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1 - 401. 기도 (1)
극적인 만남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수와 무사히 만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안도하지 않을 수 있겠나. 목숨을 건 사투가 비로소 일단락되어 합류를 했는데.
다만, 그 감상이 만나자마자 사라졌을 따름이었다. 허물어진 벽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물이 원인이었다.
"···지수야, 넌 왜 그러고 있어?"
나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지수를 불렀다. 물이 복도에 쏟아지고 있는 건 쏟아지고 있는 거고, 지수가 물을 맞고 있는 영문을 모르겠다. 밑 빠진 독의 구멍을 막기 위해 등을 대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 이거? 기술을 계속 쓰다 보니 열 배출을 몸이 감당하지 못해서 물로 식히고 있는 중이야. 하도 열이 오르다 보니까 지금 완전 어지러워서 움직일 수가 없네. 잠깐만 기다려 줘."
지수가 수행하는 것처럼 차가운 물을 맞고 있던 이유는 열기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연속으로 이능을 사용한 반동으로 몸에 쌓이는 열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그것이 훈련을 할 때 주기적으로 휴식 시간을 가졌던 이유이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배출되는 열기보다 내부에 쌓이는 열기가 많아지면 강한 어지러움증을 호소했으니까.
어쩐지 지금 지수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고, 나를 봐도 평소와 다르게 힘없이 반응하더라니 그런 연유인 모양이다.
열이 너무 올라 정신이 제대로 안 차려진다는 이야기에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이거 물은 언제 터진 거냐?"
"수맥이요? 체감상 한 30분··· 은 넘은 것 같은데요?"
칸의 물음에 어느 순간 갑자기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뿌리가 벽을 허문 것과 동시에 물이 터져 나왔다고 답한 지수. 그녀는 그 물을 보고 처음에 자기 이능이 스파크인 만큼 물과 만나면 위력이 배가 되니 상황이 유리해졌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범위가 넓어진 스파크와 냉각수 역할을 하는 물 덕분에 싸울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비록 물을 맞으면서 싸운 탓에 무전기가 다시 망가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변종들을 처리한 것만 해도 어디던가.
"······."
난쟁이 칸은 그 말을 듣고 첨벙첨벙 걸어가서 복도 벽에 설치된 수도관 밸브를 잠가 보았지만 역시 쏟아지는 물줄기의 기세는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수도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소용없어요. 저도 처음에는 수도관이 터진 줄 알고 나중에 밸브 돌려서 잠그면 되겠지 했는데, 결과는 뭐 보시다시피? 이렇네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밑에 뚫린 통로 엄청 깊어요.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벽을 허물고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향해 있었다. 그 뿌리에는 소방 도끼가 박혀 있었다. 뿌리를 베어내려고 했으나, 실패한 듯했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걸 인지한 칸은 정신을 차리기 위함인지 쏟아지는 물로 세수했다.
콰드득- 덜덜덜덜덜덜-
그는 땅울림을 사용해 터진 수맥을 임시로 막았다. 콸콸콸 쏟아지던 물은 수도꼭지가 잠긴 것처럼 더 이상 물이 쏟아지지 않게 되었지만, 급조한 가림막은 금방이라도 부서질듯이 곧장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터지는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다. 저걸 막으려면 이 일대 전부 다시 보수해야 해."
한 번으로 끝내지 못하는 공사라고 중얼거린 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을 받은 가림막은 더 강하게 떨렸다.
"아무튼 아저씨, 이제 가자. 상태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지수는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의 물기를 쭉 짜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에 푹 젖어 있던 꼬리털도 손으로 드르륵 올리며 물기를 짜낸 건 덤이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몸의 부상이 주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온몸을 잠식한 피로감이 장난 아니었다. 긴장의 끈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함에 따라 누적된 피로가 수맥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도 그 이유였다. 앉았다가 바로 곯아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아직 대피소로 가지도 못했는데 잠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잠에 드는 건 한세아, 예린, 엘리, 최미소를 눈으로 보고 난 이후이어야만 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고개와 몸을 푸르르 터는 것으로 마저 날려 보낸 지수는 이내 내게 달려왔다.
"나도 그래. 지금 누우면 바로 잘 것 같아. 자, 내가 부축해 줄게! 나한테 기대. 어서 대피소로 가자."
"그래, 고마워."
"칸은요?"
