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97화 (398/497)

Chapter 397 - 397. 습격 (17)

유인 장치 가동 후.

- 치직··· 현우씨? 위는 정리가 다 된 거에요? 지금 저랑 예린이, 엘리, 미소 언니는 대피소에 같이 있어요!

벙커로 진입하는 출입구와 점점 가까워지자 울리는 무전기. 무전기는 내 무전에 응답한 한세아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니 제대로 통신이 이어진 것이었다.

장벽에 있을 때 통신이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곳에 있을 때보다 통신 상태가 훨씬 양호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콜록! 콜록!"

내가 벙커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에 손을 휘적거리는 사이에 무전이 이어졌다. 다행히 한세아는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리랑 예린을 찾았으며, 아이들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과 함께 대피소로 피난한 상태라고.

"지수! 지수는요!"

- 지수가 자기는 괴물들 막고 있을 테니 저희 먼저 내려가라고 했어요! 아직 위에서 군인들이랑 싸우고 있을 거예요! 여분의 무전기를 주고 왔는데 무전 안 받는 거 보니까 또 부서진 것 같구요! 지금 제가 올라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

무전기 너머에서 고함 소리, 부서지는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대피소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 오빠! 벙커를 공격한 괴물들은 그냥은 안 보여요! 제가 저번에 준 반지 써요! 그거 쓰면 희미하게라도 볼 수 있을 테니까!

바쁘게 움직이는 한세아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예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잔뜩 지쳐 있는 목소리이긴 했어도 씩씩하게 말하는 걸 보니 어디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엘리도 무사해.'

잡음과 함께 전해지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나를 안도케 만들었다.

예린은 내게 벙커를 습격한 괴물은 일종의 정령과 관련이 있는 변종이며, 일반 사람들이 정령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주변의 환경과 동화한 그것들의 모습 또한 볼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사람들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는 것까지.

- 저랑 엘리 언니가 새벽에 갑자기 방을 나간 것도 그 능력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오빠도 조심해요! 괴물들 대부분은 지수 언니가 죽였지만 아직 남아 있는 괴물들이 감각을 어지럽게 만들어서 기습을 할 수도 있어요! 천장에도 붙어 있을 수 있으니 진짜 조심해야 해요!

잠에서 깬 내가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 그건 벙커를 습격한 괴물들이 행한 능력 탓이었나 보다. 어쩐지 감각이 예민한 듯하기도 하고, 둔한 것 같기도 하더라니.

도마뱀을 의인화한 형상이라는 예린의 이야기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장벽에 몸을 들이받은 아르마딜로 변종이 충격을 상쇄하는 과정에서 잠시 모습이 드러났었던 괴물이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급한 무전이 끝나면 장벽 위 군인들에게 경고를 해주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 그리고 오빠! 칸! 칸 할아버지가! 발전실에 혼자 있어요! 오빠가 구해 줄 수 있어요···? 사람들이 계속 커지는 나무뿌리 때문에 여기가 곧 무너질 지도 모른대요···.

정령과 카멜레온이 뒤섞인 변종들, 계속 성장하는 나무뿌리에 의해 벙커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말.

벙커 내구도를 유지시키는 수정 발전기가 있는 곳에 난쟁이 칸이 홀로 버티고 있다는 말.

"수정 발전실에 칸이 혼자 있다고? 알았어. 내가 가서 칸 도와줄 테니 예린이 너는 다치지 말고 있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벙커 내부의 상황에 나는 다리를 더 바삐 놀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뿌리 때문에 수정 발전기가 망가지면 전부 끝이야.'

벙커 시설 유지 불가능, 사람들 생존 불가능,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티는 것도 불가능.

그러니 당장 막아야 했다.

한 고비를 겨우 넘긴 상황에서 또 다른 고비가 곧장 앞길을 막았지만 뭐 어쩌겠나.

살려면 막아야지. 살려면 움직여야지.

벙커로 진입할 수 있는 출입구 앞에 도착한 나는 곧장 아래로 발을 밀어 넣었다. 벙커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후두둑-

남성의 무게가 발에 실리고, 그 발이 잔해에 올려지자 잔해에 붙어 있던 흙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톡톡 튀며 이리저리 부딪치는 돌 조각들은 이내 일렁거리는 검은 그림자에 먹혀 사라졌다.

탁- 탁- 탁- 탁-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다음 발을 내디뎠다. 잔해가 쉬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던 까닭이다.

쿠드드득···

덜덜덜덜덜···

미약한 진동이 무너진 천장 통로에 흐른다. 진동은 밑에서부터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나무뿌리가 계속 성장하면서 만들어진 진동이었다.

내가 장벽으로 올라가기 위해 지나갔던 통로와 동일한 통로이건만, 뿌리가 한차례 난동을 더 부렸던 것일까. 난쟁이 탄이 만들어 둔 사다리는 진작에 부서져 사라진 상태였다. 통로가 더 좁아진 건 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을 최대한 빨리해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난쟁이 칸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으니 말이다.

이윽고.

···탁!

