 계속 말 끝마다 명철이가, 명철이가~ 하길래 제발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줄 알았죠. 티를 팍팍 내셔서 모른 척 할 수도 없게 하셨잖아요?"

"······."

박지영은 지수의 말에 제대로 된 반론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잠시 되새기던 그녀는 이내 얼굴을 확 붉혔다. 말버릇처럼 나온 그 명철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오, 얼굴 빨개졌다.'

나는 그녀의 낯빛을 보면서 속으로 킥킥 웃었다. 뭐랄까. 살짝 죽어 있던 눈이 한순간에 생기를 되찾고, 일자 꼬리가 바싹 굳은 모습은 참 볼 만한 광경이었다.

이대로 좀 더 놀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지수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찔렀다. 그녀의 행동은 박지영이 보지 못 하는 시야각에서 이루어졌다. 자기 말이 무시당했던만큼 괴롭히자, 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니, 뭐. 아니라면 됐어요. 저희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이상형이 뭔지 이야기 나눴던 것 같은데 이건 지금 말할 필요가 없었네요."

나는 그런 지수의 신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입가에 맺힌 웃음기를 감추기 위해 헛기침하면서.

"···네? 그런 이야기도 나눴었다고요?"

"박 소위님도 군인이시니 아시잖아요. 근무 설 때 온갖 주제 다 나오는 거. 그때 잠깐 지나가듯 나온 거에요. 근데 이건 왜 물어보세요? 관계도 없는 사람 붙들고 다른 사람 이상형에 대해 말하는 건 좀 이상하니까 그만두죠."

"······아뇨."

박지영은 여러 고뇌에 시달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 매우 작았던 말소리는 그녀가 고개를 확 든 것과 동시에 커졌다.

"알려주세요···! 뭐라고 했는데요?"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라면서요."

"아니···! 아니, 그. 그냥 좀 알려주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나중에 놀릴- 아니 상담할 때 써먹을 수 있을지······!"

"에이, 간부가 되어서 병사를 놀리면 쓰겠습니까."

"놀리는 게 아니라 사, 상담할 때 쓴다고 했잖아요!"

순순히 입을 열지 않는 나를 보며 발끈하는 박지영. 그녀는 손을 쥐었다 피며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대 칠까 말까 고민하는 모양새에 더 가까워 보였다.

옆에서 깔깔 웃는 지수는 박지영이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저기 군인 언니, 그럼 이렇게 할까요?"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킨 지수가 손뼉을 치는 걸로 나와 박지영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박지영의 굳어 있는 꼬리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본인한테 아무리 물어봐야 사실을 말하진 않을 테니 아저씨가 군인 언니 꼬리에 말해주는 거죠. 지금 이야기 듣고 싶다면 마구 살랑거려라! 이런 식으로요."

"그게 뭔 소리야?"

나는 황당한 얼굴로 지수에게 물었다. 놀리는 건 이쯤하고 그냥 말해주면 될 것 같은데 굳이 그 조건을 추가한 영문을 모르겠다. 아이들끼리 소꿉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꼬리는 진실을 알고 있거든. 바로 저렇게."

지수는 재차 박지영의 꼬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정확히는 마구 살랑거리는 꼬리를 강제로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는 박지영이었다.

"아니, 좀! 가만히 있어···! 나는 안 궁금하다고···!"

양손으로 꼬리를 제압한 박지영이었으나, 꼬리 또한 만만치 않은 기색이었다. 양손으로 잡아도 꼬리의 상단부가 남을 정도로 꼬리가 손 두 개를 합친 것보다 길었기 때문에 꼬리는 아직 제압당하지 않은 꽁지를 마구 돌렸던 것이다.

위에서 박지영이 변명한 건 전부 거짓말이고, 사실 최명철의 이상형이 뭔지 매우 궁금하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꼬리였다.

그리고.

"······아."

그럼 그렇지 하는 시선을 보내는 지수와 눈이 마주친 박지영은 최후의 단말마를 내뱉었다. 처음에 극구 부인했던 그녀는 결국 자기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는 꼬리에 의해 진실을 들키고 말았다.

"······."

"······."

말없이 이어지는 침묵에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는 박지영의 얼굴. 그녀의 눈가에는 한계까지 다다른 창피함이 만들어 내는 눈물이 순간 글썽였다.

"이···! ···에휴,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알려주세요···. 뭔데요, 명철이가 좋아하는 타입이."

박지영은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원래 내지르려던 소리를 삼키고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패배 선언이었다.

"이거 꼭 뭔가 제가 대단한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졌네요. 듣고 화내지 마세요?"

나는 막상 장난을 끝낼 타이밍이 오자 내가 내놓을 답이 시원치 않다는 걸 문득 깨닫고는 입 열기를 망설였다. 정말 별것 아닌 단순한 키워드 몇 개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나아요···. 아니면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데 한번 떠보려고 거짓말 한 건 아니죠? 그럼 저 진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전 지금 모든 걸 내려놨다고요. 진짜로 모든 걸 내려놨어요."

