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77화 (378/497)

Chapter 377 - 377. 준비 (27)

"같이 사용한다니? 어떻게?"

나는 눈을 끔뻑끔뻑 뜨며 물었다. 왜 같이 사용하지 않느냐, 라는 질문은 어째서 이능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느냐, 라는 물음이겠지.

이건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성질이 다른 두 힘을 한 번에 사용하려고 하면 내부에서 입자들의 이동이 서로 얽히기 때문에 시도를 하지 못한 것이었지.

가는 방향이 서로 다른 입자들이 서로 엉키면 이동 통로를 담당하는 혈관 혹은 근육에 무리가 가고 마니까.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토끼 한 마리는커녕 혼자 넘어져서 다치기까지 할 수 있으니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건 당연한 노릇이 아니던가.

"말 그대로 땅울림으로 만든 사물에 정화의 힘을 어째서 현우가 쓰는 무기처럼 덧씌우지 않는지 물어본 거였는데, 현우 표정 보니까 그건 안 되나 보네요. 음···, 색이 달라서 그런가? 아닌데···, 이건 색이랑 관계없을 텐데···."

"색은 또 무슨 말이야?"

"현우가 쓰는 정화의 힘은 제가 알기로 원래 푸른색이 아니거든요. 정확히는 후대로 이어진 불이 푸른색이고, 처음 그 힘이 나왔을 때는 하얀색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본질은 같아서 하는 역할은 똑같지만요."

"하얀색이라···. 모르겠네. 내가 처음 피워냈을 때부터 불은 푸른색이었거든. 그리고 땅울림으로 만든 것에는 무기처럼 불이 덧씌워지지가 않더라. 아니, 덧씌워지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게 옳겠네."

나는 엘리에게 이능을 동시에 운용할 때 입자의 이동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으음···. 이상하네요. 현우도 알다시피 정화의 힘은 특별해요. 불이 금지된 어머니의 숲에서 피울 수 있는 유일한 불이 특별하지 않다면 뭐가 특별하겠어요? 하물며 그 불이 어머니의 숲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불이라면 더욱 특별하죠."

숲의 오염된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정화의 불. 엘리는 그 불은 오직 오염된 부분만을 불태우고, 지구에 피어난 식물이 내 불에 타는 건 그 이유라고 했다. 지구에 만들어진 어머니의 숲은 오염된 세계수가 만들어낸 숲이니 말이다.

"이 정화의 불은 표면을 불태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물에 깃들어요. 그래야 오염된 내부도 정화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조금 의아한 거에요. 사물에 깃든다는 본질은 대상이 땅울림으로 만들어낸 사물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거든요."

상황이 변할 때마다 바뀌는 것을 우리는 본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엘리.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불이 그렇듯이 정화의 불에는 불을 피워내는 사람의 염원이 담겨요. 작게는 주변이 밝아져서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염원부터, 크게는 이 일대가 전부 불살라지면 좋겠다라는 염원까지요. 불은 그 염원을 받아 더욱 기세를 키우고요."

홀로 타오르는 불보다 무언가를 연료 삼아서 타오르는 불이 강한 건 당연지사였다. 애초에 홀로 타오르는 불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기도 하고.

결국 불은 무언가에 깃들지 않으면 피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않은가.

"다른 것에 깃들고, 섞여서 정화하는 성질을 가질 불을 현우가 땅 울림으로 만든 사물에 깃들 수 없는 건 염원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아니면 그 방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

"현우의 불은 무엇을 태우며 피어오르는 불인가요? 그 불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요? 어떤 바람으로 불의 기세를 키우시나요? 정화의 불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연달아서 질문을 내던진 엘리는 내가 그저 푸른 입자로만 불의 형태를 잡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무슨 말인지 얼추 이해는 가는데 뭔가 팍 와닿는 건 없네. 어떤 걸 태우며 불을 피워내느냐, 라···."

나는 푸른 불, 정화의 불을 손바닥 위에 피워내며 이 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떠올렸다. 내가 불을 피우는 데 복잡한 과정은 없었다.

그저 일정 양의 푸른 입자를 팔에 두르고, 그것을 회전시켜 진동을 만들고, 그 진동으로 열기를 모은다. 어느 정도 모인 열기가 아직 발화점에 다다르지 않은 다른 입자들을 끊임없이 달구면 비로소 불씨가 생겨난다.

