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9 - 399. 습격 (19)
입자를 쥐어 짜낸 심장이 저릿하다.
심장이 크게 박동할 때마다 그 저릿한 고통은 바늘로 쑤시는 듯한 고통으로 바뀌어갔다.
땅을 딛고 있는 다리가 후들거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것인지 주저앉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몸에 닿는 감촉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도끼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풀렸다.
도끼 자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힘을 주었다. 완전히 손아귀를 벗어나려던 도끼는 간신히 내 손끝에 잡혀 바닥에 도끼날을 대었다.
코에서 뜨끈한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눈에 잡히는 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초점이 잡히지 않고 있는 렌즈처럼 사물이 여러 개로 보였다가 하나로 보이기를 반복했고, 시야가 살짝 붉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다.
흘깃 아래로 내린 시선에 피부에 핀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보였다. 입자의 이동 통로 역할을 하는 몸의 구성 요소가 엉망으로 망가진 흔적이었다.
몸이 최악인 상태에서 한계까지 끌어올린 출력을 한 번에 쏟아 내니 내 몸이 고스란히 돌려 받은 반동이었다.
"으윽···, 아파 죽겠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디뎠다. 내가 한 건 겨우 시간 벌기에 불과했으니까.
상황은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벙커를 침식하는 나무뿌리들을 모조리 불태워야만 했다.
일단 무의식적으로 내가 건넨 힘을 받아 벙커의 내구도를 일시적으로 올리기는 했지만,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난쟁이 칸. 그 표정은 순식간에 깨졌다.
"혀, 현우야━!"
난쟁이 칸이 상황 파악을 위해 잠시 몸을 굳혔고, 이내 나를 보자 대경실색하며 외쳤던 것이다. 내 생각보다 겉으로 보이는 상태가 나쁜가 보다.
"···거기 가만히 있어요. 쓸데없이 입구 막지 말고. 어차피, 후우···, 다시 열면 그만이니까."
나는 칸이 위험하니 이곳에 오지 말라며 입구를 막았던 것을 상기시키며 입을 열었다. 땅울림을 쓸 수 있는 건 당신 혼자가 아니니 괜히 여기서 일을 더 피곤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을 담아서.
나무뿌리들은 현재 단단하게 굳은 벽면에 뒤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뿌리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막고 있는 석벽이 발전기를 다시 지키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충분했다.
사브작- 사브작-
탁··· 탁···
힘없는 발걸음과 함께 껍질 부스러기가 밟혔다. 톱밥처럼 잘게 부서진 나무 껍질은 발에 밟혀도 제 형체를 유지했다.
이윽고.
"끄응···!"
발전실 앞에 도달한 나는 입구를 가리고 있는 두꺼운 나무뿌리를 있는 힘껏 옆으로 밀었다. 체중을 실어서 최대한 강하게 뿌리를 밀어냈다.
꾸드드득-
처음에 우직하게 버티던 뿌리는 서서히 휘어졌다. 틈이 더 넓게 벌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가 뜨드득 소리가 나면서 뿌리가 완전히 꺾였다.
살짝 감겨 있던 눈을 확실하게 뜨니 석벽에서 튀어나온 기둥이 뿌리를 밀어낸 모습이 보였다. 난쟁이 칸이 기력을 짜내서 입구를 열어 준 듯했다.
"···진작에 좀 써 주지."
"욘석아! 어쩌려고! 어쩌려고 이곳에 온 게야! 가서 몸을 피할 것이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원망스레 중얼거린 말에 돌아온 건 호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호통이 아니었다. 안타까움이 섞인 고함이었지.
"머리 울리니까 소리 좀 낮춰 주세요."
발전실 내부로 들어온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멀미를 참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벽에 등을 기댔다.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도 없었지만, 지금 앉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에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충분하기는 무슨. 방금 저 아니었으면 칸은 여기서 죽을 뻔했으면서. 아니, 생각해 보니까 어이가 없네. 칸이야말로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처음부터 좋게 좋게 갔으면 얼마나 좋아요!"
