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9 - 379. 준비 (29)
"수리 아저씨,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수정을 직접 가지고 있거나 주변에 그 양이 많아지면 이적에 재능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 능력을 깨우칠 수 있다고요. 오늘 다시 외부로 나가신 박 소위님처럼요. 그러니 수리 아저씨가 무슨 선이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제 말 또 안 들었죠?"
난쟁이 탄은 테이블 중앙에 자리 잡은 수정 파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박지영을 언급하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설명을 여러 번 하는 것이 이번 일만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이능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수정에 관련된 토의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에 붙은 머리카락처럼 자꾸 그 선이 아른거려서 네 말에 집중을 못 했다. 손으로 밀어도 치워지지도 않고."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그 선은 나중에 혼자 알아 보시고 지금은 서류 정리부터 해요. 퇴근 좀 하게요. 오늘 온종일 앉아만 있었더니 뼈마디에서 뚜둑 소리가 끊이질 않는단 말이에요. 이 소리 들려요? 들리죠? 수리 아저씨가 자꾸 딴소리만 하지 않았으면 조금은 덜 들렸을 소리예요."
어깨를 살짝 비틀자 관절 부위에서 뚜둑 뼈 소리가 나는 난쟁이 탄. 그는 자기 몸 상태를 몸소 보여 주었다.
"크흠!"
민머리 사내, 독고수리는 헛기침하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반질반질한 그의 머리에는 땀이 나와 한층 더 맨들맨들하게 보였다.
"그러게 내가 눈치 줄 때 적당히 하지 그랬나. 그래, 무슨 일인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쯧쯧 차는 연대장은 이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한 켠에 쌓인 서류 더미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마무리 직전의 모습이고, 그 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던 같아 지금 타이밍에 들어온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들의 퇴근 시간이라는 게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가 일거리를 추가하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방으로 가서 쉴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벙커를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덜그럭-
그리 생각한 나는 테이블 위에 엘리가 주워 온 돌 조각을 올렸다. 석재와 돌 조각이 만나자 작은 소음이 일어났다.
"······?"
"돌 아닌가?"
연대장과 민머리 사내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건 난쟁이 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정령을 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엘리가 말하길, 오멘이라고 하더군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령이 비정상적으로 소멸한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 눈을 그렇게 뜨셔도 안 보일 거예요."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 돌 조각과 마찬가지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 전에 푸른 입자를 충분히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에 손을 올려 보십쇼. 그럼 뭔가 달라진 게 보일 겁니다."
내 말에 돌 조각을 부릅뜬 눈으로 살펴보고 있던 연대장, 독고수리가 반지에 손을 대었고, 오멘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던 난쟁이 탄도 침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와 동시에.
"······!"
부릅뜬 눈이 그대로 돌 조각을 향했다가 나를 보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푸른 입자를 직접 운용한 사람이 아니어도 반기를 가동하기에 푸른 입자만 충분하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이 쓸 수 있는 모양이다.
"뭐가 보이십니까?"
"뭔가··· 눌어붙은 흔적 같은 것이 보이네만. 짓눌린 것 같기도 하고, 피가 튄 것처럼 보이기도 하군. 이게 정령이 소멸한 흔적이라고? 탄, 뭔가 아는 것 없나?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런 쪽에 완전히 문외한이잖나."
"저도 정령 쪽은 제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몰라요. 이런 건 저번에 정신 차린 엘프리데 같은 사람들 분야거든요. 그래도 제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건 있어요. 이런 게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거죠.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소멸이니까요."
"혹시 벙커에 묘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요?"
나는 난쟁이 탄의 말에 동의하는 한편, 벙커 내부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벙커 총책임자이니만큼 벙커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면 그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민머리 사내와 연대장, 난쟁이 탄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잠시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시선은 이내 테이블 위에 정리된 서류 더미로 향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낌새에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뭔가 일어나긴 했군요?"
"자네 말대로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는 했네."