"에이, 이런걸로 거짓말을 왜 해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다시금 생기를 잃고 다크 서클이 짙은 눈으로 돌아온 박지영의 모습에 나는 서둘러 말해주었다. 동반 근무를 설 당시에 최명철에게 들었던 호에 가까운 여성 타입은 담배를 피지 않는 것, 순한 눈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는 내용을 말이다.

"···담배 안 피는 여자가 좋다고 했다고요? 에이 씨."

일련의 이야기를 들은 박지영은 습관적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곧장 바닥에 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담배 꽁초에 남은 불씨를 끄기 위해 신발로 마구 짓이겼다. 그녀가 신발을 떼자 담배 꽁초는 원래 형체도 찾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이래서 인터넷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담배 피는 여자가 섹시하다고 한 새끼들 진짜 주먹 날리고 싶네. 그리고 순한 눈매는 그렇다 쳐도 웃음이 예쁜 여자는 또 뭐야."

담배를 괜히 배웠다고 투덜거린 그녀는 이어서 가방에서 작은 손거울을 하나 꺼내더니 자기 얼굴을 비추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지수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다.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입을 조금이라도 열었다가 무심코 웃음소리를 낼 것 같았던 것이다.

박지영의 중얼거림이 웃긴 것도 있었지만,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녀가 거울을 보면서 억지웃음을 짓는 게 아주 우스꽝스러웠으니까.

웃는 모습이 저렇게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부스럭-

거울을 통해서 우리와 눈이 마주친 박지영은 슬그머니 거울을 가방으로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지수의 소신 발언이 이어졌다.

"저기,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애들 앞에서는 그렇게 웃지 마세요."

"···무슨 의미에요? 애들이 울 정도로 제 미소가 끔찍하다 그거예요?"

"아니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억센데요. 그냥 애들이 놀릴 것 같아서요···. 군인 언니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

짐짓 예민하게 반응했던 박지영은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을 지었다. 지수에게 장난기가 있었다면 뭐라도 말이라도 해볼 텐데, 지수는 순수하게 걱정을 표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듯했다.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선의의 거짓말이 존재하는 이유는 순수한 진실이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박지영의 귀와 꼬리가 조금 전까지 신나게 쫑긋거리고 살랑거렸던 것이 무색하게 현재는 축 늘어져 있었다. 지금 자기가 매우 큰 슬픔에 빠져 있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 그녀였다.

"에, 에이! 장난이예요. 장난! 군인 언니, 다크 서클만 좀 지우면 진짜 이뻐요. 지금은 눈빛이 너무 죽어서 웃음이 어색하게 보이는 거겠죠!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요!"

자기 실책을 깨달은 지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도 화장만 잘하면 다크 서클 정도는 지울 수 있다고 끊임없이 박지영을 다독였다.

"···저는 화장 잘 못 하는데요."

"주변에 아는 사람 없어요?"

"저 알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명철이밖에 없어요···."

"···아까 이야기 나눴던 군인은요?"

"걔는 그냥 병사죠···. 이름은 명찰을 봐야 알고 얼굴만 간신히 기억하는 같은 부대 병사. 그리고 걔는 남자잖아요."

그 군인이 화장을 잘할 것 같지도 않고, 가깝게 알고 지내는 다른 여성 친구도 없다는 박지영의 말. 날카로웠던 첫 인상을 가진 젊은 군인은 어디 가서 사라지고, 어느새부터인가 무슨 외톨이 한 명이 우리 눈앞에 있었다.

하악질하는 경계심을 한 꺼풀 벗겨 내고 보니 그 안에 있던 게 야생의 전사가 아니라 쭈구리였던 길고양이 같았다.

"진짜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네. 없어요."

"아, 원래 있었는데?"

"원래도 없었어요···."

"뭔 사람 인간관계가- 아니, 이게 아니고 그럼 제가 화장 잘하는 사람 구해 올게요!"

지수는 번번이 실패하는 위로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럼에도 굴하지 않았다.

내가 끼어들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인 것 같아서 나는 그저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지수와 박지영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관망할 뿐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말 조심 해야 한다는 거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고.

"저 화장품도 없는데요."

"네? 가방은 탐사할 때 메는 거라 화장품이 없다 쳐도 방에는 왜 없어요?"

"저 방이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방이 왜 없어요. 왜 이렇게 없는 게 많아!"

"뭔가 배수진같은 느낌을 받고 싶어서···."

"······그건 또 무슨 소리- 후우. 이해는 안 가지만, 그래요. 방이야 뭐 새로 달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로션같은 건··· 이것도 보나마나 없겠네요."

생각지도 못한 답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은 지수는 애써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며 중얼거리면서.

이거 봐라.

나도 같이 놀리기는 했지만 더 앞서 나가지 않은 덕분에 저 무한의 굴레에 갇히지 않을 수 있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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