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03화 (404/497)

Chapter 403 - 403. 기도 (3)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온몸이 뻐근한 와중에도 특히 팔이 뻐근한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건지 처음 눈을 떴을 때에 비해 눈꺼풀이 무겁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팔을 베고 누워 나를 보고 있던 푸른 눈망울과 눈을 마주쳤다.

"······."

"오빠, 잘 잤어요?"

푸른 눈의 정체는 바로 예린이었다. 예린은 순간적으로 귀를 파닥거리며 나를 더 빤히 바라보았다.

"···응.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

"30분 정도요. 언니들! 오빠 일어났어요!"

아이는 내가 일어났다는 걸 즉시 다른 일행에게 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 달라붙어 있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휑한 느낌이 전해진다. 따끈따끈하니 좋았었는데.

"현우!"

근처에서 지수와 한세아에게 붕대를 새것으로 갈아주고 있던 최미소와 엘리가 내가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지수가 환한 기색으로 꼬리를 흔들며 냅다 달려온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아저씨! 일어났구나!"

"현우씨, 여기 물 좀 마셔요. 입술이 완전 퍼석퍼석해졌어요."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 최미소에 의해 순식간에 북적북적한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된 내 주위. 나는 한세아가 건넨 생수로 목을 축이는 한편,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40분. 기절한 시간만 따지면 거진 12시간 가까이 지난 시간이었다. 물론, 현재 시간에 상관없이 대피소 내부는 여전히 애매한 밝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점심때와 달라진 점을 한 가지 꼽자면, 보안등이 추가 설치되어 내부 밝기가 조금은 더 밝아졌다는 것일까.

"마침 잘 일어났어, 아저씨. 곧 저녁 먹을 시간이라 강제로라도 깨울 생각이었거든. 그냥 푹 자게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지만, 빈속을 채우고 자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저녁? 우리 지금 먹을 게 있던가?"

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금 우리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물자를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게, 새벽에 일어난 습격 탓에 대부분의 물자는 강제로 대피소 위에 두고 와야 했으니까.

물자가 전부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창고를 덮친 잔해를 치우기 전까지는 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내가 마시고 있는 물을 비롯해서 여분의 비상 식량이 대피소에 보관되고 있기는 했으나, 그 양은 현재 있는 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 실정이었다.

내구도가 강할 뿐, 여러모로 부족한 요소가 많은 대피소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배급 받는 거지. 내가 들어 보니까 창고 복구는 최우선으로 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하더라."

혹시 창고가 복구되었냐는 내 물음에 고개를 젓는 지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몸은 좀 어때? 갑자기 기절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 걱정했어?"

"그럼 걱정했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 ···그래도 뭐, 어느 정도는 기절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부축하면서 올 때 살펴본 아저씨 상태가 진짜 안 좋기는 했거든. 뼈만 안 부러졌지 나머지가 전부 망가진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요! 전 사람 피부색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니까요? 죽은 줄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요. 다행히 숨은 쉬고 있어서 바로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요."

한세아가 내 얼굴을 콱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그녀는 혹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상처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중이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볼이 눌려 살짝 어눌한 말투로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 최미소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최미소의 품에 안겨 있는 지안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툭하면 죽는 개복치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개복치는 알려진 낭설과 다르게 툭하면 죽는 생물도 아니었다.

"세아씨는 몸 어떻습니까? 많이 안 다쳤죠? 엘리랑 예린이 너희도?"

"네, 저희는 다 괜찮아요. 기껏 해야 넘어져서 긁힌 상처 정도만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찰과상 정도는 금방 나아요."

붕대는 감고 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라는 한세아와 예린, 엘리. 그녀들은 각자 건재함을 알리며 헤헤 웃었다.

"박지영씨는요?"

나는 이어서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 난쟁이 칸은 현재 벙커 시설 복구한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중일 테니 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닌 나와 일행들이 쉴 수 있게 배려해준 박지영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아, 그 사람이라면 저기 있어요."

