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90화 (391/497)

Chapter 390 - 390. 습격 (10)

돌진하기 직전 준비 동작인 발톱으로 바닥 긁기. 나는 그것을 행하고 있는 아르마딜로 변종을 보며 생각했다.

아르마딜로 변종은 우리가 죽이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내가 만들어내는 푸른 불이 장막을 중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1차 돌진 후 장벽 앞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이 아닌 뒤로 물러난 이유는 내가 견제용으로 날렸던 푸른 불 때문이었으니까. 비록 그 양이 적어 장막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결코 뚫지 못할 것 같은 장막이 뒤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앞에서 푸른 불로 장막을 중화시켜 없애면 아르마딜로 변종도 피해가 누적되어 결국은 죽겠지.

허나, 그 과정이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고, 변종을 죽이고 난 이후가 문제가 된다. 과연 그 이후의 우리에게 다음 작전을 수행할 여력이 남아 있는가. 이것이 쉬이 답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벙커가 보유한 탄약은 무한대가 아닌 수량이 정해진 소모품이다.

연구소가 있는 곳까지 돌파할 사람 또한 무한정으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취급해서도 안 되고.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죽여도 끝이 없는 나무 인간들의 물량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게 하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미 수백을 넘게 죽인 것 같은데, 이쯤이면 수가 줄어든 것이 눈에 보일 정도여야 하는데, 전체적인 수가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물론 처음에 비해 시야에 담기는 물량이 줄긴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사체가 나무 인간들 아래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광경은 우리가 처음 관측한 것보다 배의 물량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 순간 비가 오고 있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면, 장벽은 뚫려도 진작에 뚫리고 말았겠지. 벙커도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 괴물들을 강화시켜 주는 비가 처음부터 왔다면 전투 초반에 장벽에 몸을 들이받은 나무 인간 변종들에게 장벽이 뚫렸을 가능성이 컸다.

비는 나무 인간들에게, 넝쿨들에게, 나무뿌리들에게 힘을 강화시켜 주는 에너지나 다름없었으니까.

"···탄. 이 밑에 무슨 시설이 있는 건 아니죠?"

나는 차오른 긴장감에 심호흡하면서 물었다. 시선은 바닥 긁기를 멈춘 아르마딜로 변종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난쟁이 탄은 내 물음에 곧바로 답을 주었다. 주변에서 울리는 사격음이 끊이질 않아 목청을 힘껏 키운 채로.

"없을 거예요! 아니, 없어요! 이 밑까지는 시설을 확장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밑에는 흙만 있을 거예요!"

내가 난쟁이 탄에게 그 물음을 던진 건 아르마딜로 변종의 돌진을 막는 방법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당당히 정면으로 맞상대해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수십 가지 방법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막는 것에도 수십 가지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나와 난쟁이 탄이 석벽을 세워서 괴물들의 돌진을 막을 수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내가 찾은 답은 해자였다. 땅이 깊게 파여 있다면 돌진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맞대응하는 것보다 애초에 돌진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탄, 저 변종이 장벽에 닿기 직전에 땅을 깊게 파요! 해자를 만들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미리 파면 안 돼요!"

나는 장벽 위를 올라오려는 나무 인간 무리들을 발로 차 뭉텅이로 떨어트리며 외쳤다.

다행히 이 밑에 벙커 내부의 추가 확장 시설이 있는 것이 아닌 그저 흙이나 자갈 따위들만 있다고 하니 한 번쯤 시도할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 정도밖에 통하지 않을 작전이었다. 내가 당장 장벽 아래에 구덩이를 만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전선 확대를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구덩이 함정도 여러 번 통할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변종들은 똑같은 함정에 여러 번 속을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것들이 전방의 땅이 깊게 파여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당연히 파이지 않는 곳을 찾아서 옆으로 쭉 퍼지게 될 거다.

그렇지 않아도 화력이 모자란 우리인데 여기서 전선이 확대되면 막는 게 더 힘들어진다는 건 자명한 사실. 전선이 확대가 된다면 수가 부족한 우리가 압도적으로 불리해진다.

기동 가능한 전차라도 몇 대 있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가건물이 엉망으로 무너져 당장 전차를 빼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더욱 그러했다.

