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02화 (403/497)

Chapter 402 - 402. 기도 (2)

"······."

낯선 천장이다. 이곳 벙커에 온 이후로 처음 보는 천장. 그건 대피소 천장이었다. 나는 그 밑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확 차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각형의 공간 안에는 부상자들이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침대도, 다른 여타 가구도 없는 대피소 곳곳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자리를 잡은 부상자들은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채 애써 잠을 청하고 있었다.

미약한 빛이 미처 밀어내지 못한 어둠에 기대서.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헉! 어욱···."

아니, 일으켰을 것이다. 일어나기 위해 몸에 힘을 주는 순간, 머리를 찌르르 울리는 고통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체보다는 상체가 고통이 심했다. 아무래도 무기를 휘두르는 과정에서 팔과 심장이 무리를 한 탓이겠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보이는 붕대가,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둘러진 붕대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다시 기절할 뻔했네.'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어찌나 아프던지. 결국 어쩔 수 없이 도로 몸에 힘을 풀며 멍하니 천장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처럼 앓는 소리를 내는 건 덤이었다.

몸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선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만 돌려주변을 좀 더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돌렸다. 내가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 최미소가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내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그때, 나는 그녀들을 곧장 발견할 수 있었다.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 최미소.

그녀들은 이렇게 짝을 지어서 자고 있었다. 엘리와 최미소는 그나마 딱딱한 바닥에 누워서 옷가지를 뭉쳐 만든 베개에 머리를 기대서 잠을 자고 있었지만, 지수, 한세아, 예린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벽에 기댄 채로 자는 중이었다.

많이 피곤했는지 아주 세상 모르고 자는 모습이었다. 엘리와 최미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에 부상을 치료해준 게 그녀들이겠지. 물에 젖어 있던 옷도 갈아입혀진 상태였고.

바로 그때.

저벅- 저벅-

털썩···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옆에 앉았다. 정신이 아직 멍한 상태라 빠르게 반응하지는 못했으나, 나는 다가온 사람이 누군지 곧 알 수 있었다.

"일어났어요? 생각보다 금방 일어나셨네요."

낯이 익은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박지영 소위였으니까. 아르마딜로 변종의 접근을 알려 벙커에게 경고를 해주었던 그녀 말이다.

"···박지영씨!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얼마 안 됐어요. 저 사람들이랑 교대하고 한 1시간 정도? 지난 것 같네요."

박지영은 부목을 대고 있는 팔을 들어 보이며 벽에 기대 자는 지수, 한세아, 예린을 가리켰다. 그녀가 말하기를 일행은 나를 간호하다가 방금 막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 자신도 부상을 입은 상태인데, 내 일행에게 배려를 해준 것이 고마웠다.

"딱 봐도 피곤해서 기절 직전인데 당신이 일어날 때까지 버틸 기세라 그냥 제가 보고 있다가 일어나면 알려 준다고 하고 재웠어요."

"배려 감사합니다. 다른 말도 남기지 못하고 기절해서 뜬눈으로 보고 있는 중이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배려라······. 뭐 그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물어볼 것도 있고···."

순수한 목적의 배려는 아니라며 말을 흐리는 박지영. 그녀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어딘가로 향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탁한 푸른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꼬리가 힘없이 축 늘어진 건 덤이었다.

"······."

그 눈을 본 나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물어볼 것이 뭔지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분명 최명철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지금 당장 대화하자는 건 아니예요. 저도 부상자가 막 정신을 차린 직후에 말을 계속 건 정도가 아니라는 염치는 있거든요. 그 부상이 벙커를 지키면서 얻은 부상이라면 더욱이요. 그러니까 저는 나중에 몸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입만 여는 것 정도라면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

박지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뭔가 할 말은 많은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속이 타는 듯 이내 파우치에서 스포츠 음료 두 캔을 꺼냈고, 뚜껑 개봉 후 한 캔은 빨대를 꽂아서 내게 건넸다. 자기 몫을 마시는 김에 나눠 주는 건가 보다.

마침 목이 타던 참이었기에 나는 감사히 음료를 쭉 들이켰다. 약간은 짜고, 적당히 단맛이 식도를 통해 넘어갔다. 바싹 말라 있던 상태인 목이 적셔지니 숨 쉬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현재 손목 시계가 알려주고 있는 시각은 오후 1시 20분. 바깥이 대낮인 것에 비해 대피소는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빛이 지하까지 들어오지 않고, 수정 발전기가 아직 재가동 전이기에 전력이 충분하지 않은 탓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았네.'