내 물음에 답한 최미소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어느 구석을 가리켰고, 가리킨 그 구석에는 옷더미와 함께 담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 옷이 한가득 쌓인 것이 아닌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고양이 꼬리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던 것을 보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피곤한 기색으로 옷을 막 모으더니 저러고 자더라고요. 저렇게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고 했어요."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보며 한세아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박지영은 자신들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하더니 구석으로 꾸물꾸물 기어가서 바로 자기 시작했다고.

'내가 잠이 든 와중에도 계속 옆에서 지켜 주었나 보네.'

아무래도 외부에서 활동을 하던 버릇이 몸에 남아 저런 습관이 형성된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배급 시작하겠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제자리에서 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럼 저희가 가겠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 줄을 서 계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P박스를 들고 온 다섯 명의 군인들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외쳤다. 지수가 말했던 배급을 담당한 군인들이었다.

부상자들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군인의 외침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시대로 줄을 섰다. 홀로 부상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지금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누군가와 조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제가 받아 올게요. 여기 있어요."

"저도 따라갈게요!"

최미소와 엘리가 배급을 받아오겠다 말하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줄을 서기 위해 일어났다.

"물자가 넉넉하지 않아서 3인당 생수 한 병과 통조림 한 캔, 건빵 한 봉지입니다!"

군인들은 질서 있게 줄을 선 사람들의 인원을 체크하면서 물자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눠 주고 있는 물자의 양은 3인을 한 묶음으로 기준 삼은 것이었다.

"빠르면 내일 아침, 늦으면 저녁까지 지금 나눠드린 걸로 버티셔야 합니다!"

한 끼로 나눠준 것이라면 양이 매우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나눠준 배급 주머니는 한 끼가 아닌 하루치 이상이었기에 양이 적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3인 기준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현재 벙커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워하면서도 군말 없이 배급 주머니를 받아 갔다.

길게 늘어선 줄은 점점 들어가고, 다시 부상자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한 남성이 입을 열었다.

"···이게 끝이요?"

자기 손을 꼭 붙잡은 아이를 잠시 바라본 중년의 남성이 한 말이었다. 그는 한 손아귀에 전부 잡히는 식량을 눈에 담았다. 아이의 엄마는 부상을 당한 듯 곁에 없었다.

"예, 아직 창고 쪽 잔해를 치우지 못해서 당장 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 죄송합니다. 구역 정리만 끝나면 바로 양을 늘려드릴 테니 지금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들은?"

"예?"

"당신들은 어떻게 물자를 받고 있냐는 물음이요."

"저희는 남은 물자를 기준으로 배급을 받을 예정입니다."

아직 배급을 받지 못했으며 대략 5인을 한 조로 삼아서 물자를 받을 것 같다는 젊은 군인의 말.

"···그렇구만."

중년의 남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 절뚝거리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식량이 담긴 상자가 있는 곳이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남성을 말려야 하나, 그냥 두어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들려온 소리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소리와 달랐다.

고함 소리도, 욕설이 섞인 말도, 가벼운 주머니가 무거워지는 소리도. 전부 아니었다.

···덜그럭!

그저 상자가 다시 채워지는 소리였을 따름이었다. 중년 남성의 배급 주머니가 오히려 가벼워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내 몫이오. 다섯 명이서 고작 이걸 나눠 먹는다고? 아니, 내 생각에는 우리 다 나눠 주고 나면, 남은 건 젊은 친구들 다섯은커녕 여섯이서 나눠 먹어도 모자랄 거요. 그걸 누구 코에 붙이나?"

하루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라며 중얼거린 남성은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다리를 다쳐서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오. 내가 먹는 것보다 계속 움직이고 있는 당신들이 조금이라도 더 먹는 것이 맞겠지. 어차피 하루나 이틀 정도만 참으면 그만인 일이고."

"······."

"그리고 사과하지 마쇼. 감사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당신들 덕분에 아내가 살 수 있었거든. 고맙소."

떨어지는 잔해가 머리를 강타해 정신을 잃고 넘어진 아내를 도와 준 군인들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족이 흩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을 끝으로, 중년 남성은 아이를 데리고 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감사합니다! 군인 형들!"

아빠의 손을 놓지 않고 움직이는 아이가 남은 한 손을 흔들며 군인에게 외친다.

비록 줄을 서기 전과 선 후의 발걸음은 똑같이 가벼웠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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