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5 - 375. 준비 (25)
"부탁할게요. 그 지옥을 없애주세요. 가기 전에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자신도 목숨을 걸고 죽일 각오로 외부의 정보를 가져올 테니, 나도 목숨을 걸고 죽일 각오로 움직여달라는 박지영. 그녀는 내게 당신을 우리에게 무얼 줄 수 있냐고 그리 묻고 있었다.
두려워도 사지로 나아가려는 그녀의 눈은 최명철이 했던 눈과 동일한 눈이었다. 비록 그 눈을 둘러싼 형태는 달랐지만, 눈이 담고 있는 것 하나만큼은 똑같았던 것이다.
그 안에 담긴 건 불씨였다.
거센 바람을 피해 인식표 더미 안에 숨어 불씨를 꺼지지 않게 간직하고 있던 최명철이 한순간 내보였던 불씨, 끊임없이 움직여 주변에서 정보를 구해와 불씨를 꺼지지 않게 피워내고 있던 박지영이 발하는 불씨 말이다.
"······박 소위님. 아니, 박지영씨는 최명철씨랑 닮았네요. 눈이."
뜬금없는 내 말에도 박지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이 샐쭉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귀가 한차례 쫑긋거렸고, 꼬리가 두어 차례 살랑거린다.
"그런가요? 뭐,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 건가 보죠."
박지영은 그 말을 끝으로 정보 수집을 위해 다시 장벽 바깥으로 나갔다. 무거운 가방들과 새로이 얻은 장비를 가지고서.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는 떠날 때도 마찬가지로 첫 만남과 동일하게 훌쩍 떠났다. 그녀는 완전히 나갈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몸을 돌리면 미련만 생긴다는 것처럼. 그녀에게 있어 배수진이라는 말이 그런 것이었을까.
"첫인상은 좀 그랬고, 중간에도 좀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네. 응,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박지영에 대한 지수의 감상평이었다. 그녀는 온갖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박지영을 좋게 보고 있었다.
"그러게."
나도 지수의 감상에 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 요소가 산재한 외부로 나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로 그런 의지를 드러내는 건 쉽다. 허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나와 지수는 그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바깥에서 여정을 했고, 역경을 넘어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미지로 가득한 앞을 향해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단순히 앞만 보고 걷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하물며 박지영은 홀로 움직이지 않나. 위험에 처해도 같이 다니는 일행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그때.
쫑긋!
살짝 처져 있던 지수의 귀가 순간적으로 위로 솟았고, 그녀의 고개가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 온다. 근데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인데? 발소리에 기운이 없네."
"···그런 것까지 느껴져?"
"아니, 뭐. 평소에는 기운 차게 걸으니까 그 차이를 아는 거지."
나와 지수는 우리를 보자마자 다다다 뛰어오는 엘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어깨에 활을 비스듬히 맨 채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화려한 금발이 뒤로 퍼지며 흔들린다.
"우리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천천히 걸어와도 되는데 왜 이렇게 급하게 뛰어왔어."
"지수 언니랑 현우한테 빨리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수의 걱정스러운 타박에 멋쩍게 웃은 엘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다는 지수의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것일까.
"뭔데? 정령들 어디로 갔는지 찾았어?"
그리 생각한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시원치 않았다.
"아뇨, 정령들은 찾지 못했어요. 대신 흔적은 찾았어요."
엘리는 품속에서 작은 돌 조각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내밀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당장 시선을 아래로만 내려도 찾을 수 있는 그런 돌 조각이었다.
"······돌멩이 아니야?"
"······!"
지수는 이것이 뭔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엘리가 왜 이것을 내밀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가 단순한 돌멩이를 보여 주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반지에 푸른 입자를 주입하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내민 돌 조각에는 희미하게나마 잔향이 남아 있었다. 바로 정령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입자 말이다.