조용한 어조로 말을 잇던 내 입은 이내 칸에게 못지않은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꾸 도와주려는 사람을 보고 그냥 가라느니, 나가서 목숨을 부지하라느니 같은 말을 하는 칸이 서운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저 그 뿐인 치기 어린 감정이다.
그래도 문제가 있으면 같이 해결할 생각해야지 혼자 떠안고 가겠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했다. 더 겪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버릴 생각으로 살아왔다면 나는 애초에 움직이지도 않았을 거다.
"······말했지 않느냐. 받은만큼 돌려주는 거라고. 이미 진 빚이 많아."
엉뚱한 말을 중얼거리는 난쟁이 칸. 허나, 그가 무슨 의미로 말을 하는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
"콜록! 콜록!"
그동안 꾹 참고 있던 울렁거림이 쏟아졌다. 순간 감정을 참지 못하고 토해낸 것처럼 안에 뭉쳐 있던 굳은 피가 나온 것이었다.
후두둑-
검붉은 피가 발전실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쭈글쭈글하게 응고된 피를 토하니 정신이 더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숨 쉬는 게 좀 더 편해졌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헉! 현우야! 괜찮느냐! 으윽! 아이고···."
그 모습을 난쟁이 칸은 벌떡 일어나려다가 고통을 호소하며 곧장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족쇄와 연결된 사슬처럼 그의 어깨에 박힌 뿌리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은 까닭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소리 좀 치지 마세요. 멀미나서 또 토할 것 같으니까."
나는 심장 밑바닥에 쌓인 입자를 꺼내 푸른 불을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을 튕겨 칸을 옭아매고 있는 뿌리를 향해 날렸다.
화륵!
반딧불이가 내는 빛보다 작은 불은 칸에게 안착하며 그를 묶고 있던 뿌리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쿵! 쿵! 쿵!
고동치는 심장 속의 씨앗이 내게 더 무리하면 안 된다며 말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쩌겠나. 나무뿌리를 막으려면 칸의 보조가 필수인데.
꾸드드득···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려는 나무뿌리들은 보며 깨달은 것 한 가지. 그건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는 저 나무뿌리들을 완전히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껏 정화의 불을 일으켜도 태울 수 있는 건 발전실 주변의 나무뿌리들뿐, 다른 구역의 뿌리들을 제거하는 건 무리였다. 방금 칸을 붙들고 있던 나무뿌리만을 제거하고 사그라진 불처럼 말이다.
온 힘을 쏟아 부어 행한 땅울림이라는 이적은 말 그대로 잠시간의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잠시간의 시간이라도 매우 소중했다.
"칸, 움직일 수 있으면 이제 저 좀 도와주세요."
"흐으···. 뭘 하려고 하느냐?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더 없어. 한시라도 빨리 대피소로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다. 아직 위에 남아 있는 군인들에게는 내가 무전할 테니 너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거라."
"아뇨. 방법이 왜 없어요. 여기 눈앞에 바로 있는데."
나는 내 허리춤에 걸린 무전기를 챙기려는 난쟁이 칸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냐. 여기서 나가야 한다니까! ······너 설마. 안 돼. 안 된다. 제정신이냐!"
칸은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짓다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경악했다. 그도 그럴게, 내가 보고 있고 뿌리들을 억제할 수단으로 찾은 건 수정 발전기였으니까.
파지지직!
발전기의 수정은 과부하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붉은빛을 내는 중이었다. 수정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스파크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건 당연했다. 그 탓에 난쟁이 칸이 나를 말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손을 대기라도 한다면 곧장 폭발할 것 같은 움직임으로 보이기도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일단 한 번 시도는 해 봐야죠. 이거 증폭기와 원리는 같다면서요. 미리 체험해 보는 걸로 하죠. 뭐."
예전에 칸이 말하기를, 수정 발전기도 일종의 증폭기라고 보면 된다고 했었다. 그럼 할 수 있는 것도 비슷하겠지. 나는 내 힘을 이 수정으로 증폭해서 뿌리들을 막을 심산이었다.
