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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400화 (401/497)

Chapter 400 - 400. 습격 (20)

나와 완전히 연결된 수정이 내 힘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순간.

키이잉!

수정은 눈부시게 빛을 내며 정화의 불을 크게 증폭시켰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불이 일종의 고리를 형성했다.

띠처럼 이어져 수정 주변을 돌고 있는 불의 고리는 점점 빠르게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특별한 파장을 만들어내었다. 돌풍이 몰아치고 파장이 외부로 퍼지기 위해 하나의 점으로 뭉쳐진 건 거의 동시였다.

후우웅!

불의 바람이 발전실 내부에 몰아친다. 바람이 어찌나 센 것인지 발이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혹시나 지금 손이 떨어지면 증폭이 중간에 취소될까 걱정된 나는 어떻게든 수정을 붙잡고 버텼다.

파박, 튀는 푸른 불씨들이 회오리에 뒤섞이며 눈을 자극했다. 하지만 눈이 아프다던가 하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화르르르륵!

내부에 코어를 형성했던 발전기의 수정이 품고 있던 힘을 내 의도에 맞춰 해방시켰다. 발이 좀 더 뒤로 밀려나고 옷이 마구 펄럭거린다.

"으윽···!"

그와 동시에 푸른 불이 담긴 에너지 파장이 주변으로 확 퍼지고 파장에 닿은 나무뿌리와 넝쿨 따위들은 꿈틀거림을 멈추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파장이 지나가는 길 앞에 석벽이든, 나무뿌리든, 다른 잔해이든 무엇이 있든 간에 상관없이 관통하면서 퍼지는 에너지가 벙커를 침식하던 것들을 모조리 불사르기 시작한 것이다.

[끼이이이이!]

체액을 미처 내뿜은 틈도 없이 통째로 재로 변하는 그것들은, 벙커의 붕괴를 유도하던 검은 입자들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많이 들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파장이 멀리, 더 멀리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전실 내부를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돌풍이 사라지고 난 직후.

키이잉······

수정은 전원이 꺼지는 것처럼 묘한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빛을 꺼트렸다. 본래의 힘을 전부 소모한 탓에 비활성화 상태로 접어든 모양이다.

'···끝? 끝인가?'

나는 수정을 간신히 짚고 있는 손에 기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잔뜩 깔려 있는 회색의 재.

지금은 형체도 보이지 않는 오염된 식물들이 타면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내 힘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증폭의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난쟁이 칸.

그렇지 않아도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던 상태였던 그는 쉬지 않고 이어진 조정 과정에 진이 전부 빠진 듯했다. 말할 기운도 없이 대자로 뻗어 숨만 쉬고 있는 걸 보니 그렇게 보였고, 실제로도 그게 맞겠지.

털썩-

나도 칸처럼 털썩 뒤로 누웠다. 그리고 곧장 허리춤의 무전기를 빼내 버튼을 눌렀다. 무전기를 손으로 드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만 해도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는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일단 주변의 나무뿌리들은 파장에 닿으니 전부 불타 사라지긴 했는데 다른 구역의 상황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콜록! 아으···. 이현우입니다. 현재 벙커에 생긴 변화 있으면, 보고 좀 해주십쇼···."

얼마 지나지 않아서,

- 치지직··· ···거, 거주자 제 1구역 나무뿌리들 전부 제거됐습니다!

- 거주자 제 2구역도 통로 개방되었습니다!

- 여기는 제 1창고! 은신하고 있던 변종들 발견 후 제거 완료했습니다!

잇따라서 응답하는 무전이 오기 시작했다. 파장이 퍼진 직후에 거짓말처럼 침묵에 빠졌던 무전기가 재차 시끄럽게 목소리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검은 입자를 품고 있던 나무뿌리가 사라진 덕에 통신이 원활하게 복구가 된 것도 한몫하고 있겠지.

구역 정리와 통로 개방을 완료했다는 무전이, 은신하고 있던 괴물들의 은신이 파장에 의해 전부 풀려 손쉽게 제거하고 있다는 무전이 끝나고, 그 뒤를 이은 건 연대장의 무전이었다.

- ···대피소도, 상황 종료라네.

"어후···, 다행입니다···."

대피소 문을 두드리고 있던 뿌리들마저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나는 길게 늘어지며 답을 했고, 그제서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장벽도 정리를 끝마쳐간다고 하니 이제 정말로 새벽에 일어났던 변종들의 습격이 일단락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

- 이현우, 치지직··· 자네가 한 건가? 아니, 자네가 한 것이 맞겠지. 대체 어떻게···.

"그래, 현우가 했다. 궁금한 게 많고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을 테지만, 일단 지금은 시설 정상화에 힘써라. 습격은 끝났어도 벙커가 엉망인 건 여전하니까. 그리고 현우도 지금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자세한 이야기는 살아남았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으냐."

연대장의 무전에 답한 건 내가 아니라 난쟁이 칸이었다. 나처럼 기력이 다해 드러누워 있던 그는 무전기를 들고 골골대는 내 모습을 보다 못해 일어났고, 곧장 무전기를 가로챈 것이었다.

- 어르신이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위에 계시면 들것이랑 같이 병사를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도 괜히 우리 신경 쓴다고 애들 힘들게 하지 말어. 지금 힘들지 않은 사람들이 누가 있겠나. 다 힘들 텐데. 그냥 밑에 있는 세아나 예린이에게 현우는 무사하다고만 전해주게."

- 끄응···. 알겠습니다. 그럼 대피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곤란하다는 듯 침음성을 잠시 내뱉은 연대장은 이내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이어서 무전기를 통해 각 구역에 흩어져 있는 군인들에게 바삐 지시를 내렸다.