단단한 나무뿌리를 잡고 주르륵 내려온 나는 마찰에 달아오른 손을 급하게 털어 열기를 식혔다. 다행히 나무껍질이 워낙 질긴 터라 자잘한 껍질이 피부에 박히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돌아온 벙커 제 1광장. 벙커의 내부는 내 생각보다 더 엉망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찰박- 사그작-

바닥을 잠식한 물이 있지를 않나, 넝쿨들이 체감이 확 될 정도로 활개를 치고 있지를 않나, 보안등이 모조리 깨져 매우 어둡지를 않나. 폐쇄된 생태계 공원에 온 듯한 모습이었다.

"콜록! 콜록!"

무너진 천장 틈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빠져나오고 있었던 것에 비해 불탄 식물들이 별로 없어 보였다.

찰박! 찰박찰박!

나는 눈을 따갑게 만드는 연기를 애써 무시한 채로 앞으로 내달렸다. 군인들이 내지르는 소리와 화염이 쏘아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카트리지 얼마나 남았어!"

"텅텅 비었어! 여분도!"

"이런 씹! 아직 이 통로를 뚫으려면 한참이나 더 필요한데 연료가 바닥났다고? 추가 보급은!"

"통로가 이런데 무슨 보급! 바랄 걸 바라야지! 닥치고 연장이나 들어! 패다 보면 끊어지기는 하겠지!"

내가 향한 곳에는 등에 화염 방사기 카트리지를 메고 있는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통로를 가득 메운 나무뿌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화염을 방사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들의 생각만큼 뿌리가 화염에 불타는 속도는 느렸고, 그에 따라 통로가 뚫리는 속도가 진전이 느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군인들이 장비한 수정 패치에 담긴 힘으로는 나무뿌리에 담긴 검은 입자를 쉽게 밀어낼 수 없는 탓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화염 방사기의 힘으로 통로를 뚫을 수 없다는 건 깨달은 그들은 이내 각종 공구를 들었다. 화염으로 인해 그나마 조금은 약해진 뿌리를 내려찍어 부수기 위함이었다.

그런 군인들이 나무뿌리를 톱이나 마체테 따위의 도구로 내려찍기 직전.

"이봐요! 잠깐 옆으로 물러나세요!"

나는 한 박자 더 빠르게 외쳤다. 숨을 헉헉 고르면서 외치는 것과 동시에 도끼에 모은 푸른 불의 응집체를 쏘아냈다. 어차피 푸른 불이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후웅-!

유선형의 형태로 허공을 가르는 푸른 불은 지나가는 복도를 환하게 밝히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오염된 것들을 정화하는 불이 공간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불에 닿은 것들이 검게 변하며 타오른다.

"어어? 피해!"

"여기에 피할 틈이 어딨어 임마! 그냥 엎드리기나 해! 맞아도 안 죽어!"

복도에 몰려 있던 군인 무리들은 후방에서 쏘아지는 푸른 불을 보자 우왕좌왕하며 당황했다가 금세 정신을 되찾았다. 그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푸른 불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아는 덕분이었다.

펑-

복도를 꽉 틀어막은 나무뿌리에 도달한 푸른 불의 응집체가 터진다. 작게 폭발하는 푸른 불은 그 파편을 사방으로 비산시키며 불이 닿는 영역을 순식간에 키웠다. 천장, 바닥, 벽 가리지 않고.

화르르륵!

화산이 터진 것처럼 분출된 정화의 불은 눈 깜짝할 새에 나무뿌리에 옮겨붙었고 맹렬하게 태우기 시작했다. 나무뿌리나 넝쿨 따위들이 품고 있던 검은 입자가 한순간에 쏟아져 나와 불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고작 그 정도 검은 입자에 꺼질 불이 아니었다.

검은 입자의 반격에도 꺼지지 않은 푸른 불은 점점 더 크기를 부풀려 나갔으며, 통로를 막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결과를 가져 왔다.

타닥- 타닥-

"이현우씨! 위는! 위는 어떻게 됐습니까!"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방독면 안쪽에서 들려오는 군인의 물음. 통로가 뚫려서 한숨 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그는 안도감이 깃든 눈을 하고 있었다.

"장벽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보다 현재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가요!"

나는 좀 더 얼얼한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고 있는 손을 쥐었다 피며 군인의 물음을 받았다.

한세아에게 상황을 어느 정도 듣기는 했지만, 대피소에서 버티고 있는 그녀보다 여기 있는 군인들이 현재 상황을 더 잘 알지 않겠는가.

"현재 이곳을 제외한 다른 구역도 나무뿌리에 의해 통로가 막혔다고 합니다! 급하게 화염 방사기를 들고 올라왔지만, 방금 보셨다시피 불에 잘 타지도 않고요!"

뿌리에 의해 이곳에 고립되었으나 다른 구역에서 전달되는 무전을 들을 수는 있었다고 하는 군인들. 그들은 다른 곳도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상황일 것이다라는 말을 전했다.

'이것들 통로를 막으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야.'

나는 군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무뿌리들이 하나같이 전부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뻗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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