나는 지수도 내가 본 것을 볼 수 있게 그녀에게 반지를 건넸고, 이내 지수도 내가 본 입자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살랑거리던 꼬리가 움직임을 멈추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물에 깃든 정령이 사멸한 흔적. 우리는 이걸 고향의 용어로 오멘이라고 불러요."
"오멘?"
"무언가의 징조라는 뜻이에요. 보통 정령들은 내구, 수명, 체력이 다 했을 때,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을 자연에 환원을 하고 소멸하는데, 이런 흔적이 남았다는 건 분명 외부의 공격을 받았다는 거거든요."
엘리는 숲지기인 자신에게 있어서 이런 흔적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고향에서는 이런 것들이 발견되는 순간,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숲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공격? 뭐로부터? 이 벙커 안에서, 장벽 안에서 정령들을 공격한 것들이 있다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걸 보자마자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거든요. 자그마한 단서 하나라도 더 발견했다면 뭐라도 더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그런 것조차 나오질 않아서···."
말 그대로 구석구석까지 찾았는지 옷과 머리칼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엘리였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목을 축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지수는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그녀는 바닥을 신발로 탁탁 치면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일단 제 고향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이에요. 정령들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소멸한 것일 수도 있긴 있어요. 제가 지금 뭐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는 건 결국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제 고향에서 배운 지식이니까요. 그걸 토대로 여러 추정은 할 수 있지만, 그뿐이에요."
엘리는 다른 가능성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우리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 칼카타 또한 생태계가 달라진 덕분에 각종 괴물들의 특성들이 달라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외형 자체는 유사한 점이 많더라도 세부 특성 하나하나가 전부 변화했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따라 생태계가 달라진 이상 정령들의 소멸 방식이 변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정이 맞을 가능성은 충분히 컸다.
"혹시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이유는 몰라도 정령들이 자기들끼리 싸운 거지. 그러면 흔적이 안 보이는 것도 설명되지 않아? 애초에 특별한 눈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정령들은 안 보이기도 하고. 정령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이러면 말이 되잖아. 자고 있을 때 사라진 거라면 그것들 움직임을 예린이나 네가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므로 지수의 말도 일리가 영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엘리는 고개를 흔들다가 순간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령들은 서로 싸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체들이라 그건 말이━. ···아니, 이것도 단정 지을 수가 없네요. 혹시 모르니까 이 부분은 제가 좀 더 찾아볼게요. 뭔가를 더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알겠어. 대신 혼자 다니지 마. 나갈 때 다른 군인들이나 우리한테 말해서 무조건 둘이상 같이 다녀. 엘리 네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뭔가 계속마음 속에 걸리는 게 있어서 걱정이 되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지수에게 돌려받은 반지를 손으로 굴렸다. 반지를 이루고 있는 선은 완만한 곡선인데, 내 주변 상황은 완만하게 흐르지 않아서 답답한 심정이었다.
"마음속에 걸리는 거요?"
"네가 눈을 뜬 직후에 외친 말 말이야. 여기에 괴물이 있다고 한 거. 너는 기억 못한다고 했지만 그때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칸이 뜻을 알려 줬거든."
"아."
여전히 그 기억이 나지 않는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는 엘리.
그 말을 들은 뒤로, 지수에게 따로 물어도 보고 내가 개인적으로 벙커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찾아보기도 했으나 끝내 무언가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었다. 그럼에도, 정말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단순히 내가 찾지 못했을 뿐이지.
우연이 계속되면 더 이상 그건 우연으로 볼 수 없지 않나.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철통 같은 보안을 지키고 있는 벙커 안에, 엘리가 외친 괴물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다시 한번 더 벙커 내부와 장벽을 둘러볼 필요성이 있음을 느꼈다.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지금까지 당한 것들이 많았다.
이번엔 연대장에게 우리가 알아낸 것을 말하고, 지수와 함께 세심하게 둘러 봐야겠다. 혼자보다는 둘이서 찾아보는 것이 뭐라도 발견하기에 용이할 테고, 방심은 금물이니까.
부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면 좋겠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