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5 - 395. 습격 (15)
유인 장치 가동 1시간 20분 전, 최예린 시점.
저벅··· 저벅···
가물가물한 시야와 멍한 정신을 비집고 흐릿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야는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어디를 걷고 있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
잠 기운에 취해 몽롱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단순히 꿈이라고 하기에는 다리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현실감이 있었던 까닭이다.
저벅··· 저벅···
그렇게 바닥을 향한 시선에는 회색의 바닥 타일과 어두컴컴한 주변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정신을 확 차릴 수밖에 없었다.
"······!"
현재 자신이 눈을 뜬 곳이 침대 위가 아닌, 모두가 있는 방 안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라는 생각에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이 그렇게 만들었다.
'뭐야?'
덜컥, 하고 굳는 몸. 그제야 어딘가로 향하던 다리가 멈췄다. 하지만 머리를 잠식한 의문에 의해 그 다음 행동을 바로 이어서 할 수가 없었다.
무심코 입을 열어 소리를 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어째서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감각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던 것이다. 느껴지는 감각을 믿는 것이 상황 판단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 의한 행동이었다.
'뭐야.'
두 손으로 입을 꾹 잠근 나는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어둠에 익은 눈으로 보아하니 현재 내가 있는 곳은 광장인 듯했다. 그것도 출입구가 있는 제 1광장이 아닌 이번에 새롭게 확장된 공간인 제 2광장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제 2광장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다른 장식물도 없이 삭막한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곳은 제 2광장밖에 없었으니까.
'뭐야···!'
하지만 내가 대체 왜 여기 있다는 것인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하는 몸이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 혹여 내게 나도 모르는 몽유병이 있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내 옆에는 엘리 언니가 나처럼 멍한 얼굴로 걷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 혼자였다면 몰라도 엘리 언니까지 몽유병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나와 엘리 언니는 왜 잠결에 이곳까지 왔는가. 이런 의문이 머리를 꽉 채웠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털어 해결이 급한 의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의문을 해결하는 것보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오빠, 언니들···!'
무엇보다 무서웠다.
아무도 없이 텅 빈 광장, 순찰을 하는 군인 아저씨들도 보이지 않는 광장에서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새벽이라 그런지 낮게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를 들이키니 그 기분은 배가 되었다. 손이 잘게 떨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귀신에 홀린 거야? 이상해. 분명 잘 자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은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엘리 언니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 아니, 멈춰 세우려고 했다.
속으로 오빠와 언니가 있는 곳으로 빨리 되돌아 가야 한다고 중얼거린 내가 엘리 언니에게 손을 댄 순간.
땡땡땡땡땡땡땡땡-!
복도에 설치된 비상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뭐, 뭐에요?!"
"히약···!"
갑작스레 울린 비상벨 소리에 엘리 언니는 내가 깨우지 않더라도 알아서 눈을 뜨게 되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꼬리털을 곤두세웠다.
"히, 히이···."
진짜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지금도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지고 있는 중이었다.
"예린? 우리가 왜 여기에···?"
아직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엘리 언니는 뭐라 작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런 그녀가 본능적으로 손에 들린 활을 확인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 때도 옆에 두고 자는 활이기에 무의식중에서도 들고 나온 모양이다.
"언니! 우리 뭐에 홀렸나 봐요! 눈 뜨니까 여기에 있었어요! 일단 어서 돌아가요! 오빠가 있는 곳으로!"
이미 요란한 비상벨 소리가 울리고 있겠다, 어차피 자신들의 말소리 정도는 그것에 묻히겠다 싶어 나는 다급하게 말을 다다다 쏟아 냈다. 무서움에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비상벨이 울렸다는 건 이 벙커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으니 빨리 도망쳐야 했다. 내 우산이 되어 준 오빠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그와 동시에.
"······!"
엘리 언니의 귀가 순간 솟더니 내게 달려들었고,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같이 석재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다.
"어? 어어어?"
그야말로 어어, 하는 사이에 석재 테이블 밑으로 들어간 나는 긴장감이 한가득 차오른 엘리 언니의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닫았다. 꾹 닫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예린! 더 엎드려요! 천장이━!"
