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6 - 376. 준비 (26)
"음···.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훈련 끝나고 돌아갈 때 행정실인가 연대장실 들러서 이런저런 일이 있으니 방비를 더 강화하라고 귀띔해주는 걸로 하자. 이야기만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잖아?"
일련의 이야기를 들은 지수가 고개를 흔들면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내려 둔 도끼를 집었고, 붕붕 휘두르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오후 훈련 시작해야지. 이런저런 이야기만 하다가 벌써 시간이 2시가 넘었다고. 지금 힘을 키워둬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할 수 있잖아. 괴물이든 뭐든 간에 상관없이 우리가 강해져서 머리통을 바로 깨부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맞는 말이다. 요즘은 특히 해가 빨리 지기도 하니 지금 훈련을 시작하지 않으면 모호하게 하루가 끝나버리고 말 거다.
그리고 우리가 강해져야 위기가 닥쳤을 때 대처할 수 있지 않겠나. 구구절절 옳은 말에 나와 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의 반응을 본 지수는 본래 자신이 훈련하던 위치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칸이 떠나기 전 산더미처럼 만들어둔 석재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었다.
비록 지금 난쟁이 칸은 자리를 비워 없지만, 오늘 하루 훈련할 때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쓸 수 있는 양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이내 시작한 것은 그것을 깔끔하게 베는 연습. 여러 각도에서 도끼로 허공을 그었고, 휘두르는 와중에 스파크를 사방으로 퍼뜨려 감전을 통해 일종의 마비 효과를 주는 시도를 해 보기도 했다.
나와 엘리 또한 지수가 그랬듯이 각자 자리로 움직였다.
"좋아요, 현우. 오전 훈련은 잘했어요?"
"어느 정도 감은 확실하게 잡았어. 아직 나오는 결과물이 들쭉날쭉하긴 한데, 이건 계속 연습해서 숙련도를 올리면 되는 문제고."
처음에 노린 결과물은 땅에서 솟는 가시였으나, 오늘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은 가시라고 하기보다는 기둥에 가까웠다. 그래도 난쟁이 칸이 말해주었던 것처럼 외형보다는 내실이 중요하니 당장은 내구도에 집중하는 것이 맞겠지.
"한번 보여 줄 수 있어요?"
"조금만 뒤로 물러나 있어. 혹시 파편이 튈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요!"
엘리는 내 손짓에 맞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녀의 주변에는 여러 크기의 파편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전부 내가 기술을 연습하면서 나온 부산물이었다.
땅을 마구 헤집는 기술. 기둥이 땅에서 솟고, 자기들끼리 얽히며 부딪치는 과정에서 돌 조각들이 나온 것이다. 그걸 수십 차례 해댔으니 상당한 양의 파편이 나오지 않고 배길까.
물론, 땅을 고르게 만드는 것도 힘을 다루는 연습 중 한 부분이었기에 절반 정도의 조각들은 다시 땅 밑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땅 위에 널브러진 파편들이 많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후우···."
나는 살짝 찌뿌둥해진 몸을 이리저리 풀면서 손을 쥐었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휴식을 취한 덕분에 몸에 쌓인 피로가 조금은 풀린 느낌이었다.
그 느낌과 관계없이 여전히 착 달라붙는 도끼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와 동시에 아래로 향한 도끼날을 일자로 죽 그었다. 껍질에 생채기가 가득해진 나무 뿌리가 목표였다.
카가각!
드드드득!
일정한 규격을 가진 사각 기둥들이 매서운 기세로 솟아나면서 앞으로 전진한다. 내가 처음 만들어 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전진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 담긴 힘도 처음과 크게 달랐다.
-쿠웅!
기둥이 나무 뿌리와 부딪힌 순간, 둔중한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뿌리로 돌진한 기둥은 강도가 올라간 덕분에 부서지지 않았고, 올라간 내구도에 힘입어 뿌리에 상처를 남겼다.
비록 아직도 나무뿌리를 꿰뚫을 뾰족함이나 뭉개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이 있지는 않지만, 이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지 않은가.
바로 그때.
"오호···. 이게 현우의 힘···."
내심 만족하는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엘리가 중얼거렸다. 그녀 특유의 긴 귀가 까닥였다.
"···뭐야, 그 말투는."
"알겠어요, 현우의 수준. 이 정도인가요···."
예린과 어울려 다녀서 그런 것일까. 어디선가 자꾸 이상한 말투를 배워서 오는 그녀였다.
"아니, 뭐냐고. 말투. 왜 그러는데. 힘 빠지게."
"현우, 기둥이 사각형인 건 힘을 원으로 깎아 내기 어려워서 그런 거죠?"
엘리는 내 투덜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 돌기둥을 톡톡 치며 물었다.
