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8 - 378. 준비 (28)
"그러게. 두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 여기까지 왔어."
나는 옆에 앉은 지수의 귀를 쓰다듬었다. 귀를 조물조물거릴 때마다 그녀의 꼬리가 좌우로 휙휙 움직인다.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겪은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말이다.
"아까 아저씨가 생각했던 거 말이야. 너무 오래 신경 쓰지 마. 너무 많은 생각은 오히려 행동에 방해가 되거든. 우리는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 걸으면 돼. 어렵지 않잖아. 연구소까지 길을 터줄 사람들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벙커 사람들이 도와준다고도 했으니까."
"······."
"그리고 아저씨 누나도 구해야지."
지수는 제 2연구소에 있을 내 누나의 존재를 언급했다. 예전에 내가 지나가듯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누나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는 몰라도 일단 그곳에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그녀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를 구하기까지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누나를 제때 구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초조함과 함께 드는 생각이었다.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가 불안하게 상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누나.'
나는 누나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제대로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그저 나를 장난스레 타박하는 여성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떠오를 뿐이었다.
메이벨.
5월의 작은 종.
이 이름을 떠올릴 때면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의 향수였다. 잔향처럼 남은 기억이었지만, 그 희미한 기억은 내게 누나가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실제로 여정 중간중간에 누나의 목소리가 내 목숨을 살려 주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나의 누나.
누나의 기억에게서 전해져 오는 느낌은 언제나 장난스러운 기색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의 성격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듯이 그 장난스러움 또한 누나의 성격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항상 나보다 앞선 곳으로 나아가며, 내가 넘어질 만한 돌부리가 있는지 확인해주었던 메이벨. 내게 있어서 누나는 언제나 이정표였다.
내가 연구소로 가야만 하는 건 누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이쪽이라며 누나가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씨앗 동기화 부작용으로 인해 과거 기억 대부분을 잃어버린 나와 달리 누나는 여러 진실들을 알고 있겠지. 허나, 그건 내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누나가 어떤 상태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누나가 그동안 나를 지켜줬으니 다음은, 적어도 한 번쯤은 내가 그녀를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걸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맞아. 구해야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금방 갈게.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지수와 눈을 마주쳤다. 빛나는 금안에는 노을이 일부 담겨 있었다. 호박색과 주홍빛이 서로 섞여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어차피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연구소로 가는 것뿐이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읏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는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꼬리에 달라붙어 있던 흙먼지도 탁탁 털렸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지금 이런 순간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것도 참 신기하다며 말한 지수. 그녀는 벽돌로 보수공사를 해 내구도를 한층 높인 벽에 기댔다. 벽에는 넝쿨 줄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아무튼 아저씨 아니, 오빠. 나만 믿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다 도끼로 혼쭐내줄게. 나는 오빠 믿는데. 오빠도 나 믿지?"
지수는 벽면에 기대어 놓은 도끼를 잠시 눈짓으로 가리켰다가 나를 본 후에 장난스럽게 킥킥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노을이 비춰진다.
보통 그런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일까. 그저 서로에게 신뢰를 줄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을.
내게 있어서 지수는 서로의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위험들도 많았고.
"당연히 믿지."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한 지수에게 마주 웃어 주며 몸을 일으켰다. 빌딩 사이를 헤치고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제 슬슬 들어가자. 더 있다가는 감기 걸릴지도 몰라. 바람이 확 차가워졌어. 지수 너는 엘리 좀 챙겨줘. 나머지 짐은 내가 들게."
"알았어. 엘리? 엘리! 정신 좀 차려 봐.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래 해롱해롱거려?"
"흔들지 마세요, 언니···. 속이 울렁거려요···."
엘리는 지수의 손길에 겨우 진정되었던 속이 다시금 울렁거리는지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의 귀가 기운을 잃고 아래로 살짝 쳐졌다.
"쉬더라도 편하게 누워서 쉬어야 할 텐데. 아예 못 걷겠어?"