연대장은 서류 더미 중간에서 어느 보고서 하나를 꺼냈다. 그가 꺼낸 보고서는 창고 물자 손실 보고서였다.
"창고네요?"
나는 연대장이 건넨 보고서를 받아서 거기에 적힌 내용을 보았다. 기다란 발톱 자국에 망가진 물자에 대한 설명, 그 물자의 현재 남은 양, 당시 근무를 서던 경계병들의 면담 기록, 근처 보안등에 금이 간 기록 따위들이 종이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무언가 낯이 익은 이야기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나가면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해낼 수 있었다. 이곳 벙커에 도착한 이후에 창고 관리 근무자들이 배급 줄에 서 있으면서 나눈 대화였다.
"경계병들의 말에 따르면 그 사고가 일어난 당시에, 창고로 들어간 인원이 없었고 나온 인원 또한 없었다고 했어. 인원 출입 없이 일어난 일이라서 아직 누가, 무엇으로 한 것인지는 아직 파악 중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약간의 물자 손실만 있을 뿐, 인명 피해는 없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창고에 일어난 일 때문에 경계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참이었다는 연대장. 그는 이미 중요한 물자나 사람들이 밀집된 구역의 경비를 강화했다고 말했다.
연대장실 문을 지키던 군인이 없어진 건 그러한 연유였던 모양이다. 중요도가 낮다고 판단한 구역의 인원을 연대장이 다른 곳으로 보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여기 이 친구처럼 뭔 선이 보인다는 사람이 일으킨 소행인 줄 알았는데, 자네가 가져온 돌 조각을 보니 관점을 달리 해야겠군. 일단 급한 대로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지. 이보게, 수리. 자네도 이제 내 옆에 있지 말고 근무나 서게."
"에잉, 이 나이 먹고 근무를 서야 한다니. 이왕 근무 서는 거 야간으로 넣어 주게."
마체테 손잡이를 톡톡 치고 있던 독고수리는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알았다며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어···. 바로 믿어 주시네요?"
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무언가 더 대화를 이어야 할 줄 알았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상식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 현 세상이고, 새로운 상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현 세상이니까. 예전 상식을 기준으로 삼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넘어갔겠지."
"······."
"허나, 이현우 자네가 피워내는 푸른 불처럼, 여기 이 철이 덜 든 친구가 보인다는 선처럼, 탄이 보여주는 땅울림이라는 능력처럼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에서는 무엇도 함부로 간과해서는 안 되지 않겠나."
연대장은 허허 웃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가 이상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벙커의 안전을 위해서 한 말이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를 벙커의 안전을 책임지는 내가 무시한다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냥 넘어가서 후회하는 것보다 상황이 좀 더 힘들어지더라도 단단히 방비를 하는 것이 맞는 일이고."
내가 좀 더 열심히 일하면 그만이라는 답을 한 연대장은 자기 친구인 독고수리를 야간 근무표에 싹 다 넣어 버렸다. 다른 어린 병사들의 이름을 적었다가 지운 흔적이 수도없이 남아 있는 야간 근무표에 말이다.
그제야 말을 잘못했다는 걸 알게 된 독고수리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는 자기 이름만 적힌 야간 근무표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난쟁이 탄이 땅울림으로 서류를 보호하는 상자를 만들어내서 그는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내 티격태격하는 민머리 사내 독고수리와 난쟁이 탄.
그런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나는 연대장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말을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총책임자의 자리에 앉아서 저런 말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벙커의 관리자에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닌 진정으로 남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이런 당연한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특히 변한 세상에는 더 그렇겠지.
현재 벙커 책임자가 지금의 연대장이라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이 돌 조각 아니, 오멘이라고 했던가?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로 마치고, 또 우리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는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 텐데 들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고, 연대장은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눈짓으로는 연대장실 한 켠에 설치된 무전기를 가리켰다.
"그럼 이젠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차례군. 마침 잘 왔어. 약 1시간 전에 무전기로 연락이 와서 따로 사람을 보낼까 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