언니는 다급하게 말을 이으면서 시선은 위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때.
드드드드드드드!
벙커 내부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났고, 거대한 나무뿌리가 바닥과 천장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쩌저저저적-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천장, 벽, 바닥이 나무뿌리에 의해 금이 쩍쩍 갈라지다가 허물어진다. 번개가 대지를 타고 흐르는 것처럼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콰르르르르!
지하 공간을 유지하던 벽이 사라지니 벽이 떠받치고 있던 흙들이 마구잡이로 밀려온다. 밀물 파도와 같이 매서운 기세로 몰아치는 토사는 조금 전까지 나와 엘리 언니가 있던 자리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휘이이이!
카가가각!
우리가 숨어 있는 석재 테이블도 뒤덮으려는 듯 토사가 밀려왔지만, 그 정도는 언니가 손에 모은 바람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유리병에서 푸른 가루를 뿌려서 힘을 북돋아 주었다.
비록 부탁을 들어 줄 정령 친구들은 더 이상 없었으나 푸른 입자가 담긴 가루만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힘을 전해 줄 수는 있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동안 워낙 많은 일은 겪었던 터라 그런지 당황한 와중에도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엘리 언니와 함께 상황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리 길게 잡아도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지진과 나무뿌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 아직 나가면 안 돼요. 저거 보여요?"
"······네, 보여요. 좀 더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게 좋겠어요."
나와 엘리 언니는 숨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분명 지진이 멈춘 지금이 이동하기에 최적인 타이밍인데도.
우리가 보고 있는 제 2광장을, 벙커 내부를 허물고 들어온 거대한 나무뿌리. 그것이 우리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뿌리의 끝부분이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벌어지다가 이내 안이 텅 빈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르륵, 하는 이질감과 함께 무언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실제로 눈에는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주변에 퍼진 흙더미를 모아 조잡한 가림막을 만들었다. 허공에 일렁거리는 저것들이 왠지 나와 엘리 언니를 찾고 있다는 느낌이 이어서 전해진 까닭이다.
나무뿌리를 조종하는 것이 저 이상한 일렁거림이고, 벙커를 엉망으로 만든 것이 저 이상한 일렁거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저것들에게 위치를 들켜서는 안 되었다. 절대로.
스르륵-
나무뿌리의 입구는 계속 열려 있는 상태. 시간이 지날수록 허공의 일렁거림이 늘어났다.
푸른 가루를 손에 쥔 나는 눈을 몇 차례 깜빡여 동공의 형태를 바꾸어 보았다. 보안등이 켜지지 않아 광장은 매우 어두웠던 탓에 묘안으로 바꾸는 것이 주변 인지에 도움이 되었으니.
"······언니. 저거 설마···."
그리고 묘안으로 바꾸니 한층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일렁거림을 통해서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일렁거림들은 정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일종의 의인화한 도마뱀처럼 보이는 형상, 손끝에 난 날카롭고 뾰족한 손톱, 뒤통수에서부터 등허리까지 이어진 지느러미, 주변의 풍경과 동화하는 비늘, 반투명한 몸체와 더불어 느껴지지 않는 기척.
비록 내가 알고 있던 정령들과 방향성이 달랐고, 정령의 한 계열인지, 정령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인지 어느 하나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정령? 아니, 아니에요. 저것들은 정령이 아니에요. ···아니어야만 해요."
엘리 언니도 금방 그 사실을 파악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콜록! 콜록! 오밤중에 대체 이게 무슨 일···! 거기 누구 있습니까! 있으면 대답하십쇼!"
일련의 군인 무리가 엉망으로 변한 광장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흙먼지가 짙게 깔린 광장을 보자마자 곧장 외침을 토해냈다.
- 현재 벙커 내부가 일부 무너졌다고 한다! 생존자 구조를 우선시해! 생존자 발견 즉시 대피실로 인도하라!
그들의 조끼 파우치에 걸린 무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이 이곳에 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벙커를 지키는 사람들이 소란을 듣고 그 진원지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다만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여기가 괴물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