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1 - 411. 기도 (11)
예린이 금박지에 포장된 초코볼을 희희낙락하며 받은 사이에 나는 조용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이를 주의시키기 위해서 내뱉은 헛기침은 아니었다.
레이저 포인트에 반응한 사람이 예린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걸 발견한 순간은 참 우연이었다.
회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주변을 훑어보았다가 내 정면에 있는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풍기는 걸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정면에 앉은 사람은 박지영. 그녀는 예린처럼 지도 위 레이저에 반응했다가 필사적으로 손을 억눌렀었다. 누가 먼저 레이저를 치는지 할리갈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로 맞은편이라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박지영이 자꾸만 움직이려는 손을 붙들고, 레이저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는 모습은 실로 조종당하는 인형 같은 모양새였다.
그렇게 몸을 삐걱거리던 그녀는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
"······."
잠시 아무 말 없이 시선만 마주하던 박지영은 슬그머니 손을 내려 가렸다. 다만, 그녀의 붉어진 얼굴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불현듯 머리 속에 떠오른 건 고양이들에 레이저 포인트에 환장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레이저 하나면 점잖은 고양이도 허리케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뭐라 말하는 것이 그녀를 더 부끄럽게 만드는 길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주었다. 입을 달싹거리기만 해도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휙휙휙 내젓는 박지영이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제 거는요···?"
옆에 앉아 있던 엘리가 소심하게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연 그녀는 왜 자신에게는 초코볼을 주지 않는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나?'
처음 보는 형태의 포장지에 싸인 초코볼이 내심 신기했는지 먹어 보고 싶어진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중년 여성에게 하나 더 없냐는 눈짓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방금 준 것이 마지막이었다는 고갯짓뿐이었다.
그 답은 곧 엘리가 초코볼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엘리가 시무룩하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크···, 이게 초코볼이지. 언니! 이거 같이 나눠 먹어요!"
금박지를 신중하게 깐 예린. 뒤이어 완전하게 드러난 견과류 조각으로 둘러싸인 초코볼을 보며 감탄하던 아이가 이내 반으로 가르며 한 말 덕분이었다.
"고마워요, 예린!"
엘리는 시무룩하게 변하려는 기색을 집어던지고 해맑은 기색을 유지할 수 있었다. 500원 동전보다 조금 클 뿐일 초코볼이라 반으로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예린은 정확히 반으로 나눠 엘리와 나눠 먹었다.
히히 웃으며 우물거리는 걸 보니 비록 만족스럽게 먹지는 못했어도 맛을 보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나 보다.
"···그럼 다시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피식 웃으며 레이저 포인트를 집어넣고, 지시봉을 꺼내 든 박종수가 재차 지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테이블에 비치된 생수로 목을 간단하게 축이거나 피로감에 눈가를 어루만지던 사람들이 자세를 바로 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어서 말하자면, 가동된 유인 장치의 여파는 연구소가 있는 곳까지 미쳤습니다. 본래 어느 정도 잔해에 가려져 있던 입구가 훤하게 드러났다고 하더군요."
괴물들의 난동에 의해 일대가 갈아 엎어지면서 숨겨져 있던 연구소 출입구가 드러났다는 박종수.
"혹시 문이 손상되어 일부 개방된 곳이 있는가?"
"그건 아니랍니다. 연구소 문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널린 변종들도 문을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라는 보고가 추가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연대장의 물음에 곧장 부정의 답을 내놓았다.
"···흠. 문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문을 지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괴물들이 그곳에서 영역을 형성한 게 그 때문일 테니까. 좋아,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물자를 강 너머로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정한 상태인가?"
"아, 그건 얼추 정했어요. 한강에 가교를 설치할 거예요. 장갑차로 그냥 도하하는 것보다 아무래도 가교를 설치해서 건너가는 게 시간을 아낄 것 같아서요. 힘은 좀 더 들어가겠지만 시간이 늦춰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물자 보급도 신경 써야 하고요."
