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10화 (411/497)

Chapter 410 - 410. 기도 (10)

당연하겠지만, 공터에 모여 있던 인원들이 바로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출발한다던가 하는 일들은 없었다. 연대장이 말한 이틀의 시간 동안에 최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일환으로 연대장을 포함한 군 간부들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저번 같은 습격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나, 지수, 한세아, 최미소는 예린과 엘리만 붙여 놓는 것이 안전에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밖에 나갈 때나 어디론가 가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 둘을 데리고 나갔으며 잘 써서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갖다 놓기를 반복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위험한 습격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예린과 엘리가 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일행의 의견이 있었기에 결정된 일이었다.

그건 회의장으로 이동할 때도 동일했다. 지수, 한세아, 최미소, 박지영은 군인들을 도와 벙커 정리를 이어 나가기로 했으니 이번에 예린과 엘리를 데리고 돌아다닐 차례는 나였다.

어차피 어디 갈 필요도 없었다. 회의 장소는 대피소 구석이었으니까.

이른 장례식이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회의.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우선 어르신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흑복을 입고 있는 박종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허리를 숙이며 한 말이었다. 그는 현재 난쟁이들 덕분에 사람이 쉽게 치우지 못할 정도의 크기인 잔해 들을 대부분 치울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지금 진척 상황대로라면 작업 종료 시각은 빠르면 오늘 3시경, 늦으면 5시경이 될 예정입니다."

박종수는 조끼에 걸린 지시봉을 매만지며 아무리 늦어도 오늘 저녁 때쯤에는 시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을 이었다. 잔해를 처리하는 작업을 도와주고 있는 시민들과 병사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건 덤이었다.

"그래, 그럼 그 괴물들 사체는 어떻게 처리한다던가?"

연대장이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탁탁 두드리며 물었다.

"괴물들 확인 사살 과정은 전부 끝났으며, 현재 르한 어르신이 사체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어르신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난쟁이 르한이 변종의 사체를 보고 소재를 뽑아낼 수 있겠다 판단한 이유는 그것이 죽어서도 흐물흐물하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 인간들이 죽으면 이미 내부가 썩어 있던 그것들은 순식간에 강도를 잃고 마는 것에 비해 카멜레온 변종들은 죽어서도 강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 변종들의 이능 메커니즘을 파악하거나 각종 부위로부터 소재를 뽑아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수도관을 비롯한 각종 시설 재정비가 끝나려면 일주일은 가뿐하게 넘는 시간이 소요될 거라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나중에 오늘 회의 내용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전해 줄 때, 이 점에 유의해서 전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주일이라. 모든 시설 재정비가 아닌 가장 급한 수도 시설 정비의 소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예상 가능한가?"

"비록 임시로 취하는 조치에 불과할 뿐이지만, 당장 물을 끌어다 쓰게 만드는 건 하루면 충분해요. 벙커 밑에 있던 지하수가 터져서 물이 공급되지 않는 문제는 없거든요."

연대장의 물음에 답한 건 난쟁이 탄이었다. 그는 수정 발전기가 곧 가동을 재시작할 것이며, 그렇게 가동이 되었을 때 보수 장비를 사용해서 수도관을 정비할 거라는 설명해주었다.

칸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치료용 수정으로 심하다고 할 정도로 큰 부상이 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전달 사항인 정찰조의 보고입니다. 현재 한강 너머에 자리 잡은 정찰조의 보고에 따르면 유인 장치가 가동된 후암동 일대에서 지속해서 파괴음이 들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파괴음?"

"예. 거리가 멀어 정확한 파악은 되지 않고 있으나 정찰조는 괴물들이 서로 싸우는 소리로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맨눈으로 보이는 괴물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밤새 괴성이 들려오는 것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박종수는 거리를 좁히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탓에 정찰조들이 바로 앞에서 관측하지는 못했지만 수호목인 나무 거인이 다른 괴물들처럼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멀리서라도 보았다고 말했다.

유인 장치에 의해 감각이 교란된 아르마딜로 변종과 놈을 뒤따르던 나무 인간들 무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아르마딜로 변종은 밤새 싸우다가 도망을 간 것인지 후암동 일대 어디에서도 놈이 관측되지 않고 있다고.

"이것도 예상일 뿐이지만, 아마 나무 거인이 아르마딜로 변종을 패퇴시킨 것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굳이 불리한 싸움을 이어 나가진 않았을 거야. 심지어 아르마딜로 변종은 부상도 입은 상태였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고."

연대장은 장벽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로 전달받아서 알고 있었다. 그는 기어코 장벽에 틈을 만들어냈던 놈을 상기한 듯 나지막하게 침음성을 흘렸다.

