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4 - 374. 준비 (24)
"아무튼, 나중에 도와줄 테니 그만 침울해 해요. 한번 놀렸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삽시간에 피곤한 눈가를 가지게 된 지수가 그리 말하자, 박지영은 침울한 기색을 상당히 벗어 던지게 되었다.
그녀는 몸을 움찔 떨면서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얼굴을 애써 태연함으로 가장했고, 원래 자기 첫 인상인 날카로움을 되찾으려고 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여전히 그녀의 꼬리가 난리를 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여전히가 아니라 다시금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지수가 여러 난관에도 굴하지 않은 모습에 안도감 혹은 만족감이 든 모양이다.
결국 그런 꼬리에 의해 박지영의 속내가 재차 드러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휴, 이놈의 꼬리는 제 말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뭘 숨기지도 못하고."
불만스레 투덜거리는 박지영. 그녀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려 바라본 꼬리는 본체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좌우로 휙휙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뭐 있어서 창피한 적은 많았어도 나쁜 일이 있었던 적은 없던 것이 꼬리랑 귀 덕분이기는 하지만요."
"꼬리가 있다는 건 무슨 느낌이에요?"
나는 어느새 내 팔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지수의 꼬리를 보며 물었다. 예전에 지수에게 물어본 질문이었으나 다른 사람의 감상을 한번 듣고 싶었다.
"무슨 느낌이냐고요? 음···. 간단하게 말하면 제 마음과 직통으로 연결된 무언가?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걸 도와주기도 하고요. 그 외엔 별다른 느낌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가. 어쩔 때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가 다리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새삼 놀라기도 해요."
박지영은 지수가 했던 답과 거의 동일한 답을 내놓았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지수는 꼬리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수는 박지영의 고양이 꼬리와 다르게 살짝 복슬복슬한 꼬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살랑살랑-
"꼬리 좀 가만 놔둬, 지수야."
날이 조금 추워져서 그런지 지수의 꼬리는 좀 더 복슬복슬해진 상태였다. 그런 꼬리가 옆에 앉은 나를 계속 간지럽히고 있었기에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싫어. 그리고 아저씨도 알잖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 그냥 두면 알아서 만족하고 그만두겠지."
내가 간지러움을 참다 못해 거리를 벌리면 냉큼 붙어 오는 주제에 그리 말하는 지수였다. 꼬리는 몰라도 본체는 본인이 통제할 수 있지 않나.
"후우···."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지수의 꼬리를 붙잡았고,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만족의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
그와 동시에.
"힉!"
순간 지수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는 입을 달싹거리면서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그 말이 끝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지수는 내게 찰싹 더 붙어오며 몸을 기댔고, 꼬리가 만져지는 감각을 즐기기 시작할 뿐이었다.
"···무슨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이 꼬리를 만져 주는 건."
박지영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자기 꼬리를 본인이 직접 만져도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냥···. 나른해져요. 살살 만져 주면요···."
"살살 만져 주면? 그럼 강하게 만져 주면요?"
"뭘 물어요. 그냥 그 날은 다 끝나지. 군인 언니는 지금 말해 줘도 몰라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예전과 같았지만, 현재는 어느 정도 그 감각을 즐길 수 있게 된 지수는 눈까지 감은 채 박지영에게 답했다. 이제 그녀가 겉으로 드러내는 반응은 종종 쫑긋거리는 귀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네.'
그 날이 끝나긴 뭘 다 끝난다는 말인가. 나는 지수의 말에 기가 차서 그녀의 꼬리를 쓸어내리는 강도를 최대한 약하게 만들었다. 아직 강하게 잡을 때가 아니긴 했으니까.
"그냥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알려주기 싫으면 됐어요. 나중에 명철이한테 만져 보라고 하면 되니까."
"당사자랑 합의된 사항인가요?"
꼬리를 만지는 행위는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서로 허락하지 않는 행위로 자리 잡은 것이 현 상황이다. 나와 지수는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이곳 세마 벙커에서는 그런 문화로 형성된 걸로 알고 있었다.
"···합의라고 할 정도까지 아니잖아요? 그냥 꼬리 한번 만져 보라고 하는 건데. 정 필요하면 합의야 뭐 그때 보면 되죠."
역시 협소한 인간관계를 맺은 군인 여성 아니랄까 봐. 이런 면에서는 의도치 않게 대담한 모습을 보여주는 박지영이었다. 나중에 그녀의 요청을 들은 최명철이 당황하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어찌 보면 모르는 것이 약일 수도 있다고 오히려 그런 문화를 모르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다행일 수 있었다. 눈 딱 감고 저지르면 나머지는 주변 상황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최전방에 있는 벙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유지될 수 있었는지."
박지영은 말을 얼버무리는 나와 지수를 보며 뚱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화두로 올렸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걸 보니 우리가 자세한 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처음 왔을 때는 놀랐죠. 생각보다 벙커 분위기가 괜찮아서요."
