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2 - 412. 기도 (12)
"연대장님, 뭐라도 더 쓸 수 있는 무기가 생긴다는 건 분명 좋은 일입니다. 물론 피해를 보지 않으면 그만큼 더 좋은 상황은 없겠지만, 지금 저희가 이것저것 따지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 않습니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박종수가 한 말이었다.
"그래요. 쓸 수 있는 건 다 써먹는 게 맞죠.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요? 효과만 들어 보면 일시적으로 EMP같은 효과를 내는 것 같은데, 저는 위험 부담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봐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조했다. 역으로 우리가 당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으나, 그들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 더 늘어나서 좋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폭발의 여파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무기를 반기는 기색인 건 매한가지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좀 더 신중한 판단 하에 사용하자는 의견일 따름이었다.
"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수정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고 합니까? 너무 크면 들고 다니기는 힘들 것 같아서요."
"자세한 건 결과물이 나와야 알겠지만, 대강 손바닥만 한 크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물음에 나는 칸이 알려주었던 예상 크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칸은 내게 수정을 최대한 압축해서 과부하를 받기 시작하는 역치를 낮추는 것과 동시에 소지에 용이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손바닥 정도 크기라···. 그 정도면 조끼 파우치에 어떻게든 넣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네요. 혹시 모르니 전용 파우치도 하나 만들어야겠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고. 이제 다들 일하러 가는 것이 좋겠군. 생각보다 회의가 길어졌어. 탄,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주게. 고지가 머지 않았으니까."
연대장은 회의를 마무리하는 한편, 난쟁이 탄을 보며 미안함이 담긴말을 건넸다. 잔해를 치우는 것에서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닌 난쟁이들이 할 일은 이제 시작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일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괴물들 사체를 이용해서 새로운 장비를 만들거나 현 장비를 보수하고, 세계수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무기인 수정 폭탄을 제조해야 하며, 한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가교를 설치해야 하니까.
어느 하나 난쟁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일들이 없었다. 난쟁이들에게 중요한 일들을 잔뜩 맡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쟁이들을 제외한 다른 기술자인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이 가진 기술은 바뀐 세상에서 적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른 기술자들이 난쟁이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당장 우리에게 힘이 되어 줄 수가 없었다. 기술 습득이라는 건 시간이 매우 많이 요구되는 일이지 않은가.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생소한 입자를 다루는 기술이니 특히 그러했다.
"에이, 뭐 저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지금 이 고비만 넘으면 쉴 시각은 충분히 있어요. 그러니 지금은 계속 움직여야 할 때예요. 그렇죠?"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연대장은 이어진 탄의 대답에 픽 웃음을 살짝 흘렸다. 그는 이내 사람들을 해산시키며 회의의 종료를 알렸다.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사람들은 본래 자신들의 할 일을 하러 움직였다.
길었던 회의가 끝나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에 근접해 있었다.
'끝났다···.'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피기 전에 나는 여전히 품에 안겨 있는 예린을 바라보았다.
떨어지지 않게 내 팔을 자기 배에 둘러 몸을 고정한 아이는 등을 완전히 내게 기댄 채로 입을 헤 벌리며 자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간혹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오물거리는데 꿈에서 무언가라도 먹고 있는 건가 싶었다. 회의가 많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엘리는 그나마 나은 상태였다. 회의 시간 내내 집중해서 피곤한 것인지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기는 했어도 퍼질러 자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현우, 이제 저희도 가면 되나요? 사람들 다 가는데."
"어어, 회의 끝났으니까 이제 우리도 움직여야지. 잠깐만 기다려. 예린이 좀 깨우고."
나는 예린의 배를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긁었다. 곧장 간지럼을 태웠다. 한번 잠이 들면 잘 일어나지 않는 아이이기에 한 행동이었다.
"끄응···, 끄으- 끄아아앙···!"
끙끙거리며 배를 간지럽히는 손을 무의식적으로 밀어내던 아이는 밀려나지 않는 손에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연 몸을 비틀며 눈을 떴다.
"가자, 예린아. 회의 끝났어."
"으으······. 물 좀 주세요···."
입을 벌리고 잔 탓에 입안이 말랐는지 테이블을 더듬거리면서 물을 찾는 예린. 아이는 엘리가 손에 쥐어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 다 깼어요! 이제 가요! ···응?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빠르게 정신을 차린 예린이 위풍당당하게 일어났다. 아이는 기운을 되찾은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물음표로 굽어진 꼬리와 함께 의문을 표했다.
"사람들은 벌써 다 갔지. 아까 1시간 전에 내부 청소한다고 우르르 나갔거든."
오전까지만 해도 대피소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뭉텅이로 사라졌었다. 지수, 한세아, 최미소, 박지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이 지금 있는 곳은 아마 원래 우리가 배정받았던 방일 가능성이 컸다. 군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일손을 열심히 거들어 준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잔해를 대부분 치웠다는 보고가 회의 중간에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지금 한창 방 내부를 청소하고 있겠지.
"우리도 위로 올라가면 돼. 올라가서 지수랑 세아씨 도와주러 가자."
"네!"
나, 예린, 엘리는 아직 대피소에 남아 자리를 정리하는 중인 사람들을 뒤로한 채, 벙커 거주 구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
부스럭! 부스럭!
펄럭- 팡! 팡!
활짝 열려 있는 방 곳곳에서 사람들이 대청소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들리는 그 소리는 가라앉으려는 기색이 없었다.