"나는 되었다. 어차피 높이도 안 맞고. 알아서 가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거라. 구역이 비틀리면서 바닥이 들린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네!"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지수는 이내 나를 부축하면서 대피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은 옷 너머로 뜨겁게 열이 오른 지수의 체온이 느껴진다. 어찌나 따뜻한지 젖은 옷 특유의 차가움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찰박- 찰박-
어깨 부상의 지혈을 위해 동여맨 옷가지를 더 강하게 조인 난쟁이 칸도 우리를 따라 이동했다. 지하수가 새는 걸 막으니 복도의 바닥에는 더 이상 물이 차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꺼풀도 닫혔다가 겨우 들어 올려졌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도착해서 눈을 붙이고 싶은데, 마음이 급한 것에 비해 몸은 굼뜬 움직임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단순히 피로감이라는 요소에만 의한 건 아니었다.
"······많이 죽었네."
대피소까지 가는 통로에 여러 사람들이 잠든 듯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인 까닭이었다. 모두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그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응. 최대한 많이 살리고 싶어서 움직였는데···."
그 광경을 본 지수는 귀와 꼬리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아래로 늘어진 꼬리 끝에서 눈물이 떨어지듯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인식표는 이미 가져갔구나."
난쟁이 칸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시신들의 눈은 전부 감겨 있었고, 인식표는 사라져 있었다. 벙커 정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군인들이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마음이 무거웠다. 좋게 끝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당연히 우리가 살린 사람도 많겠지. 허나, 누군가가 죽었다면 단순히 수로만 가늠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하나의 생명이든, 수많은 생명이든 그 무게를 측정할 수 없으니까.
어디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는 가볍고, 둘은 무겁던가.
아니다.
그 어떤 죽음이든 간에 무겁지 않은 죽음 따위는 없었다.
그 어떤 죽음이라도 가볍게 넘어갈 죽음 따위는 없었다.
단 하나도 말이다.
"······."
"······."
"······."
나, 지수, 난쟁이 칸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희생된 자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지금 이 순간을 눈에 새겨 부디 다음에는 이보다 더 적게, 더 나아가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대피소로 이어진 통로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이현우씨! 어르신! 김지수씨!"
가장 먼저 우리를 본 군인은 다름 아닌 최명철의 부사수인 김철수였다.
"어? 부사수- 아니, 김철수씨. 다행히 살아계셨군요!"
"예. 죽을 뻔했다가 예린이랑 한세아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 동기들도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우선 아래로 내려가시죠. 대피소로 내려가시면 간단한 응급 처치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다 밑에 계시고요."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라는 기색인 김철수는 서둘러 우리를 밑으로 안내했다. 통로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드문드문 설치된 보안등이 불을 밝히고 있는 덕분이었다.
수정 발전기가 가동 중단되어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을 텐데 어떻게 보안등에 불이 들어온 것일까.
그 답은 의아한 내 시선을 눈치챈 김철수가 바로 알려주었다.
"대피소에 여분의 발전기가 있습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조금이나마 구역을 밝힐 수 있는 겁니다."
그는 통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우리에게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말해주었다. 대피소에서 무전을 통해 여러 상황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난쟁이 조이와 르한은 터진 수도관을 임시로라도 정비하기 위해 군인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는 중이고, 난쟁이 탄은 환기를 위한 구멍을 만들기 위해 아직 지상에 있다고 했다.
대피소를 지키는 최소 인원을 제외한 대다수의 가용 인원들 전부가 벙커를 정리하기 위해 빠진 상황이라고.
"수정 발전기가 가동을 멈추니 벙커 시설 대부분이 전력을 공급 받지 못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많지 않지만, 일단 급한 대로 공기 순환 장치를 최우선으로 유지시키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하다 보니 공기가 빨리 탁해지잖습니까."
어쩐지 통로에 약한 바람이 계속해서 불더라니. 신선한 공기를 계속 유입시키고 있는 중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뭐, 저는 여기서 이만 다시 올라가 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그, 최명철 상병님은···. 아니, 아닙니다. 나중에, 기회가 따로 있겠죠. 무전으로 간단하게 연락해 놓았으니 그냥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최명철을 언급한 김철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몸을 돌렸다. 지금 물어볼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윽고.
"현우씨! 지수야!"
"오빠! 언니!"
대피소로 들어온 나, 지수, 칸을 반겨 준 것은 부상자를 돌보고 있던 한세아와 예린이었다. 뒤이어 엘리와 최미소가 따라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이 무사하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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