- 현재 벙커에 있는 인원들에게 전파한다. 대부분의 상황은 종료되었으나,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함부로 흩어지지 말고 한데 모여서 재정비 후 벙커를 정리하도록. 밑에서도 지원을 보내겠다.

- 예!

- 알겠습니다!

곧장 응답하는 군인들의 무전 소리가 발전실 내부를 빙빙 돌았다. 내 시야도 빙빙 도는 듯하다. 이래서야 일어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그때.

"······너무 무모했다. 어찌어찌 살아는 있지만 지금 네 속은 말이 아닐 테지."

난쟁이 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큰 소리를 내면 멀미가 올라와 토할 것 같다는 내 말을 기억하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엄청 아프진 않아요. 버틸만 해요!"

나는 괜찮다며 괜스레 히죽 웃어 보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수전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손을 넘어서 몸 전체가 달달달 떨렸기 때문이었다.

"헛소리.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걸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느냐. 네 몸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 지옥 시작이라는 것을."

"······."

"후우, 그때 가서 다른 소리는 말거라. 그래, 지금 움직일 수는 있겠느냐?"

꾸준히 괜찮다고 어필하는 나를 본 칸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아주 안 듣는 자식을 보는 눈이었다.

"숨만 좀 돌리고 나서 바로 움직이죠. 지수 찾으러 가야 하거든요."

나는 나 혼자 중력을 몇 배나 높게 받는 듯한 무거움을 느끼며 말했다. 터진 혈관과 피로가 누적된 근육에 의해 생겨난 피로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냥 이대로 자고 싶을 정도로 눈꺼풀이 엄청 무겁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눈을 감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어디 가서 다칠 지수는 아니었으나,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으니 말이다.

무전기라도 들고 있었다면 간략하게나마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텐데 자꾸 무전기를 부숴 먹는 건지 몰라도 연락이 닿질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어휴!"

"한숨 좀 그만 쉬어요. 복 달아난다고요."

"지금 네 꼴을 보면 올 복도 겁 먹어서 안 올 거다. 그러니 괜한 소리 말고 이거나 들거라."

난쟁이 칸은 들으라는 듯한숨을 또 쉬며 내게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서로 부축해주고 싶어도 신장 차이가 워낙 크게 나는 탓에 각자 지팡이를 짚고 이동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탁!

나와 난쟁이 칸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팡이로 바닥을 짚어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둡네요."

발전실 바깥을 나오니 복도는 발전실 내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보안등의 불빛이 꺼져 어두웠던 것이다.

"수정 발전기가 가동을 멈췄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동안 이렇게 어둡겠지. 기다려 봐라. 나한테 손전등이 하나 있으니."

난쟁이 칸이 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 하나를 꺼내 전방을 밝혔다.

'뿌리들이 전부 다 타지는 않았구나.'

나무뿌리들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다. 넝쿨은 전부 사라졌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남은 나무뿌리들이 벽면에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공에 휘날리는 회색 재들이 한가득한 건 덤이었다.

"콜록! 콜록!"

재를 밀어낼 힘도 없는 우리는 그저 앞으로 걸을 뿐이었다.

어차피 이미 옷에 재가 잔뜩 묻어 있기도 했고, 남은 뿌리들 정도야 군인들이 쉽게 태울 수 있었으니 남은 것들은 그들이 처리할 몫으로 남겨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으니까.

탁- 탁- 탁-

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이 앞으로 움직인다. 발을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내디디면 곧장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에 최대한 천천히, 꾸준히 이동했다.

"···근데 현우야. 너 지수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움직이는 거냐?"

"그럼요. 설마 제가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걷고 있을까 봐요?"

"······."

"······? 왜 말이 없어요."

"아니다. 그냥 가자꾸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진짠데 뭔가 억울하네요."

나는 작게 투덜거리면서 벽면에 난 흔적을 눈에 담았다. 번개가 내려친 것처럼 벽면에 길게 자국은 지수가 기술을 쓰는 것과 동시에 남은 흔적이었다.

이대로 흔적을 따라가면 지수가 있는 곳이 나오겠지. 혹여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있나, 하는 걱정은 접어 두어도 되었다. 스파크가 튄 곳에는 아직 푸른 입자의 잔재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 잔재가 더 진할 수록 제일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으니, 그 자국이 새겨진 벽을 따라 걷는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콸콸콸콸!

"저기 봐요. 지수 있, 잖아요···."

점점 불어나고 있는 물을 밟으며 이동하고 있던 나는 복도 끝에서 지수를 발견하며 입을 열었고, 점점 뒷말을 흐렸다.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지수는 복도에 잔뜩 널브러진 변종들 사체 사이에 있었으니 말이다.

매우 지쳐 보이는 안색을 하는 그녀가 변종들 사체들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말을 흐린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무슨 수행하는 무인처럼 벽에서 쏟아지고 있는 물을 맞고 있기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벽에서 쏟아지는 물의 세기가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수도관이 터졌다고는 해도 저 정도로 나오는 건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수도관이 아니라 무슨 지하수라도 터진 모양새였다.

찰박- 찰박-

발을 살짝 굴러보니 바닥에 고인 물이 어느새 깊은 소리가 날 정도로 밟혔다. 아주 차가운 물이 발목에 닿았다.

"무슨 물이 이렇게- 설마."

난쟁이 칸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인기척을 느낀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를 본 지수가 순간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돌렸고, 멍하니 천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구마구 쏟아지는 물을 등으로 맞으면서.

"···아저씨, 칸. 수맥 터졌어."

······지하수가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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