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04화 (405/497)

Chapter 404 - 404. 기도 (4)

"······감사합니다."

중년남성과 아이가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보던 군인이 입술을 수없이 달싹거린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무슨 의미에서 한 말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군인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박스가 있는 곳에서 돌려 정면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온 사람들이 그제야 군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순간이었다.

배급된 물티슈로 몸과 옷에 묻은 흙먼지를 어느 정도 닦아낼 수 있었던 자신들과 달리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군인들은 상황 종료 당시의 차림새 그대로였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이 곧장 볼 수 있는 찢어진 군복, 긁힌 상처 위에 만들어진 피딱지, 얼굴에 잔뜩 묻은 검댕이, 눈가를 잠식한 피로감, 말라서 하얗게 일어난 입가. 당시보다 더 좋지 않게 변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닥에 몸을 뉘어 조금은 쉴 수 있었던 자신들과 다르게, 군인들은 여전히 벙커를 정리하는 중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이거 제가 아껴 놓은 건데 줄게요! 엄마가 그랬는데 일할 때는 달달한 걸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신발 코로 바닥을 툭툭 치고 있던 한 아이가 엄마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엄마의 손을 놓고 군인들에게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꽤 오랫동안 주머니에 보관되고 있었던 듯 사탕은 표면이 눅눅하게 녹아 비닐에 달라붙은 상태였다.

부스럭-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군인의 손에 올려진 작은 사탕 하나. 그것이 내는 소리에 군인은 무의식적으로 열려있던 손을 닫았다.

가벼운 무게감을 느낀 군인은 흠칫 놀라며 아이를 다시 불러 사탕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받아주세요."

이번에는 아이의 엄마가 군인을 막았다. 그녀는 어느새 자기 손을 붙잡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는 중이었다. 피곤하고 지친 안색이기는 했으나, 분명 웃고 있었다.

"으이구, 언제 철이 들었나 몰라···."

"나 철 안 들었는데?"

"그럼 좀 더 컸다고 하자."

"응!"

바싹 굳어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린 걸 느낀 모자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군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엄마 쪽이 말을 이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아무튼 사탕은 받아주세요.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까 그 사람 말이 맞아요. 되려 저희가 감사해야죠. 이 자리에는 없지만, 제 남편도 군인이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얼마나 힘든지 이해가 가요. 힘내세요."

"맞아요! 군인 형들 덕분에 살 수 있었어요! 엄마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슬픔을 아직 달래지 못한 사람들도 알았다. 새벽에 습격을 당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살렸다는 건 결코 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 누군가가 계속해서 지켜 주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내 모녀가 배급을 받고 돌아가고, 그 뒤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 줄어갈 때마다 상자 속 내용물은 비워지다가 다시 차기를 반복했다.

일부 사람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잔해를 치우고 있는 군인들을 위해 자신들의 몫을 나눠준 까닭이다.

물론, 누군가가 유의미하게 더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은 당연히 되지 못했다. 하지만 상자가 바닥을 드러내지 못하게 할 정도는 되었다.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들의 물음에 대한 군인들의 답은 아직은 괴물이 전부 사라졌다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일단 대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확신이 서고 나면 토사와 잔해를 치우는 걸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곧장 알았다며 말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해산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배급 줄도 사라졌다.

다시 부상자들 곁을 지키기 시작한 사람들과 함께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최미소와 엘리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들은 이어지는 일련의 광경을 보자 걱정에서 안도감과 묘한 감정이 깃든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서로 눈을 맞댄 최미소와 엘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고 있는 중이었다.

"잘 해결됐네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게요."

한세아가 내 팔을 끌어안으며 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화는 생길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이기에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컸다. 본디 동물은 본능적으로 공감보다는 자기 고통을 남들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살아남는다는 본능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런 경향이 발현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같은 상황과 집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서로 똘똘 뭉치는 것을 택했다고 하는 게 옳았다.

당연히 불만이 없는 사람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모두가 불만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단지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도 지금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사회와 배려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않은가.

이윽고.

"저희 왔어요. 7명이니까 일단 주머니 2개! ···에서 1인분을 더 받아왔는데, 저흰 아기도 있어서 물을 좀 더 많이 받아왔어요."

최미소와 엘리가 주머니 2개를 들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나와 지수, 예린, 한세아 앞에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음···. 확실히 적긴 적네. 아저씨, 이따가 내가 우리 방에서 뭐 좀 가져올까?"

주머니 속 내용물을 본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하루만 참자. 아마 우리가 나가서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따라 하려고 할 거야."

모든 것이 정리된 상황이 아니건만, 부족한 물자를 가져오기 위해 대피소에서 벗어난다면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방 안이나 파묻힌 창고에 있는 물자를 가져오기 위해 나가겠지.

그렇게 되면 시설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군인들의 통제를 따를 때였다.

난쟁이들 없이 함부로 잔해를 치우다가 2차 피해가 발생해서는 안 되니까.

"그래, 지수야. 오늘은 이걸로 버티고 움직이는 건 내일부터 하자. 그리고 어차피 우리 방에 가도 안으로는 못 들어갈 걸?"

오늘 먹을 양을 나누는 한편, 지수를 말리는 한세아.

"엥? 왜요?"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토사가 문을 막고 있었거든. 뿌리가 천장을 부숴서 흙더미가 문 앞에 한가득 깔려 있더라."

천장이 무너진 탓에 흙을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을 거라는 말에 지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귀가 살짝 앞으로 쳐졌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이거라도 나눠 먹어요."

"와! 밥!"

예린은 잠자코 있다가 지수가 통조림을 까자 풍기는 냄새에 꼬리를 일자로 바짝 세웠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꼬리가 단순히 냄새만으로 생기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내 밥···."

그리고 자기 몫으로 나온 양을 보고 몸이 다시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수가 예린이 어리다고 1인분을 제대로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순히 평소보다 먹을 수 있는 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까닭이다.

사정은 알고 있어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예린, 제 거라도 먹을래요···?"

이러다가 녹아서 사라질 것 같은 예린을 본 엘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슬라임이 된 예린을 콕콕 찔렸다.

"아뇨! 저는 참을 수 있어요! 어른이니까! ···내일은 분명 배불리 먹을 테니까!"

"그래. 오늘은 그걸로 참아."

아이의 말에 지수, 한세아, 최미소, 엘리, 나는 킥킥 웃었다. 어른이라는 아이의 주장보다 눈치를 살짝 보다가 덧붙인 뒷말이 본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된 거야? 변종한테 정신 조종 당했다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잘게 나눠진 통조림을 한입에 털어 넣은 지수가 기지개를 쭉 피면서 물었다. 지수는 새벽에 예린과 엘리가 방을 나갔던 것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신 조종이라고 하니까 뭔가 좀 이상해요···."

지수의 말에 엘리와 예린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지수처럼 통조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예린이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바닥에 푸른 가루를 살짝 뿌렸다.

"잠시만요. 금방 보여줄게요. 이걸 이렇게 하면······."

아이가 바닥 위에 푸른 가루를 톡톡 건드리는 것과 동시에 위치를 옮긴 푸른 가루들은 어떤 장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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