"혹시 정찰조로부터 최명철 상병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없었어요?"

묵묵히 회의 내용을 듣고 있던 박지영이 발언권을 얻은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아르마딜로 변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최명철 상병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표식으로 사용된 것도 마찬가지로 발견할 수 없었답니다."

"······."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박지영. 그녀는 이내 알았다는 말과 함께 살짝 앞으로 나와 있던 몸을 뒤로 물렸다. 귀와 꼬리가 축 처지는 건 덤이었다.

구조 요청으로 사용되는 표식이 없다는 건 즉 최명철이 목숨을 잃었거나 간단한 표식조차 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겠지.

"살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말하며 박지영을 위로했다.

"···그렇겠죠? 아니, 그래야만 해요."

나와 박지영은 전자보다는 후자라고 믿고 싶었고, 그렇게 믿고 있는 중이었다. 최명철은 분명 어디 구석에 숨어서 버티고 있으리라.

"그럼 이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유인 장치가 가동이 된 후, 후암동 일대. 그러니까 유인 장치의 여파는 제 1연구소와 제 2연구소가 있는 부근까지 미쳤습니다."

박종수가 지시봉이 시야를 가릴 것을 염려한 것인지 지시봉을 집어넣고 레이저 포인트를 꺼내 그것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넓게 펼쳐진 종이 위에 빨간 점 하나가 생긴다. 임시로 짚은 포인트가 있는 배경이 하얀색인 덕분에 붉은 점은 우리 눈에 아주 잘 들어왔다.

그가 지도를 가리킨 곳은 제 1연구소 입구가 있는 서울과학전시관 남산분관, 한양도성유적 전시관 일대와 제 2연구소 입구가 있는 소월로 근처 세계수 밑기둥의 끝자락 사이였다.

박종수가 브리핑을 이어가려는 그때.

···탁!

내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던 예린이 쏜살같이 튀어나오며 종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아니, 정확히는 레이저가 있는 부분을 내려친 것이었다.

물론, 레이저가 잡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예린의 손등에 올려졌을 뿐이었다. 당연하다. 레이저는 잡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으니까.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핫, 하고 정신을 차린 예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던 회의장 사람들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피식 웃었다. 아이가 가만히 있기에 워낙 심심해서 한 행동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린아, 가만히 있어야지.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린을 조용히 달래주었다. 아이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의아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리는 내가 신경 쓸 것도 없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을 거로 생각했던 그녀는 뜻밖에 회의에 엄청 집중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어른이라 이건가?'

내가 잡생각하는 사이에 박종수는 헛기침하면서 중단된 브리핑을 이어서 하려고 했다.

지잉-

사라졌던 레이저가 재차 지도 위에 자리 잡게 된 것이 그때였고,

···탁!

팔짱을 껴서 손을 봉인하고 있던 예린이 눈 깜짝할 새에 팔짱을 풀어 레이저를 내리친 것이 그때였다.

"······."

"······."

침묵에 잠긴 회의장. 다시 한번 손바닥이 내려쳐진 여파는 회의장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예린아."

"아니. 아니···! 저는 억울해요! 저게 보이면 손부터 나가는데 어떡해요! 그냥 레이저를 안 쓰면 되잖아요···."

내 눈치를 받은 예린은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팍팍 쳤다. 아이의 꼬리는 불만을 담아서 내 팔뚝을 탁탁 쳤다.

"알았어, 알았어. 자꾸 회의 진행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잘 붙잡고 있을 테니 회의 진행해주세요."

나는 예린을 품에 꽉 안아 몸을 고정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저 예린이 귀엽다는 듯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뭐 큰일이라고요. 오히려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전 좋았네요. 마침 집중이 풀리려고 한 참이었거든요. 고맙구나, 애야."

예린이 한 행동 덕분에 정신을 다시 차릴 수 있었다며 말한 중년 여성.

"저 꼬맹이 아니에요!"

자신을 애라고 부르는 여성에게 발끈하며 외치는 예린. 아이는 꼬리를 곤두세운 것이 무색하게 곧장 꼬리를 내려 살랑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거 아줌마가 진짜 아끼고 있었던 건데 줄 테니까 회의하는 동안에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

복대 주머니를 뒤적거린 중년 여성이 꺼내는 것을 보았던 까닭이다. 아이가 그것을 본 것과 동시에 예린은 헤헤 웃으면서 양손을 내밀었다.

"저 꼬맹이 맞아요.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가만히 있을게요!"

그녀가 꺼낸 것은 일반 초코볼과 조금 다른, 금박지에 포장된 초코볼. 항의하기에는 너무 고급 초콜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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