"어, 그렇지? 아무래도 원의 형태로 뽑아내려면 선을 돌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 억지로 하려고 하면 원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건 좀 원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고."
"난쟁이분들을 기준으로 보면 음···. 그러니까 나이만 이쪽 세상 기준으로 삼으면 한 7살 수준이네요."
"···7살?"
"네. 7살!"
"수준을 좀 더 후하게 쳐주면?"
"그래서 7살!"
"······."
해맑게 웃으면서 똑같은 답을 하는 엘리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꽤 위력적이었는데 이게 7살 수준이라니.
"···그럼 난쟁이 기준이 아니라면?"
"그런 건 없어요! 애초에 방금 현우가 사용한 기술은 난쟁이분들만 쓸 수 있는 기술인 걸요?"
"······."
난쟁이들은 다 괴물만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칸이 오전에 있을 때 나를 보면서 계속 킬킬 웃었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 응용이 미숙해서 그런 건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7살 수준의 힘을 뽐내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는 말이 웃겨서 그랬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나는 오전 내내 칸에게 재롱잔치를 보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였다.
"기운 내요. 연습하면 금방 성장할 거예요. 애초에 오늘 하루 연습해서 이 정도인 거잖아요? 다음에는 10살을 목표로 가 보자구요!"
엘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파이팅 자세를 취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10살······."
"다른 거 또 보여 줄 수 있는 거 있어요?"
"벽이 있기는 한데 이건 7살 수준도 아니라서 보여주기 좀 민망해."
"괜찮아요! 원래 처음은 뭐든 미약한 법이니까요. 그러니 어서 보여주세요."
"···알았어. 보고 놀리지나 마."
나는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삼키고 손을 바닥에 짚었다. 이번에는 힘을 앞으로 쏘아 보내는 것이 아닌 위로 뽑아서 들어 올린다는 느낌으로 땅 울림의 이능을 땅 밑으로 흘렸다.
자석처럼 달라붙은 손을 위로 천천히 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그극-
바닥에서는 두꺼운 벽이 서서히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저 선으로 벽 모양을 깎으면 될 일이었기에 벽을 이루고 있는 면은 맨들맨들한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내구도는 몰라도 형태 하나만큼은 정상적으로 보이는 벽.
"···이건 몇 살?"
나는 그 벽을 보며 내심 떨리는 속을 감췄다. 평가를 받는 입장이 되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점수를 잘 받으면 무슨 상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일단 크기와 형태는 기둥이랑 동일하게 7살 수준이예요."
그리 말한 엘리는 손 위에 바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씩 모이는 바람은 이내 하나의 화살이 되었다.
휘이이이-!
활을 매개체로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위력적인 바람이 주변 흙먼지를 빨아들이면서 회전한다. 흙알갱이들이 바람에 섞여 들어간 덕분에 나는 바람 화살의 형태를 똑똑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회오리 형태인 바람 화살. 그것은 본 엘리는 내가 만든 벽에 그대로 화살을 갖다 대었다. 내구와 강도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카가가가각-
드릴이 석재 벽을 파고드는 소리가 작게 들리다가 점점 강해진다. 벽을 파고 들어감에 따라 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었다.
시이잉-
바람 화살은 엘리가 미는 대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소리가 뚝, 끊겼다. 그저 바람이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뚫을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화살이 벽을 관통한 것이다. 그리 큰 힘도 들이지 않았건만.
"강도는 5살 수준이에요. 많이 연습해야겠어요, 현우."
"조금도 못 버티는 걸 보니까 실전에서 쓰기는 힘들겠네."
나는 구멍 하나 뚫렸다고 금이 쩍쩍 갈라진 벽을 앞으로 밀어 무너트리면서 말했다. 엘리의 바람 화살이 생각보다 강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활을 통해 강화하지 않은 그녀의 화살조차 막지 못한다면, 나무 인간들의 공격이나 변종들의 공격을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괜히 공격을 막겠다고 벽을 세우면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질 수도 있고.
'애초에 막을 수도 없겠지만.'
한 번의 공격도 막지 못한 벽은 오히려 허물어지면서 아군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컸다. 난쟁이 칸이 보여 주었던 예시인 벽에 깔린 병정들처럼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상대해야 할 괴물들 중에서는 체구가 20m를 넘어가는 나무 거인도 있었기에 육중한 무게를 앞세운 공격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거인의 공격을 받아낸다는 건 용기가 아닌 만용이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숙련이 되면서 이능 또한 당연히 강해지겠으나, 우리는 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겠지.
"응? 실전에서 왜 못 써요? 현우가 만든 기둥이랑 벽에 정화의 불을 덧씌우면 엄청 강해질 텐데요?"
사각 기둥을 바람 화살로 또각또각 부수고 있던 엘리가 내 말에 반문했다. 푸른 불을 언급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