"죽는다는 말이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상관없이 죽을 수도 있어! 수정의 과부하를 우습게 보면 안 돼! 만에 하나 터지기라도 하면━"
"칸."
말을 이으려던 칸은 내 부름에 입을 꾹 닫았다.
"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요. 하지만 저는 반쪽짜리 엔딩이 아닌 해피 엔딩이 좋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우선 보조해주세요. 시작합니다."
나는 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발전기의 수정에 손을 올렸다. 실랑이를 할 시간 따위는 없지 않은가.
"현우야! 이런 제기랄!"
난쟁이 칸이 욕설을 내뱉으며 나와 같이 수정에 손을 올렸다. 이미 손을 댄 이상 중간에 멈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혼나도 단단히 혼나겠구나, 라는 생각하며 수정에 정신을 집중했다.
파지직!
수정의 열기가 손에 전해진다. 팍! 하고 터지는 스파크가 손을 타고 흘러 검은 자국을 남긴다. 단순히 피부의 표면을 긁는 것만이 아닌 내부까지 전해지는 과부하의 스파크가 속을 진탕시킨다.
"······."
억지로 이를 악문 입 사이로 피가 똑똑 떨어졌다. 의식이 흩어지는 느낌에 나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자극하는 스파크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사방으로 튀는 스파크가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 까닭이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는 것보다 그냥 눈을 감는 것이 정신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하는 건 수정을 과부하시키는 부담을 내게 나누는 것.
칸이 하는 건 그 부담이 일정치를 한 번에 넘지 못하게 속도를 제한시키는 것.
키이잉-!
발전기의 수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푸른빛이 다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 스파크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푸른빛이 수정의 본래 색을 되찾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반면에 수정이 안정을 되찾을수록, 내 속은 점점 더 엉망으로 변해 갔다. 심장 속의 씨앗이 필사적으로 과부하를 처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었으니까.
내가 인간인 이상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과정은 필수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수정의 과부하를 나눠 받고 있는 건 서로 연결되기 전에 압력을 맞추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몸으로 이 과정을 버티는 건 결코 쉽지 않았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수정과 연결을 이었다면 수정이 터지든 내가 터지든 둘 다 터지든 간에 결과는 최악으로 치달았을 거다.
"···조금만 더! 수정이 안정화 되기 시작했어! 정신 차려라! 정신 놓치면 진짜 죽는다!"
난쟁이 칸이 푸른빛을 되찾고 있는 수정을 보며 외친 말이었다. 그는 나와 수정의 연결을 보조하기 위해 손과 눈을 바삐 움직이는 한편, 발전기의 수정을 안정화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정의 내부에 힘이 응축되어 코어가 만들어지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수정이 안정화가 되기만 하면, 나는 수정과 무사히 연결되어 정화의 불을 증폭시킬 수 있게 되리라.
그러다가 문득 간신히 붙잡은 의식 속에서 저번에 들었던 물음이 떠올랐다. 수정이 내게 묻는 것 같기도 했다.
- 당신은 우리에게 무얼 줄 수 있죠?
박지영이 내게 던진 물음.
- 현우의 불은 무엇을 태우며 피어오르는 불인가요? 그 불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요? 어떤 바람으로 불의 기세를 키우시나요? 그 불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엘리가 내게 던진 파문.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불에 담는 염원은 정말 단순했다. 그래, 정말로 단순했다. 그만큼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질문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고, 정화의 불에 담는 바람. 그것은 바로 한 줄기 희망이었으니까.
흔히 사람들이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키며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미래를 위하여.
칼카타가 우리를 위해 바랐던 것처럼 앞날을 위해 기도하면서.
내가, 우리가, 사람들이 오늘에 기대 내일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바라면서.
수정이 완연한 푸른빛으로 물든 것과 동시에.
"···이런 미친 녀석! 공명 성공!"
"으아아아!"
지금이라는 칸의 신호를 받은 나는 수정 안에 응축되어 있던 힘을 모조리 해방했다.
······후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