자고 일어났더니 일주일이 지난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내심 안도한 나는 눈에 아른 거리는 옅은 빛과 대피소 군데군데 자리를 잡은 어둠에 파묻혀 박지영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다른 애들에게 들었어요. 명철이가 유인 장치를 가동해서 이상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냈고, 그 덕분에 장벽에 몰려들었던 괴물들이 전부 그곳으로 몰려갔다고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탄은 제게 그 기둥은 예상외의 효과라고 했어요. 유인 장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하던데, 혹시 그 기둥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알고 있는 게 있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상이 가는 건 딱 하나 있습니다."

나는 박지영에게 최명철이 가기 전에 나와 한세아가 건넨 부적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한세아가 푸른 입자를 최대치로 집어넣은 강화탄이 유인 장치와 만나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추측을.

"···부적."

그리 중얼거린 박지영은 대피소에 누워 있는 부상자들과 나. 그리고 지수, 세아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부상자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부상을 돌보면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그들이 쥐고 있는 건 바람이며, 소망이자, 부디 이 사람이 살아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조금 화제를 벗어난 이야기지만, 감사 인사는 제가 받을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 맞아요. 당신들 덕분에 벙커가 습격을 이겨 낼 수 있었고, 당신들이 건넨 강화탄 덕분에 명철이가 살았을 가능성이 커졌으니까."

박지영이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명철이는 살아있을 거에요. 무전으로 살아서 보자고 말했다면서요. 그럼 명철이는 숨어서 살아남았을 거에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남자니까. 그러니까 저는 믿어요.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한편, 내게 확신을 바라는 시선으로 말하는 박지영에게 해 줄 말은 딱 하나였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죠? 다행이에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서.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자기 꼬리가 힘없이 늘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게 뒤로 숨긴 그녀가 애써 웃으면서 답했다. 표정은 웃는 낯이었으나, 그 표정의 이면에는 깊은 불안감이 깃들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아니, 아닙니다. 후우, 부상은 어떻다고 합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최명철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낮다고 들은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내뱉을 말을 곱씹어서 다른 물음을 던졌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박지영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만이 중요했다.

지인의 생사에 관련된 문제는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살아 있을 거라고 믿을 뿐이었다.

그것이 미련, 혹은 믿음이었으니까.

지금 불안한 사람을 달랠 수 있는 건 한 줄기 희망뿐이었으니까.

"아, 이거요? 뼈에 금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이것 외에도 여기저기가 다 엉망이예요. 당신만큼 심한 건 아니지만요."

어떻게 된 거냐는 내 시선에 팔에 덧댄 부목과 붕대가 감긴 부위를 살짝 보여 준 박지영은 무전이 끊겼던 당시를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그 변종이 아무런 전조없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바로 놈을 쫓아갔는데, 갑자기 이상한 괴성을 내질렀어요. 그 다음에 뭔가 기묘한? 이상한? 아무튼 이상한 느낌이 들더니 어느 순간 바닥을 나뒹굴고 있지 뭐에요? 옥상에서 옥상으로 이동 중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단순히 뼈에 금이 가는 것에 그치지 않았겠죠."

총소리도 마구 내어 악성 변이자들에게 위치가 특정된 상황에서 정신을 중간에 잃은 탓에 하마터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뻔했다는 박지영.

나는 그녀가 말하는 파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파장은 내가 군인들과 함께 장벽에서 몸소 겪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거리가 조금 있던 우리와 달리 박지영은 지근거리에서 포효를 맞은 탓에 단순히 균형을 잃는 것만이 아닌 파장이 의식에도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살아서 다행입니다. 갑자기 통신이 끊겼을 때 걱정 많이 했거든요."

"그래요. 살아서 참 다행이죠. 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쉬고 있어요.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부상이 워낙 심한 상태였어서 하루는 꼬박 더 누워 있어야 할 거예요. 저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에요. 일단 푹 쉬고, 푹 자는 것. 그러니까 한 숨 더 자요."

박지영은 괜히 움직이려고 하면 상처가 덧난다며 주의를 줬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고 싶다면, 지금은 푹 쉬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현우씨 일행도 지금은 자게 내버려둘게요. 자세가 많이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건들면 바로 깰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겠으니 어쩔 수 없죠. 대신 어디 불편하면 저 바로 불러요."

"알겠습니다."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대피소 내부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중환자실을 방불케 하는 많은 부상자들이 누워 있고, 다른 사람들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는 모습이 다시 한번 보인다.

구석에서 인식표를 꼭 쥐고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부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에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건 참으로···.

씁쓸한 표정을 절로 짓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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