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5 - 385. 습격 (5)
희미한 달빛 아래 지평선에 길게 늘어선 그림자들이 일렁거리며 소리를 낸다.
[끼아아아악!]
[크에에에엑!]
최선두의 아르마딜로 변종이 길게 울부짖자 근처 나무 인간들도 따라 울부짖는 소리였다. 행동을 따라 하는 움직임은 나무 인간들이 아르마딜로 변종을 확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걸 직감하게 만들었다.
명백하게 상하 관계가 나누어져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후웅-
엉망진창인 합창을 하듯이 서로의 괴성이 어지럽게 뒤섞이자 기묘한 파장이 사방으로 퍼졌고, 그 파장은 이내 장벽에 위의 우리에게도 도달해 순식간에 몸을 스쳐 지나갔다.
밤하늘보다 어두운 파장이 우리를 지나치고 나서도 계속해서 퍼지는 모습이 보인다. 끝없이 퍼지는 파장은 결국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까지 했다.
"······!"
"정신 차려! 떨어지면 안 된다!"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그 파장은 군인들의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장비에 부착한 수정 패치 덕분에 군인들은 파장의 영향으로부터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빛.'
파장이 스쳐 지나가도 손쉽게 버틸 수 있었던 나는 전방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푸른빛을 발하는 아르마딜로 변종의 등껍질이었다. 저렇게 밝은 푸른빛을 내는데, 정작 사용한 힘은 검은 입자라는 점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파장 탓에 박지영과 연락이 끊긴 모양이고, 등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덕분에 군인들이 변종의 위치를 쉽게 특정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푸른 장막을 몸에 두른 변종이 어째서 검은 입자의 파장을 퍼트릴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시간은 없었다.
[구아아아아악!]
아르마딜로 변종이 돌진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발톱으로 바닥을 인정사정 없이 긁어대고 있었으니까. 놈 주변의 나무 인간들 또한 한차례 괴성을 내지르며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다.
'장벽 위 무기는.'
곧 이어질 상황을 상상한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장벽 위를 둘러보았다. 컨테이너 장벽 위에는 특별한 무기나 구조물,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단하게 고정되어 거치된 기관총 몇 정과 벙커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군인도, 높은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닌 나이지만, 함께 싸우는 전우로서 이곳의 현장 지휘권은 내게 있었다.
아르마딜로 변종을 맞상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이기에 연대장이 그리 정한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군인들은 없었다. 그들은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이곳에 모인 인원은 총 42명. 5명씩 1분대를 이루고 있으니 분대는 총 8분대. 남은 2명의 인원은 나와 난쟁이 탄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다가 장벽에 몸을 들이받을 준비를 마친 괴물 무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가 당신들을 지휘하기로 되어 있지만 순간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당신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상황 지시는 제가 내려도 순간적인 판단은 각 분대장님들과 소대장님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4개 분대로 나눠서 지휘하는 소대장 2명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내게 대단한 리더십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휘권을 고집스레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효율의 문제였다. 여기 있는 군인들은 대부분 여러 실전을 거친 베테랑이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전선이 마구잡이로 확대된 상황이 아닌 괴물의 전력이 이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몰려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다른 장벽에도 최소한의 방위를 위해 소수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기는 하나, 그들로서는 해당 위치를 지키는 것이 역부족일 터다.
소대장들이 손짓하자 각 군인들은 신속하게 각자 자리를 잡았다. 일부는 기관총에, 일부는 강화 저격탄을 쏠 자리에, 또 다른 일부는 장벽 위에 쌓인 모래 포대 뒤에.
그들의 시선은 하나 같이 전부 전방의 괴물들을 향해 있었다. 긴장감 가득한 시선에는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괴물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장벽 앞 50m 거리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습니다. 바로 아래에는 크레모아를 설치해 두었고요. 둘 다 양은 그리 많지 않아서 대단한 파괴력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기세를 어느 정도 줄여 주기는 할 겁니다."
총기를 쥐고 있는 군인들과 달리 도끼 한 자루만 쥐고 있는 내게 소대장이 한 말이었다. 그는 장벽 뒤에 설치된 임시 초소의 조명을 전방으로 비추었다. 그러자 어두웠던 공간이 환하게 밝혀지며 푸른 장막을 두른 변종과 나무 인간들 무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나무 인간들 사이사이에는 유난히 체구가 커다란 나무 인간이 있었다. 나는 기괴한 느낌을 자아내는 놈들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쿵! ···쿵! 쿵! 쿵쿵!
정확히는 발을 내딛는 간격이 조금씩 빨라지며 관절부를 뒤틀어 대는 나무 인간들이 무어라 답하려는 내 입을 막았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장벽에 모인 병력은 고작 42명인데. 상대해야 할 적은 500을 가뿐하게 넘어가는 물량. 그 사실이 내 입을 다물게 하는데 한몫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악!]
[끼아아아악!]
수백의 무리가 한점으로 돌진하는 광경은 무심코 숨을 들이키고, 눈을 비비게 만들만큼 무시무시했다. 일대의 나무 인간들이 사람들이 겨우 살아가는 벙커를 죽이기 위해 여기로 몰려온 상황이었다.