한때 토사가 가득한 물바다로 변했었던 복도는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물론, 구석구석에 잔여 흙더미가 남아 있어서 아직 깔끔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토사가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는 걸 떠올려보면 매우 깨끗하게 변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 예린, 엘리가 도착한 방도 동일했다. 방 중앙에는 온갖 흙더미가 담긴 포대가 놓여 있었고, 흙이 잔뜩 묻은 이불이 벽면의 안전 손잡이에 걸려 있었으니까.
침대보와 이불들은 아직 세탁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도관의 재정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들! 저희 왔어요!"
힘차게 들어간 예린이 외친 말에 여럿이 모여서 정신없이 대청소하는 중이었던 지수, 한세아, 최미소가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이불을 팡팡 털어 최대한 흙을 털어내던 걸 중단한 채.
"어, 왔구나. 회의 이제 끝났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으읏···, 좀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은데. 아, 이게 안닿네···."
지수가 석재 침대 틀 아래에 깔린 흙을 마저 쓸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꼬리가 어떻게든 끝부분에 있는 흙을 빼내려는 몸에 맞춰 휙휙 움직인다.
"응. 회의 끝나자마자 온 거야. 근데 박지영씨는?"
"그 사람은 본인 방 치우러 갔죠. 빈 방을 하나 얻었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저희처럼 계속 치우고 있는 중일 거예요."
한세아가 나를 반기며 답했다. 그녀는 방에 있던 물자들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가 보관하고 있던 물자 대부분은 크게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단단한 잔해가 아닌 토사에 살짝 깔리기만 한 덕분이었다.
"그렇군요. 세아씨, 최미소씨, 고생 많았어요. 우리도 돕겠습니다."
나는 최미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높이에 있는 곳을 대신 걸레로 닦아주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머리에 난 뿔이 천장에 걸린 탓에 닦아야 하는 위치를 잘 볼 수 없어서 내가 대신 닦아내 주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고.
예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자 정리하고 있는 한세아에게 일손을 보탰다.
"지수 언니! 그 밑에 있는 흙은 제가 치울게요!"
엘리도 일행을 도와주기 위해 지수에게 다가 갔다. 그녀는 다가가면서 손에 바람을 모았다. 청소기처럼 바람을 빨아들여서 흙을 치울 심산인 듯했다.
"그럴래? 고마- 엘리, 잠깐! 스톱! 멈춰!"
대신 해준다는 엘리의 말에 반색하며 고개를 든 지수가 말을 하다 말고 다급하게 손짓을 보냈다. 지수는 멈추라고 말을 했지만, 그보다 엘리가 바람을 침대 밑에 쏘아 보내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휘이잉!
빨아들이는 바람이 아닌 앞으로 밀어내는 바람이 침대 밑을 휩쓴다. 그에 따라 바닥에 깔려 있던 흙이 사방팔방으로 밀려나며 흙먼지가 순간 자욱하게 일었다.
"콜록! 콜록!"
코앞에 있던 지수가 손을 휘적거리며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헉! 지수 언니! 괜찮아요?"
그 와중에도 바람을 이용해서 흙먼지가 자신에게 닿지 않도록 만든 엘리. 흙먼지가 지수를 덮치는 걸 바로 앞에서 직관한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몸을 바싹 굳혔다.
"······엘리."
얄밉게 혼자서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엘리를 본 지수가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꼬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네···?"
"벽 보고 서 있어. 내가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네···."
"이거 어떡할 거야. 겨우 치워 놨는데."
"죄송해요죄송해요!"
엘리는 허리를 마구 숙이며 사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 곳에 모아둔 흙 대부분이 이미 포대에 담긴 상태라 사방으로 퍼진 흙이 엄청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바탕 대청소를 거의 끝마쳐갈 때쯤.
"시간도 시간인데, 저희 밥 먹고 마저 치워요!"
한세아가 이목을 집중시키며 나, 지수, 엘리, 최미소를 한 자리로 불러들였다.
테이블에는 휴대용 가스 버너가 있었고, 그 위에 어느새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스프가 있었다. 옆에는 스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즉석 밥과 함께 여러 종류의 통조림이 놓여져 있었다.
창고 구역이 회복됨에 따라 배급이 다시금 원활하게 복구가 된 덕분이었다. 물론, 지금 테이블 위에 있는 건 배급받은 물자와 더불어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물자가 추가된 것이지만 말이다.
간단히 마련된 저녁 식사를 앞에 둔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하루 종일 이어진 작업에 의한 강한 공복감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이윽고.
"자, 다들 그릇이랑 수저 받아요. 양은 많으니까 마음껏 먹어도 돼요. 알았지, 예린아? 급하게 먹으면 체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야 한다?"
"네! 천천히 많이 먹을게요!"
"그래. 부족하면 더 해 줄게."
한세아가 나눠준 그릇에 다들 국자로 스프를 떠서 먹을 준비를 마쳤다.
계속 눈을 반짝이고 있던 예린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스프를 움푹 떠서 그릇에 담았고, 후후 입김을 불며 식혀서 먹기 시작했다.
먹기 좋게 식은 크림 스프를 먹은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꼬리가 휙휙 움직이는 건 덤이었고.
비록 즉석 식품들뿐이었으나 먹으면 먹을 수록 텁텁해지는 건빵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응···?"
한편, 인스턴트 스프, 즉석밥과 밑반찬으로 통조림들. 다소 생소한 조합인 그것들을 잠시 의아하게 보던 엘리는 이내 아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엘리가 그리 외친 것과 동시에 스프에 밥을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