그렇게 모인 불씨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불길이 되고 말이다. 푸른빛을 발하는 불길은 검은 입자에 오염된 적들을 불사르며 이내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저도 그 불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상태라면 현우한테 도움도 주고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아쉬워요."

"그러고 보니 원래 이 불은 숲지기들이 사용하는 불이라고 했었지? 꼭 누군가한테 배워야 쓸 수 있는 거야? 아니면 나처럼 갑자기 쓸 수 있게 되는 건가?"

"모든 숲지기들이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소수에게만 허락된 힘이에요. 그리고 언제 사용할 수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어머니와 교감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피울 수 있게 된다고 하던데, 이제 그 어머니는 없으니까···."

순식간에 침울한 기색을 풍기게 된 엘리는 고개를 휙휙 내젓더니 기운차게 입을 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눈망울이 나를 담았다.

"아무튼 현우는 정화의 힘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현우가 한층 더 성장하게 되는 순간이겠죠. 5살, 7살 수준의 기둥과 벽도 엄청 강해질 테구요."

엘리는 킥킥 웃으면서 내 손바닥 위에 피어난 푸른 불을 톡톡 건드렸다. 불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엘리는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정화의 불이 그녀의 정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화륵-

나는 엘리에게 푸른 불을 넘겨주며 그녀가 말했던 것들을 한동안 곱씹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사실. 불이 무언가를 태우면서 피어오른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지금까지는 불의 형태를 잡아주는 입자의 양을 조절해가며 불의 기세를 제어했건만. 이러한 방식이 틀린 방법은 아니나,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방법도 아닌 방식이었던 것이다.

푸른 불에 의해 몸도 점차 나른해진 탓에 흐물흐물하게 변한 엘리를 보며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나는 무엇을 태우며,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서 불을 피워내는가.

***

"아저씨, 무슨 생각해?"

지수가 땀투성이인 얼굴을 수건으로 한차례 닦아내며 한 말이었다. 현재 나, 지수, 엘리는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 훈련을 마친 상황이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벙커 내부로 들어가야 하니 말이다. 점심을 거의 거르듯이 대충 먹은 탓에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고.

"그냥,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좋은 결과가 나올까 하는 생각."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엘리의 상태를 살피면서 답했다. 정화의 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내 오후 훈련을 위해서 엘리를 마구 사용했더니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하긴, 바람 화살도 무한정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난 또 골치 아픈 일 있나 했네. 그거야 뭐,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되지!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런데 막상 생각해 보니까 우리 좀 대단한 것 같지 않아? 나는 그런데."

"뭐가?"

"우리가 흩어지지 않고 세계수인가 뭔지 하는 커다란 나무 앞에 도착했잖아. 처음 수원 고등학교에서 아저씨 말 들었을 때는 이 사람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싶었는데 말이야."

지수는 잡다한 물건이 들어 있는 스포츠 가방을 열고 그곳에 다 쓴 수건을 넣었다. 원형의 스포츠 가방에는 나, 엘리, 지수가 간단하게 배를 채우거나 목을 축일 수 있는 간식거리들이 죽은 흔적이 가득했다.

"네 말을 들으니 갑자기 옆구리가 아프네."

나는 엘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겸 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지수를 보면서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정확히 지수가 그때 당시에 나를 있는 힘껏 꼬집었던 부위였다.

"···내 말 안 듣고 자꾸 고집을 부리니까 그랬던 거지. 엄살 부리지 마. 진짜 아프게 해 줘?"

"······."

이런저런 일을 통해 지수의 약점을 대부분 알게 된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깨물기가 두렵지 않았지만, 일부러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괜히 성질 긁으면 나만 손해이니까.

"어찌어찌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게··· 뭐랄까. 참 새삼 신기하네. 그렇게 위험한 일들이 많았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코앞에 세상을 이렇게 만든 나무가 있어."

내가 얌전히 있자 다시 회상 모드로 들어간 지수. 귀를 쫑긋거린 그녀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노을이 형성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처럼 빌딩 사이로 보이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지수의 말대로 남은 거리감을 인식하니 새삼 놀랍기는 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던 세계수가 이제는 코앞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평선 끝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잘 잡는다면 시야를 한가득 메울 정도로 가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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