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8 - 398. 습격 (18)
"저희처럼 다른 구역에 고립된 군인들이 최대한 합류해서 통로를 뚫자고 했는데, 아직 살아 있는 괴물들이 계속 기습을 하는 탓에 그것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군인은 변종들이 인원이 한 자리로 모이는 것을 방해했으며, 어느 정도 뭉친 인원이 괴물에 대항을 하고 있을 때면 나무뿌리가 벽을 허물고 나타났다고 말했다. 마치 그 괴물들이 나무뿌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괴물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파악이 됐어요?"
나는 군인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푸른 불에 의해 서서히 열리고 있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갈림길로 나눠진 양측 복도에는 두꺼운 나무뿌리들이 사람들의 이동을 막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뿌리들의 방향이 어느 한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수정 발전기가 있는 곳. 난쟁이 칸이 홀로 발전기를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벙커의 통로를 틀어막은 건 단순히 부차적으로 발생한 효과에 불과했고, 이것들이 목표로 노리는 건 수정 발전기였던 것이다.
혹시나 나무뿌리들이 따로 노리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했던 그 추측은 이내 뿌리들이 꿈틀거리는 방향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겠다는 판단이 든 순간이었다.
"괴물들이 나오는 뿌리의 통로는 제압 완료된 상태이나, 그곳에서 나온 괴물들은 아직 전부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마저도 남은 괴물들 대부분은 김지수씨가 상대해서 처리한 걸로 알고 있고요. 현재 문제가 되는 건 구석에 숨어서 자신이 유리할 때만 튀어나오는 놈들입니다."
적은 인원, 바닥난 연료, 고갈된 체력, 점점 무너지는 벙커. 각종 악재가 겹쳐서 괴물들을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는 군인.
"그럼 이렇게 하죠. 당신들은 우측 통로로 가서 최대한 많은 인원과 합류하세요. 뭉쳐 다니면서 이전과 똑같이 행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군인들에게 푸른 불을 나누어 주었다. 많이는 주지 못했지만 방금 나눠준 양만 해도 나무뿌리를 불태우고 변종을 상대하는 건 한층 수월하게 변하겠지.
"알겠습니다. 이현우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는 수정 발전실로 갑니다. 뿌리들이 그곳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벙커가 붕괴되기 전에 가서 막아야 해요."
"그럼 이거 가져가십쇼! 좌측 통로에는 연기가 더 가득 차서 방독면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정화통을 새 걸로 갈았으니 연기 속에서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어느 한 군인이 방독면 가방에서 여분의 방독면을 꺼내 내게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부를 답답하게 만드는 매캐한 연기가 계속 신경에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곧장 방독면을 얼굴에 쓰며 전방의 광경을 눈에 담는 것과 동시에 아직 형체를 유지하는 뿌리들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퍼석!
타닥- 타닥-
내부에 푸른 불씨가 맺혀 있는 뿌리들이 한 번에 훅 꺼지면서 사방으로 푸른 불씨를 휘날렸다. 콱 틀어 막혔던 통로가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통로가 마침내 개방되었을 때.
"이제 바로 이동해요! 벙커 내부 정리 계속해주세요! 괴물들이, 뿌리들이 사람들을 더 다치게 하지 못하게!"
"예! 저희는 이 길 따라서 다른 인원과 합류 후 정리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우리는 천장에 붙어 있던 나무뿌리들을 제거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마지막으로 본 군인들의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전우가 괴물에게 허무하게 죽고, 그토록 최선을 다해 지켰던 벙커가 엉망으로 변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말이다.
절망에 빠져 주저앉아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하물며 아무리 괴물들의 수를 줄였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속 들어오고 있는 뿌리의 통로가 추가로 있는 건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언뜻 상황이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허나, 군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현재 수단이 막히면 다른 수단으로, 그 수단도 막히면 또 다른 수단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군인들은, 대피소의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예전에 칼카타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 조금의 흙이라도 있다면 식물은 존재한다.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인간은 살아가요.'
- 죽지 않았다면 식물은 다시 살아난다. 참 지독하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도 자라난다는 것이.
'죽지 않았다면 인간은 다시 일어서요.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칼카타. 절망이 가득한 이 상황에서도 기어코 움직인다는 것이.'
- 생명이란···.
'생명이란 이토록 끈질긴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린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요. 칼카타, 보고 있어요?'
나는 뒤늦게나마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답을 하며 달리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내게 남긴 불씨를 간직한 채로.
타탓- 타타탓-!
가는 길목마다 통로를 완전히 막고 있는 나무뿌리들이 보인다. 서로 얽히고 설킨 뿌리들은 일종의 매듭처럼 보였다.
예전에 난쟁이 칸이 말하기를 이곳 벙커는 여러 개의 독립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지진이 일어나면 땅울림의 이적이 녹아 든 각 구역들이 자동으로 지상으로 부상한다고 했고.
그러나 지금 벙커는 부상하기는커녕 엉망으로 비틀린 모습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불에 타지도, 끊어지지도 않는 나무뿌리들이 벙커 전체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벙커가 제 역할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저 뿌리가 벙커를 붙잡은 힘이 더 컸을 따름이었다.
벙커가 뿌리에 저항한 그 증거로 나무뿌리에 의한 비틀림이 아닌 각 구역이 서로 인위적으로 분절된 듯한 선이 벙커 내부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었고, 그러한 선은 내게 확신을 더해주었다.
화르르륵!
나는 나무뿌리를 정화의 불로 태우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가면 수정 발전기가 있는 곳이 나올 것이다.