심지어 죽여야 할 상대가 인간이 아닌 괴물인 점을 감안 한다면, 압도적인 전력 차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우리에게는 이적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수정이라는 도구가 있었다.
그 도구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장벽을, 이 벙커를 지켜내고 말리라.
우리는 그리 결심했다. 살의로 가득한 시선을 몸으로 받아 내면서.
- 치지직··· 여기는 장벽 수호대. 지금부터, 교전 시작하겠습니다.
- ······반드시 사수하라.
말없이 이어지는 침묵 사이로 소대장의 무전기 소리가 끝난 순간.
퍼-어엉!
아무것도 모른 채 발을 내디딘 나무 인간의 발밑에서 짙은 흙먼지 기둥이 위로 치솟았다. 50m 전방에 매설된 지뢰는 연달아 터지며 여러 흙먼지 기둥을 만들어내었다.
퍼엉! 펑! 퍼펑!
[끼에에에에엑!]
순간적으로 붉은 화마가 휘감긴 흙먼지 사이로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직접 발로 밟아 터진 지뢰이니 직격타로 들어간 모양이다.
꾸드드득!
그와 동시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화제 포자가 등장했다. 화마가 일어난 길을 따라 몸을 부풀린 소화제는 일종의 장애물을 형성하며 장벽을 향해 달려드는 변종의 기세를 조금은 줄여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게 만들었던 포자가 이번만큼은 역으로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의 돌진을 완전히 저지하는 건 무리였다. 그게 당연했다. 지뢰를 수백 개 깔아 놓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잠시 주춤했던 나무 인간들 무리는 날아간 선두를 대신해서 빈자리를 채웠고, 다시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분노가 담긴 괴성과 함께 중간에 있던 나무 인간들이 흙먼지를 뚫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모습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사격으로 괴물들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사격 개시! 조정간 단발로 하고 머리를 노려라! 연발로 긁어도 머리를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장벽에 붙은 악성 변이자들은 화염 방사기로 처리! 괜히 총으로 잡겠다고 바깥으로 머리 내밀지 마! 강화탄은 최대한 아껴! 나중에 아르마딜로 변종을 처리할 때 써야 한다!"
"K-6 너희는 그냥 있는 대로 다 갈겨! 일반탄은 아낄 필요 없어! 다 쏟아 부어!"
소대장과 분대장의 지시 하에 군인들은 총기를 앞세워 전방의 나무 인간들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장벽 위에 거치된 기관총이 먼저 전방의 나무 인간들을 긁는다. 지뢰와 포자가 가로막아 서로 간의 거리가 좁혀진 그것들은 기관총의 탄환 세례로 인해 거리가 더욱 좁혀지게 되었다.
파바바박!
티티팅!
총알이 바닥과 나무 인간들에게 박히는 소리, 떨어지는 탄피가 컨테이너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K2C1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속도가 느려지고 밀집도가 올라간 괴물의 머리를 신중하게 노려 수를 줄여나갔다.
탕! 탕! 탕!
[크르륵?!]
그저 앞으로 내달리던 나무 인간 하나가 어깨에 총알을 얻어맞고 주춤거린다. 움직임을 멈춘 목표물을 맞추는 건 여기 모인 군인들에게 있어 어렵지 않은 일. 충격을 흘리지 못한 나무 인간은 다리에 총을 맞아 넘어졌고, 이내 그것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퍼석!
산산조각 나는 썩은 살점과 나무 껍질이 주변 나무 인간들의 몸체에 튀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것의 역한 냄새가 코끝에 맡아진다.
타타타타탕!
콰-아아앙!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화력이 전방으로 투사된다. 하지만 그런 화력에도 기세가 전혀 죽지 않은 괴물이 있었다. 바로 푸른 장막을 몸에 두른 아르마딜로 변종. 놈은 육중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우직하게 거리를 좁히고 있는 중이었다.
팅! 티티티팅!
놈의 장막에 부딪힌 탄환은 그저 도탄 되어 엉뚱한 곳으로 튈 뿐이었다.
[구아아아아아악!]
푸른 장막의 괴물이 신경에 거슬린다는 듯 괴성을 내지른다.
"이 괴물 새끼···! 변종은 건들지 마! 지금은 악성 변이자 수를 줄이는 것에만 주력해!"
괜히 화만 돋게 만들고, 총알이 피해를 하나도 주지 못 하는 광경을 다시 한번 확인한 군인들은 목표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군인들은 총기가 통하는 나무 인간들의 수를 줄이는데 집중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나무 인간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거리를 쉽사리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현우! 계획대로 장벽 앞에 석벽을 세워요! 조금 엉성해도 괜찮아요! 제가 보조할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쟁이 탄이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만든 것에 자기 힘을 더해 강화를 시켜 줄 테니 힘을 최대한 모으라는 말이었다.
저벅-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 두 손에 계속 힘을 모았다.
웅웅웅!
전방을 전부 뒤덮을 수 있는 석벽을 만들기 위해서.
변종과 나무 인간들의 돌진을 막을 수 있는 저지선을 만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