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05화 (406/497)

Chapter 405 - 405. 기도 (5)

예린이 바닥에 가루를 톡톡 뿌린 직후, 푸른 가루는 아이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며 일종의 판을 형성했다. 반질반질한 모양새의 판은 이내 무언가를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예전에 우리가 보았던 디스플레이의 영상을 보는 느낌을 주었다. 푸른 가루 위에 반투명한 판이 생기더니 그 위에 예린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화면 속의 예린이었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잠자코 예린이 하던 것을 보던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잘못 보았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지수와 한세아, 최미소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엘리는 이미 몇 번 보았던 것인지 신기해 하기는 했어도 우리만큼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수정의 원리를 이용한 거에요! 그, 뭐였지? 흡수력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걸로 제 기억이랑 약간의 상상을 수정에 담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예린은 가루에 손을 여전히 대고 있는 한편,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이는 지금 손을 떼면 푸른 가루 위에 떠오른 자기 기억을 남들이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가 말한 수정의 원리는 저번에 칸이 말했던 것과 동일했다. 소원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수정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능숙하게 다룰 수는 없어서 가장 최근의 기억만 겨우 볼 수 있고, 그 기억마저도 간단하게 사진처럼 보여 줄 수 있지만요.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오래된 기억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최근의 기억만 볼 수 있다는 말에 무어라 말하려던 최미소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인 그녀는 품에 안은 지안이를 조용히 눈에 담았다.

"그렇구나···."

"현우, 이거 생각보다 엄청 대단한 일이에요. 입자 감응력이 어지간히 높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시도하지도 못 하는 일이거든요. 제 고향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완전 소수였어요."

놀라워하는 기색인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엘리였다. 그녀는 수정의 조각도 아닌 이런 가루와 동기화해서 자기 기억을 보여 준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오···. 대단하네!"

지수가 박수를 짝짝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가루가 띄우고 있는 예린의 기억 영상을 톡톡 건드렸다.

처음에 잠시 나타났던 예린이 사라지고 나서 아직 어떤 장면이라고 할 것도 없이 현재는 단순히 검은 화면에 불과했으나,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맞아! 나는 대단해!"

예린은 더 말해 보라는 듯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며 우쭐거렸다.

"맨날 가루 가지고 놀길래 아직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예린이 너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그래! 나는 다 컸다구!"

"아니, 다 크지는 않았지. 키도 작으면서."

"아니야아······."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상체는 이어진 지수의 말에 예린은 다시 슬라임이 되고 말았다.

"잘 먹고 잘 자면 키는 쑥쑥 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보여 줘. 그거 보고 자게."

이러다가 또 흐물흐물하게 녹아 없어질까 싶었던 나는 아직 성장기이니 더 클 거라며 예린을 달랬다.

대피소 내부의 온도는 계속 켜져 있는 보안등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체온 덕분에 그다지 낮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몸의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와 주변의 온기가 합쳐지니 다시금 피로함이 몰려온 까닭에 아이의 이야기만 듣고 다시 잠에 들어야 할 듯했다.

"아무튼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슬라임에서 사람이 된 예린. 아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일행의 시선을 판에 집중시켰고, 곧장 푸른 가루에 힘을 흘려 보내서 어떤 장면을 보여 주었다.

판에 이내 떠오른 장면은 예린이 엘리와 함께 제 2광장에 있는 순간이었다.

"저는 방에서 잘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 뜨고 보니까 여기에 있었어요. 엘리 언니랑 같이요. 지수 언니랑 오빠도 알다시피 이러다가 나무뿌리 때문에 광장이 무너졌고, 부사수 아저씨랑 다른 군인 아저씨들이 달려 왔었어요."

"······."

"그리고 뿌리에서 나온 이상한 괴물들이 우리를 전부 둘러싸서 엄청 위험해졌죠. 제 눈으로도 잘 보이지 않아서 진짜 무서웠어요. 군인 아저씨들은 저희 보고 막 도망가라고 하는데, 제가 누구예요? 용감한 저는 그러면 다 죽는다면서 같이 싸우자고 했어요!"

예린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용감하게 행동했던 당시의 상황에 지었던 표정인 모양이다. 아이가 가루 판 위의 장면을 바꾸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바뀐 장면은 군인들과 함께 서 있는 예린이 한 움큼 집은 가루를 사방으로 뿌리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제가 군인 아저씨들이 괴물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가루를 뿌렸는데-."

예린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가려던 그때.

"아, 잠깐만요."

엘리가 손을 들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그녀는 킥킥 웃으면서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예린 표정이 이렇게 씩씩하지 않았었어요.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표정이었다구요. 그리고 밑에 흙더미랑 잔해는 다 어디 갔어요?"

같이 있었던 엘리의 지적에 판 위에 떠오른 장면은 슬그머니 바뀌었다. 다부진 표정으로 가루를 뿌리던 예린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은 아이가 나타났다. 발치에 가득 쌓인 흙은 덤이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기억하고, 이런 구도였을 것이다, 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보니 어느 정도 미화가 추가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엘리의 지적에 더 자세한 기억과 상황이 떠올라서 바뀐 것이고.