점점 크기가 커지는 나무뿌리들과 함께 중간중간 일부 군인들이 힘겹게 처리한 괴물들도 보였다. 겨우 괴물 몇 마리를 잡기 위해서 구역을 전부 불바다로 만들었는지 검댕이가 없는 곳이 없었다.
허나, 이렇게라도 해서 괴물들을 죽였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바로 괴물의 처리를 실패한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그곳에는 까만 숯처럼 탄 괴물들 대신 이리저리 엎어진 군인들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총을 놓지 못한 그들의 손은 여전히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중이었다.
죽은 군인들의 인식표를 챙길 시간도 없는 상황 속에서.
드드드드드드드!
'···이런 씹.'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발전실이 있는 곳으로 내달릴 수만 있을 뿐이었다. 발전실과 점점 가까워질 수록 강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수정 발전실 앞. 여기는 예상대로 사방에서 뻗어진 나무뿌리들이 모여 있었다.
꾸드드득···
쩌적···
하나의 뿌리로 보일 정도로 발전실을 둘러싸고, 압박하는 광경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뿌리들이 어찌나 많이 뭉쳐 있는지 발전실은 보이지도 않고 안쪽에서는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곧 발전실이 으깨진다는 걸 알리는 소리에 나는 황급히 도끼에 푸른 불을 모아 휘둘렀다.
깡!
화르륵!
허무하게 튕겨 나가는 도끼날. 반발 효과로 푸른 불똥이 사방으로 튀자 나무뿌리들이 꿈틀거리며 더 강하게 조여 들었다.
발전실을 부수고 있는 나무뿌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푸른 불을 더 많이 모아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압도적으로 모자랐다. 나무뿌리들이 내가 힘을 모으는 동안 가만히 있어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힘을 충분히 모아서 뿌리를 불태우는 것보다 뿌리가 발전실을 뭉개버리는 것이 몇 박자나 더 빠르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뿌리가 발전실의 벽을 파고들고 있는 중이니 더욱 그러했다.
"칸! 안에 있어요? 대답해요!"
나는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응답은 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쩌적-
부스스···
뿌리에 의해 발전실 벽면이 일부 부서지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칸이 있었다.
그것도 어깨에 뿌리가 박힌 칸 말이다. 다른 뿌리에는 무전기가 박혀 있었다. 그것이 그가 내 무전에 답하지 못한 이유였다.
이미 뿌리 중 상당수가 발전실 내부로 침입했고, 칸은 간신히 발전기가 부서지지 않게 막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붉게 달아오른 수정 발전기는 그것이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가 왔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뿌리의 침식을 막고 있는 것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과부하를 받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 칸!!"
"크으···. ···현우? 여기는 왜 왔느냐. 돌아가라. 이곳으로 들어 오지 마. 언제 뚫릴지-콜록! 몰라. 뚫리면 여기는 바로 무너진다. 그럼 죽고. 그러니까 오지 말거라."
난쟁이 칸이 이제 놀랄 힘도 없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잔뜩 지친 기색인 그는 내게 여기서 어서 빠져나가라는 시선을 보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기다려요! 금방 갈 테니까!"
"오지 말라니까···! 지금이라도 여기서 나가! 나가서 목숨을 부지해라! 발전기가 폭발할 수도 있단 말이다! 얼른 대피소로 들어가! 적어도 거기는 폭발을 견딜 수 있어!"
그는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무너진 벽을 땅울림으로 가렸다. 그러나 그렇게 보수된 벽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난쟁이 칸이 다룰 수 있는 땅울림이, 수정 발전기가 앞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시간.'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나무뿌리를 불태우는 시간이든, 칸과 수정 발전기가 더 버텨줄 수 있는 시간이든 간에 상관없이.
칸이 위험하니 오지 말라는 말을 했으나, 이제 와서 물러날 거였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해 보기.
절대 처음부터 겁 먹고 포기하지 않기.
전부 내가 당신에게 해준 이야기야.
전부 당신이 내게 되돌려 준 이야기야.
'나는 포기 안 해.'
같이 별을 보러 가요.
다 같이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자고 약속했으니까.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현재 모을 수 있는 입자를 도끼 끝에 모았다.
키이잉!
한계까지 압축된 미증유의 힘이 모조리 도끼날에 집중된다. 입자의 이동 통로인 혈관이 모조리 터지면서 피부를 울긋불긋하게 만든다.
"큭···!"
순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이 전해졌지만, 절대로 도끼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지금 놓으면 모든 게 허사다. 벙커도 무너지고, 나무뿌리도 제거하지 못하고, 최종 목표인 오염된 세계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적을 발현해야만 했다.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벙커가 버틸 수 있게.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오직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적을 꿰뚫기 위한 가시나 기둥,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벽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건 현재 칸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벽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내 어설픈 기교는 전부 배제한다. 그저 최대한 끌어모은 출력을 전해준다. 출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비록 무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그것도 살아 있을 때 따질 수 있는 조건이지 않은가.
지금 무리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파아앗!
어느새 최대치로 모인 출력이 강한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두웠던 공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흐읍···!"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있는 힘껏 도끼를 내려찍었다. 칸에게서 배운 땅울림이 깃든 도끼를.
그가 나를 위험에서 구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그를 구할 차례였다.
까앙━━!
내 힘이 벙커에 전해진 것과 동시에.
콰드드드드득!
금이 수없이 가며 부스러기를 잔뜩 흘리고 있던 벽면이 곧장 단단하게 굳었다. 마구 갈라진 틈이 역재생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의 파편을 흡수하면서 갈라진 틈새를 전부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발현된 이적.
땅울림.
그것이 붕괴 직전인 벙커를 일순간 지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