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7 - 407. 기도 (7)
"이 녀석이 어른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난쟁이 칸이 세상 꼴 참 잘 돌아간다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럼 좀 적당히 부려 먹으시라고요. 그리고 이제 제 건빵 그만 드세요. 제 거예요."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박지영은 투닥거리면서 건빵 봉지 입구를 닫았다.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으려던 칸의 손은 입구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먹을 것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말거라. 어차피 내일이면 이런 건빵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지 않느냐."
"죄송한데 전 지금 당장 배가 고파요. 게다가 저는 환자잖아요. 뭐라도 먹어 둬야 부상이 빨리 낫지 않겠어요?"
"누가 보면 나는 환자가 아닌 줄 알겠구나. 오냐, 알겠다. 더 뺏어 먹지는 않으마. ······근데 말이다. 후회 하지 않겠느냐?"
"···무슨 후회요? 저는 후회 안 해요."
박지영은 칸의 말에 몸을 흠칫했다가 이내 고개와 꼬리를 좌우로 저었다. 칸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건빵 봉지를 들고, 건빵을 하나씩 꺼내 오도독 씹었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건 내가 먹어야겠다."
그리 말한 칸은 박지영의 손에 의해 들어가지 못했던 손을 펼쳐 보았다. 그의 손에는 하얗고 울퉁불퉁한 설탕 덩어리가 들어 있는 작은 봉지가 있었다. 건빵 봉지에 하나씩 들어 있는 별사탕 주머니였다.
"······어? 칸 어르신, 잠깐-."
박지영은 건빵을 씹는 작업을 중단한 채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칸이 별사탕 주머니를 뜯어서 한입에 털어 넣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이제 보니 건빵 봉투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들어갔다 나오는 손이었던 모양이다.
으적- 으적- 으적-
"아. 아···. 아···!"
별사탕이 모조리 사라진 빈 비닐만 보고 차마 말을 잇지 못 하는 박지영. 심적 충격이 큰 것인지 그녀는 행동을 멈춘 상태였다.
"어이구, 참 달구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마침 당이 떨어진 느낌이었는데 그게 한 번에 해소가 되는 기분이야."
난쟁이 칸은 보란 듯이 별사탕을 인정사정 없이 이로 부수며 씹었다. 나이가 들어 늙기는커녕 매우 정정한 모습이었다.
"나이가 들기는 무슨! 아니, 나중에 아껴 먹으려고 퍽퍽해도 꾹 참은 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대체 언제 가져간 거냐고요!"
"먹을 것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말했을 터다. 나중에 돌려주면 되지 않느냐."
분개한 박지영에게 나중을 기약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난쟁이 칸. 그는 오늘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원래 가장 맛있는 건 제일 먼저 먹어야 손해를 보지 않는 법이다. 이참에 그걸 배운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넘어 가자꾸나."
"···아, 진짜!"
박지영과 난쟁이 칸은 다시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연대장님, 총 사망자 수는 얼마나 됩니까."
나는 박지영이 묻지 못한 질문을 대신 연대장에게 물었다. 그러한 내 질문에 박지영과 칸은 행동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거나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 습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연대장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도 그럴게, 마지막까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그이지 않은가.
"사망자라···. 우선, 대피소로 무사히 피난한 사람들 중에서 죽은 시민들은 없다네."
대피소에도 변종들과 나무뿌리들이 침입하려고 했으나, 난쟁이 르한과 조이의 활약으로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다는 연대장. 처치 곤란이던 나무뿌리는 내가 한 일 덕분에 막아 낼 수 있었다고 말한 그는 조금 떨리고 있는 손을 맞잡는 것으로 떨림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장벽과 내부 경계를 담당한 군인들에게 발생했지. 눈으로 볼 수 없는 괴물들과 벙커를 무너트리려는 나무뿌리들 때문에 많은 인원이 죽고 말았어."
"······."
"그 수는 정확히 31명. 완전히 짓이겨져 형체도 제대로 남지 않은 시신들을 합한 수이네. 아직 치우지 못한 잔해에 깔려 사망한 시신들을 합한 수이기도 하고."