결국, 나무 인간과 그 변종들이 우리가 있는 장벽에서 풍겨 오는 피 냄새에 온 신경이 쏠린 사이에 타이밍 맞게 함정을 만들어야 했다.

"알았어요! 신호 줘요! 최대한 깊게 파볼 테니까!"

"우선 장벽 앞에 쌓인 사체들을 치워야 합니다! 소대장님! 유탄이나 수류탄 남은 거 없어요?"

나는 위로 휘둘러지는 팔을 피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물구덩이 함정을 제대로 먹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산을 이뤄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체들을 치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체들의 산은 얼핏 아르마딜로 변종의 돌진으로부터 장벽을 우선 보호해주는 장애물로 보일 수 있었으나, 이 산은 하등 의미가 없는 장애물이었다. 우리를 불리하게 만드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놈의 돌진은 앞이 무엇으로 막혀 있든 간에 상관없이 장막으로 밀어버릴 정도로 강력했고, 오히려 저 사체들의 산으로 인해 나무 인간들이 그것을 밟고 올라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나서 장벽 위를 차지하는 나와 군인들을 점점 물러나게 만들고 있기도 했다.

"크레모아 재설치가 막 끝났습니다! 바로 격발합니까!"

소대장은 다급한 와중에도 격발기를 손에 들어 내게 보여 주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격발기는 장벽 아래에 설치된 크레모아와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르마딜로 변종의 1차 돌진에 의해 처음에 설치했던 크레모아가 유실되었고, 선이 중간에 끊어져 버리는 일이 발생했기에 재설치를 한 것이었다.

"아래 쌓인 사체들을 최대한 밀어낼 겁니다! 남은 유탄이랑 수류탄 다 가져와서 던져요! 틈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바로요! 빨리! 시간 없습니다!"

내가 뭐라 말을 이으려는 순간, 전방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르마딜로 변종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조금씩 가속도가 붙고 있는 놈이 일으키는 소리는 나와 군인들이 서둘러 움직이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 우리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제대로 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다급하게.

"알겠습니다! 얘들아! 사체들을 치운다! 가지고 있는 거 다 쏟아 부어!"

소대장이 지시를 내린 직후, 군인들은 각자 조끼에서 수류탄을 꺼냈고, 핀을 곧장 뽑았다. 그리고 사체들 사이로 굴려 넣었다.

통- 통- 데구르르··· 콰-아앙!

컨테이너 철판을 타듯이 굴러간 수류탄은 이내 사체들이 쌓여 있는 틈으로 사라졌고, 폭음을 일으켰다. 밑으로 빠진 수류탄이 연쇄적으로 터질 때마다 사체들의 산이 들썩거린다.

수류탄이 없는 이들은 수류탄이 터지면서 만들어 낸 공간을 향해 유탄을 박아 넣었다. 퐁, 소리와 함께 날아간 유탄은 수류탄과 마찬가지로 산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크레모아, 격발!"

눈먼 파편을 피하고자 자세를 낮추고 있던 군인들 중 한 명이 외쳤다. 경고성이 섞인 그의 외침은 다른 군인들의 자세를 좀 더 낮추게 했다.

펑! 퍼버펑!

그가 격발기를 꾹 누르자 큰 폭음이 연달아 터지면서 산을 조금 더 밀어내었다. 크레모아 내부에 담긴 수백 개의 쇠구슬이 죽은 나무 인간들을 꿰뚫고 하늘로 퍼졌다.

군인들은 현재 보유한 화력으로 산을 부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쌓인 사체들의 무게가 무게인지라 그다지 많이 밀어내지는 못했지만, 장벽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약간의 틈이라도 있다면 나와 난쟁이 탄이 땅 울림으로 놈들을 밀어낼 수 있으니까.

"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산과 장벽 사이에 석벽을 솟구치게 한 후, 전방으로 밀었다. 순간 숨을 크게 들이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 번에 훅 빠져나가는 입자에 팔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혈관이 터지기라도 한 듯 울긋불긋한 멍이 피부 곳곳에 생기는 건 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아프다고 해서 그만둘 수 없는 노릇이다. 아르마딜로 변종이 장벽에 몸을 들이받기 전에 산을 최대한 밀어내야 했으니 말이다.

[끼아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엑!]

살아서 움직이는 나무 인간 변종들이 석벽을 넘어서 장벽을 다시금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그것들을 처리하는 건 군인들의 몫이었다.