그게 놀랍기는 했다. 보통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몰리게 되면 자연적으로 여러 불화가 생기기 마련인데 세마 벙커는 그런 불화들이 현저하게 적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게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더 좋았으면 좋았지.
특히나 눈치를 귀신같이 채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우리를 안도케 하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뛰논다는 건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야 했고, 상황이 최악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모습이었으니까.
"답은 간단해요. 이 귀랑 꼬리 덕분이에요. 벙커가 이렇게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요."
박지영은 지수의 귀와 꼬리, 본인의 귀와 꼬리를 가리켰다. 그녀는 예전의 현대인과 현재의 사람이 달라진 점들을 입에 담았다.
우선 예전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서로 달랐다는 것. 이 점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했다.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만으로는 속내를 알 수가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이런 것들은 점점 쌓여서 불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는데 현재는 꼬리와 귀가 하나의 해결책이 되었다고 했다.
위 두 문제를 완화시켜 주는 꼬리와 귀가 있다는 것. 기분이 좋으면 춤추는 꼬리와 기분이 나쁘면 축 늘어지는 귀가 없었다면 아마 벙커가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을 거라며 말하는 그녀였다.
한 마디로 벙커가 지금 같은 분위기가 될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표현에 있어서 솔직해진 덕분이었다. 무표정인 사람도, 감정을 얼굴에서 숨기는 사람도, 표현이 인색한 사람도 귀와 꼬리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게 변하고 말았으니까.
그 솔직함을 바탕으로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 세마 벙커였다.
"자꾸 지난 이야기 꺼내서 미안하긴 한데, 제가 처음에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못했던 건 그 때문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와 달리 여전히 예전 인간의 모습이라고 했었거든요."
"······."
나는 다른 사람들과, 지수, 예린과 달리 동물 귀와 꼬리가 없었다. 물론, 벙커에는 한세아처럼 귀와 꼬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 대부분은 날개가 부상으로 인해 떨어졌거나 변이가 온전하게 일어나지 않은 케이스였기에 지금 나와 비교할 수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까 알겠어요. 이현우씨 당신은 믿을 만 한 것 같아요."
"제 뭘 보고요?"
"당신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 사람을 보는 눈, 벙커 이야기에 바뀌는 당신의 표정, 명철이 이야기에 미처 감추지 못한 시선이 발하는 감정, 전차를 관리하는 병사의 말을 듣는 당신의 모습. 이런 걸 다 포함해서요."
-고양이와 합쳐져서 그런가 저 사람 보는 눈이 좋아졌거든요. 안목이라기보다는 감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킥킥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박지영은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 슬슬 나가 봐야겠어요. 이 정도면 많이 쉬기도 했고."
"나간다고요? 오늘 돌아오셨잖아요? 게다가 시간도 애매해서 나가기에는 좀 늦은 거 아니에요?"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언제 돌아왔는지랑 현재 시간이 언제 인지 관계없이 나가야죠. 아르마딜로 변종 그 녀석이 언제, 어떻게 움직이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여기가 안전해지니까요."
박지영은 새로 지급받은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수정이 박힌 그것은 벙커 본부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녀가 곧장 통신해서 상황을 알려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장비였다.
바로 그때.
"군인 언니, 나가는 게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지수가 기지개를 쭉 키면서 물었다.
"무섭죠. 무섭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도 나가야죠. 정확히는 제가 나가야죠.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 일을 괜히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고요."
"······."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상한 능력 같은 게 생겼더라고요. 살금살금 움직이면 다른 괴물들이나 사람들이 저를 눈치 못 채요."
그녀는 우리가 보는 눈 앞에서 순식간에 기척을 지웠다. 분명 눈으로 직접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이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지수는 감각에 혼선이 오는 듯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원래 제 의지대로 컨트롤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 이 수정 조각을 받은 순간부터 제 생각대로 조절이 가능해졌어요. 덕분에 정보 수집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것도 당신 덕분이네요. 고마워요."
처음에 박지영이 나와 지수에게 기척을 지우고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능력 덕분인 모양이다.
"제가 좀 더 움직이면,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서 믿어서 나가는 것도 있어요. 이번에 당신을 만나서 그 생각은 더 강해졌고요."
세상을 다시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열쇠가 있는 연구소, 그 연구소 정문을 열 수 있는 나.
"저는 사람들의 목숨이 얼마나 허무하게 스러질 수 있는지 알아요. 저는 그런 목숨들을 살리려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만약 정보가 모자라서 당신이 다치거나 죽으면? 마찬가지로 명철이나 벙커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으면? 그때 후회하면 늦어요. 우리는 바보가 아니에요. 저도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당신은━"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 오는 각종 문제들,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 따위는 없다는 그녀의 말.
"우리를, 살려주세요."
박지영이 내 어깨를 툭 건드리며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