연대장은 난쟁이들이 진동을 흘려 보내 잔해 속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31명."
나는 연대장이 말한 숫자를 입으로 굴려보았다.
31명. 벙커 전체 인원이 300명가량인 걸 감안을 한다면 10프로 남짓인 비율이다.
벙커 자체가 붕괴할 뻔한 습격에 비해 사망자가 적다고 해야 할까, 많다고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든 간에, 비율을 얼마나 차지하든 간에 상관없이 사망자가 발생했다면, 그건 우리에게 크나큰 희생이었으니 말이다.
"온갖 풍파에도 굳건하게 버틴 벙커가 한순간에 뚫렸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 하룻밤사이에 내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더 늘어난 것도 믿기지 않고. ······후회가 들어. 지시를 더 잘 내렸다면 아이들이 더 많이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럴 때는 참···,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만 자각하게 되는군."
"자책하지 말거라. 네가 방심하지 않고 경계 인원을 늘린 덕분에 이 정도에 그친 것이지 않느냐. 인간은 신이 아니야. 모든 걸 알고 대비할 수는 없어. 그러니 무너지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잘한 것이다."
후회와 회한이 뒤섞인 말을 중얼거리는 연대장의 이목을 끈 건 난쟁이 칸이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혹시 맨 처음에 비상벨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나는 복도의 비상벨이 울린 덕분에 행동을 빠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을 상기하며 물었다.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해서 벨을 울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피해는 지금 보다 더 컸을 테니까.
"아, 그건 독고수리 그 친구라네."
제일 먼저 이상을 감지한 건 마침 야간 근무에 투입되었던 민머리 사내였다는 연대장. 그는 사정을 들어 보니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졌고, 허공에 새겨진 선을 볼 수 있었던 독고수리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벨을 울렸다고 했다.
항상 반듯하던 허공의 선이 기이하게 휘어지는 걸 목격한 독고수리가 냅다 비상벨을 울렸었다고.
"아마 감각이 흐트러지는 걸 느껴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 선을 원체 중요시 여기던 친구였으니까."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혹시···."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직 벙커 내부를 순찰 중일세. 자네가 생각하는 상황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다행이네요."
끝까지 살아서 괴물들을 베어 넘기는 것에 큰 활약했다는 연대장의 말에 나와 박지영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연대장은 가건물 차고 주변 정리, 벙커 내부 잔해 청소, 수도관을 포함한 각종 시설 재정비, 벽 내구도 강화, 창고 물자 수량 리스트 재작성, 등등···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나,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해주었다.
현재 작업 소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는 까닭은 잔해를 치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잔해를 치우면 치울수록 파묻혀 있던 시신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을 할 때의 연대장은 순간적으로 이를 악무는 표정을 지었다가 힘없는 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손에 들린 구부러진 인식표를 만지작거리는 건 덤이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잔뜩 주름이 진 연대장의 손에는 여러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거예요. 제가 더 강해서, 좀 더 빨리 장벽을 정리했다면, 수정으로 제 힘을 바로 증폭시킬 수 있었다면요."
"그렇게 말하지 말게. 자네는 이미 많은 사람을 구했으니까. 둘러보게나. 지금 이 사람들이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자네가 쉬지 않고 움직인 덕분이야."
공을 내게 돌린 연대장은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나, 박지영, 칸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과 부상에서 서서히 회복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사람들이 대피소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뇨."
나는 단호하게 부정의 답을 뱉어냈다. 그리고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저 혼자 움직여서 구한 게 아닙니다. 혼자였다면 사람들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우리가 다 같이 움직여서 구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아직 그런 말을 하기엔 일러요."
"···그래, 그렇지. 자네 말이 맞아."
"연대장님, 예전에 저한테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이요."
이 말은 내가 벙커에 왔을 당시에 그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
연대장은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십니까?"
"······."
그는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닌 생각이 너무 많아 말을 아끼는 기색이었다. 깊게 가라앉아 침잠한 그의 눈은 여전히 다친 사람들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