이번에는 난쟁이 탄이 답했다. 탄은 무거운 전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 가교를 설치할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현재 위치를 선정 중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최근에 비가 많이 내리진 않아서 수위도 그다지 높지 않은 상태이니까 가교 설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중간 부분이 끊어진 다리를 임시로 보수해서 넘어가는 건 힘든가?"
우리가 강을 건널 방법을 모색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연대장이 물었던 것처럼 건너편 지상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가 모조리 끊어진 상태였던 까닭이다.
"힘들어요. 진짜로 중간 부근만 짧게 끊어졌으면 모르겠는데 사실상 시작 부분과 끝부분만 겨우 남고 전부 무너져 내린 상태잖아요. 마찬가지로 다리 밑에 있는 하저 터널도 힘들죠. 여긴 이미 나무뿌리의 난동에 의해 붕괴되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
"게다가 가교로도 한 번에 강을 건널 수는 없어요. 한강을 한 번에 넘어갈 수 있는 길이의 다리를 만드는 건 힘들어서 저희는 밤섬을 중간에 경유해서 이동할 수 있게 만들 계획이거든요. 그게 그나마 수심 예측이 가능해서요."
아무리 한강 수심이 높아지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한강이 가지고 있는 수심이 있기에 너무 긴 다리는 만들기 힘들다는 난쟁이 탄의 설명에 사람들은 침음을 흘렸다. 그렇게 많이 빙 돌아가는 길은 아니지만, 연구소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건 뼈아픈 시간 손실이지 않은가.
한강에 설치된 다리가 여의도 앞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안다. 멀리 빙 돌아가면 그나마 멀쩡한 다리가 있는 것 또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쪽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이유는 이동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침음을 흘린 이유이기도 했다.
이동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니까. 최대한 빠르게 결착을 내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자가 무한한 것도 아니고.
"일단은 남아 있는 서강대교 구조물의 도움을 최대한 받아서 가교를 설치할 거라고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런가. 알겠네. 전달 사항은 여기서 끝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추가적으로 전달할 사항이 있나? 없으면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연대장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할 일이 태산인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피력했다.
대부분은 그러했지만,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하나 남았습니다. 확실하게 확정이 되지 않은 일이긴 한데 미리 말은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오, 그래. 무엇인가?"
"칸이 세계수의 심장에 직접 피해를 가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흠칫 놀란 연대장이 내 답을 재촉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세계수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애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심장에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
정확히는 피해를 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무기.
"수정을 이용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바로 인위적으로 일으킨 과부하에 의해 폭발하는 수정이었다.
"응? 수정으로? 현 장비에 부착하는 식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네, 그건 아닙니다. 자세한 원리는 저도 모르지만 수정을 과부하 시켜서 터트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칸은 이 수정이 양날의 검이 될 거라는 말만큼은 단언했어요."
처음에 연대장처럼 애매한 보였던 나는 이어진 칸의 설명을 듣고 생각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과부하를 받은 수정의 폭발은 단순히 터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폭발 범위에 있는 모든 입자를 날려 버리는 효과를 가진다는 말 때문이었다.
심장을 둘러싼 입자를 날려 버리는 폭발이 일어난 것과 동시에 우리가 가진 무기를 총동원해서 공격하면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칸이 이것을 양날의 검이라고 표현한 건 폭발에 날아가는 입자는 검은 입자만이 아닌 까닭이다. 폭발은 검은 입자이든 푸른 입자이든 간에 상관없이 모조리 날려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나나 세계수나 서로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뭐라고? 그건··· 후우, 득보단 실이 많군."
연대장이 한숨을 쉬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정상적인 체급과 괴력을 가진 변종들에게 우리 인간이 맞서 싸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건 푸른 입자의 존재 덕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입자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건 우리가 겨우 만들어낸 기회를 붙잡기는커녕 역으로 한번에 밀려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