"한 번에 하나씩 죽인다고 생각해라! 얼마 남지 않았다!"

"무리해서 앞으로 나가지 마! 우리가 위에 있다는 걸 이용해!"

우리를 대신한 그들은 산이 밀린 덕분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참이었다. 사라졌던 고지의 영향이 재차 생긴 덕분이었다.

지지지직-

질척한 체액과 뒤섞인 흙이 서로 비벼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린다. 서서히 산이 밀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쿵쿵쿵쿵쿵쿵!

그것보다 더 선명한 소리와 흔들림이 내 몸과 귓가를 뒤흔든다. 변종의 돌진이 장벽에 닿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 박동은 그 진동보다 더 거셌다. 몸 내부에서 쉬지 않고 울리는 박동은 살아 있다는 걸 체감시켜 주는 비명이었다.

"이제 그만! 바로 구덩이 큭-, 만들어요! 당장!"

폐부가 조여지는 느낌에 숨과 말이 뚝뚝 끊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마니까.

크드드드득-

석벽을 유지하고 있던 힘의 방향을 아래로 돌린다. 지하로 뻗어진 그 힘은 주변의 흙을 밀어내면서 점점 깊은 깊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사체들의 산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 아르마딜로 변종은 밑에 구덩이가 파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상태. 아직까지는 산처럼 쌓인 사체들이 구덩이를 가리고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깊게 파이고 있는 구덩이는, 놈이 눈치채지 못한 구덩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리고 있는 변종의 발목을 붙잡겠지. 돌진이 장벽에 직격으로 통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하는 건 시간 벌기. 놈을 죽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장벽이 뚫리지 않게 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콰르르르르!

마침내 지하에 뻥 뚫린 구멍으로 산이 한 번에 무너지면서 빨려 들어간 것과 동시에.

[구아아아악-?!]

몸의 균형을 잃은 아르마딜로 변종이 괴성을 내질렀다. 놈은 괴성을 끝까지 내지를 틈도 없었다. 육중한 체구에 적용된 관성이 놈을 엉망진창으로 나뒹굴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한 바퀴 구른 아르마딜로 변종.

으직! 콰지지직!

변종의 푸른 장막에 의해 마구잡이로 짓이겨지는 사체들과 나무 인간들에게서 역겨운 소리가 들린다.

다행 중 불행일까.

불행 중 다행일까.

원래 내 목적대로 놈의 돌진을 막는 것은 성공했다. 허나, 그 성공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어어?! 다들 지지대 꽉 잡아요! 부딪힙니다!!"

변종의 몸체가 생각보다 길었던 탓에, 앞에 쌓인 사체가 생각보다 더 많았던 탓에 변종을 구덩이에 가둘만큼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터-어어엉!

어느 정도 힘을 상쇄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강력한 힘을 품고 있는 변종의 후미가 1차 돌진 때 부딪혔던 부분을 그대로 강타하고 말았다.

끼기기기긱━!

뒤집어진 변종의 발버둥과 후미에 얻어맞은 장벽이 죽는 소리를 토해낸다. 그와 동시에 나를 포함해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균형을 잃고 넘어져야만 했다.

체액이 잔뜩 묻은 철판을 짚은 두 손 밑으로 전보다 훨씬 크게 벌어진 장벽의 틈이 보인다.

[구아아아악!]

어중간한 돌진을 피한 나무 인간 변종들이 어느새 그 틈으로 들어 오려고 하는 것까지. 팔을 앞으로 뻗어 몸을 들이밀고 있는 놈들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진 틈에 몰려들고 있는 중이었다.

나무 인간들도 아는 것이다. 장벽이 결국 뚫리고 말았다는 것을.

'이런 씹···!'

균형 감각을 잃어 몸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와중에도 그 광경만큼은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나마 다행일까. 그 광경을 보고, 지금 이어지고 있는 침입을 눈치챈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충격을 버텨 낸 나와 군인들이 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하려던 그때.

끼리리리릭!

-비켜!! 치지직-! 앞에 누가 있든 다 비키십쇼!! 이대로 장벽에 박을 겁니다!!!

궤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황급히 돌리니 후방에서 자주대공포 1대가 연기를 내뿜으면서 달려오고 있는 중인 것이 보였다.

최명철의 무전이 끝나고 대략 7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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