"으으···.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
에너지 방전 상태에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흐느적거리는 엘리를 보니 내일은 그녀를 좀 약하게 사용해야 할 듯싶었다. 오래오래 써야 하지 않겠나.
"에휴, 업혀. 울렁거려도 조금만 참아. 금방 내려줄 테니까."
지수는 그런 엘리를 업으면서 나를 찌릿 흘겨보았다.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굴린 것을 탓하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황급히 남은 짐을 챙겼다. 그와 동시에 어서 내려가자고 손짓했다.
이윽고, 나와 지수는 여전히 가건물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에 훈련장에서 벗어났다.
이 순간, 이 시간, 이 모습이. 그 순간, 그 시간에도 그대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
벙커 내부 일자 복도.
"아저씨, 연대장실 들릴 거지?"
광장을 지나 행정실과 연대장실이 있는 복도에 다다르자 지수가 한 말이었다.
"어, 너는 엘리 데리고 먼저 방에 가 있을래?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엘리가 많이 힘들어 하기도 하고."
나는 그녀가 무슨 의도로 말 한 것인지 알고 있어서 곧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령들이 비정상적으로 소멸한 흔적에 대해서 알려 줘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흐에···."
"···그러는 게 낫겠네. 가방에서 그 돌 조각만 꺼내고 이리 줘. 방 가는 김에 내가 가지고 갈게."
지수는 엘리의 반응을 한번 살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꼬리도 절레절레 살랑거렸다.
"엘리 업고 있는데 괜찮겠어?"
"그 정도야 거뜬하지. 엄청 무거운 게 들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알았어, 잠깐만. 자, 여기. 고마워."
나는 가방에서 엘리가 주워 온 돌 조각을 챙기고 나서 지수에게 스포츠 가방을 내밀었다. 지수도 그다지 체력이 남은 상황이 아니라 다리가 살짝 후들거리고 있었기에 살짝 걱정되었다.
그래도 그녀가 괜찮다고 하기도 했고, 괜히 걱정하는 말로 그녀를 붙잡아두는 것보다 빨리 보내주는 게 낫겠지.
"에구···. 난 가 볼게. 아저씨도 너무 오래 있다가 오지 마? 아저씨가 와야 저녁 먹을 거니까."
그리 말한 지수는 엘리를 고쳐 업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디뎠다. 엘리의 체구가 그녀보다 작은 덕분에 지수가 엘리를 업은 모양새는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수를 보내고 복도에 남은 나는,
똑똑-
연대장실 문을 두드렸다. 정해진 퇴근 시간이 따로 없는 연대장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평소에 문 앞을 지키던 군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사라진 상태였다.
"선이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그냥 농담처럼 중얼거리던 말 아니었어?"
"아니야! 이 수정을 쥐고 있으면 진짜로 무슨 선이 보인다니까?"
"그럼 그전까지는 안 보였다는 거로군? 내가 자네 그 선이 보인다라는 중얼거림 때문에 귀에 이명이 들릴 지경이었는데. 그건 알고 있었나?"
"크흠! 그건-."
내 노크 소리가 방 내부에 전해진 직후, 안쪽에서 들려오던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누구인가? 누가 노크를 했는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머리 사내의 목소리였다.
"···이현우입니다. 알려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어서 들어오게! 문은 열려 있다네."
이어서 들린 건 연대장의 목소리였다.
"······."
나는 한 손으로 돌 조각을 굴리는 한편, 나머지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소음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과 함께 연대장실 내부에 마체테를 가지고 다니는 민머리 사내, 연대장, 난쟁이 탄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소리는 두 명의 목소리만 있었는데, 이제 보니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수리 아저씨, 선이고 자시고 테이블 서류 선이나 맞춰요. 선이 보인다는 분이 왜 이렇게 자꾸 어지르는 거예요. 이러면 제가 계속 정리해야 하잖아요. 아니면 저랑 선의 기준이 다르신가."
침묵을 지키던 난쟁이 탄이 석재 테이블 위 서류를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