"······."

"왜요?"

뭐가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 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배경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요. 이야기에 방해가 안 되는 아주 사소한 문제란 말이예요. 아무튼, 그렇게 가루를 뿌리니까 괴물들의 시선이 주변에 엄청 많았어요."

엘리에게 뚱한 시선을 보내는 예린은 쭈구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더 보고 싶지 않은지 서둘러 장면을 바꾸었다.

다음으로 바뀐 장면은 예린과 군인들을 포위한 괴물들의 수많은 안광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동공을 가진 괴물들의 눈은 당시 상황이 매우 위험했다는 걸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단순히 말로서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눈으로 보게 되니 와닿는 느낌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자 예린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귀와 꼬리도 같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예린."

엘리가 다시 아이를 불렀다.

"···또 왜요!"

마찬가지로 예린도 다시 엘리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싶은 표정이었다.

"저는 왜 없어요? 아까 한번 놀렸다고 삐쳐서 저 지워 버린 건 아니죠?"

"아, 진짜. 아까도 말했듯이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예요. 아직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다구요. 진짜로 아무튼 군인 아저씨들이랑 저랑 힘을 합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려고━"

"저도요."

"···네, 엘리 언니도 같이 싸우려고 한순간에 세아 언니가 나타났어요. 총을 빵빵 쏘면서요! 저랑 엘리 언니, 군인 아저씨들은 그렇게 구해진 거에요. 이 뒤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잘 기억이 안 나구요."

예린은 푸른 가루를 조작해서 강화탄을 쏘고 있는 한세아를 그려내었다.

후방에서 밀려오는 물과 함께 등장한 그녀가 어둠을 밝히면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던 아이는 가루에서 손을 떼고 현실의 한세아에게 안겼다. 가루 위에 그려진 장면이 사라지는 건 거의 동시였다.

"언니가 저희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와서 엄청 다행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분명 누군가는 크게 다쳤을 테니까요. 빨리 와줘서 감사해요."

한세아의 부드러운 품에 몸을 맡긴 예린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당연한 거지.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방에 딱 두 명이 없어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냥 머리가 하얗게 변하더라. 다음부터는 묶어 놓고 자야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흠칫 몸을 굳힌 예린은 슬그머니 한세아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말로 묶어놓고 잘까 봐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건 덤이었다.

'다행이다.'

이런 식으로 엘리, 지수, 한세아와 예린이 서로 말장난을 할 수 있는 것, 위험천만했던 당시 이야기에 장난을 툭툭 걸 수 있는 것은 전부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더라면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터다.

"궁금한 건 풀렸어요, 오빠?"

"응, 전후 사정을 아니까 이해가 가네. 근데 결국 그 변종들은 뭐였던 걸까?"

나는 군인들이 벙커 내부를 정리하면서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변종들의 사체를 떠올렸다. 변종들의 사체 중 일부는 그것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사용될 것이고, 나머지 일부는 그것들의 소재를 사용할 수 있나 알아보기 위해 사용되겠지.

일반 나무 인간들과 달리 그 변종들은 내부가 썩은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 말은 즉 검은 입자에 의해 몸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검은 입자가 없어도 몸이 유지된다면 그것들 능력의 비밀도 풀어볼 수 있지 않겠나.

'아니면 하다못해 우리가 반투명해지는 능력을 뼈나 다른 소재로부터 얻을 수도 있겠고.'

물론, 지금으로서는 단순히 희망 사항일 뿐이다.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그 괴물들은 정령을 잡아먹는 포식자였을 것 같아요. 바람 화살로 죽은 괴물의 배를 갈라 보니까 오멘이 수두룩하게 나왔었거든요."

"···그걸 갈라 봤어?"

"네! 뭐라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슈확! 갈랐는데요? 어···, 이상한 가요? 갈무리를 하는 건 사냥의 기본이잖아요?"

조금 전까지 변종들의 사체를 이용해서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닌 직접 행동했다는 걸 들은 몸이 어쩔 수 없이 내보내는 반응이었다.

"아니야, 잘했어."

"그렇죠? 어쨌든 정령을 잡아먹는 그 괴물들 때문에 벙커에 있던 정령들이 급하게 사라졌다고 보면 돼요. 반지로 불러도 안 나오는 건 이미 소멸되었거나 반지에 반응할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났기 때문이겠죠."

엘리는 변종들의 존재를 확신하기 전까지 별다른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탓에 습격에 무력하게 당한 것이라 말했다.

이런 괴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다음부터는 오늘처럼 이렇게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말을 끝으로, 궁금증이 해결된 나와 지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잘까요?"

팔을 위로 쭉 펴 기지개를 킨 한세아가 한 제안. 나, 지수, 예린, 최미소, 엘리는 곧장 동의하며 나란히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변에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금세 곯아떨어진 것이다.

비록 몸을 덮을 수 있는 담요도 머리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베개도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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