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4 - 414. 기도 (14)
"불가능이라면서.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엘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엘리에게 의문을 해소하려는 사이에 예린은 양손에 초코바를 하나씩 쥔 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와 엘리가 나누는 대화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짜, 짜잔···? 이야, 세상에 불가능이라는 건 없네요···?"
어색한 손 동작과 함께 땀을 삐질 흘리는 엘리. 그녀는 테이블 위에 점점 쌓이는 초코바 비닐과 일시적으로 빛을 잃었다가 서서히 되찾기 시작한 푸른 가루를 번갈아 눈에 담았다.
이번 일은 콕 집어서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안일하게 생각한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
조건이 맞지 않아 불가능일 것이라는 엘리의 말이 있었지만, 결국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 않은가.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확실히 예린의 기도는 발현되었고, 그 탓에 푸른 가루에 맺혀 있던 입자들이 사라졌었으니 말이다.
그리 생각한 나는 다시 한번 몸 상태를 물었다.
"···예린아, 어디 몸이 이상해진 곳은 없지? 있으면 바로 말해."
"없어요! 이제 괜찮아요!"
예린은 완전히 회복한 안색으로 등을 의자에 기댔다. 축 늘어져 있던 귀가 다시금 쫑긋거리는 기색을 되찾은 건 거의 동시였다.
"계속 물어서 미안한데, 결국 아무한테나 도와달라고 한 예린의 기도를 누군가가 들어서 반동을 받은 거 맞지? 그게 아니면 예린이가 이렇게 마구 먹을 리가 없잖아. 실제로 입자가 사라지기도 했고."
원래 잘 먹기는 했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 않느냐, 라고 말하니 예린이 옆에서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에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대체 누가 들은 걸까?"
"글쎄요···? 보통 이런 건 기도를 한 사람만 알 거든요. 예린,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사람 없어요?"
"모르겠어요. 진짜 그냥 아무나 도와달라고 했을 뿐인데···."
예린은 여전히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선 가능성 있는 건 수정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엘리의 말에 따르면 결국 기도라는 건 무전기처럼 다른 곳에 있는 수정에게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지 않은가.
'수정에서 수정으로 전달되는 원리라면 기도를 받을 사람은 몇 없는데. 솔직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니, 했을 것이다.
나, 엘리, 예린이 테이블 위도 치우지 않고 수사를 진행하려던 그때.
"우리 돌아왔어! 흙 잘 버리고 왔지? 어휴, 지하수라 그런가 물이 엄청 차갑더라. 손 시려서 죽을 뻔했다니까."
지수, 한세아, 최미소가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불을 들고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둘러 이불을 벽면에 튀어나온 고리에 건 지수와 최미소는 차가움에 빨갛게 부은 손을 마구 비벼댔다. 꼬리와 뿔도 부르르 떨렸다.
"엘리, 이 이불 벽에 걸어놓을 테니 바람 좀 불어서 말려줄래? 원래 바깥에다가 널어놓고━ 뭐야? 셋이서 무슨 초코바를 이렇게 많이 먹었어요?"
한세아는 엘리에게 이불 사이사이가 너무 습기에 차지 않도록 바람으로 순환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려다가 테이블 위에 쌓인 초코바 포장 비닐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제 보니까 다 같이 나눠먹은 것도 아닌 거 같네요."
그녀는 이내 우리의 입가를 차근차근히 살펴본 후, 이 많은 초코바를 해치운 것이 예린이 혼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세아는 급히 다가와 예린의 배를 만져 상태를 확인했다.
"끄아아앙! 간지러워요!"
아이의 배는 많은 양의 밥과 초코바가 들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어느 때처럼 말랑하기만 했다. 비정상적으로 뾱 튀어나온 부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있었죠? 빨리 말해요."
감이 좋은 한세아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계속 예린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나, 엘리, 예린을 다그쳤다.
그 사이에 지수와 최미소는 조용히 아직 마르지 않은 침대보 대신 깔 담요를 정리해서 침대에 씌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우리에게 다가와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한세아가 앞으로 나서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불똥이 애꿎은 자신들에게 튈까 봐 부리나케 퇴각한 모습이었다.
"현우씨, 어디 보는 거예요. 무슨 일 있었는지 빨리 말하라니까요."
한세아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입을 앙다문 모양새가 뭔가 화난 기색이었다.
"···화 났습니까?"
"화 안 났어요."
"화난 것 같은데요···."
"화 안 났는데 현우씨가 자꾸 그렇게 말 돌리니까 이제 진짜 화가 나려고 해요."
"···말할 테니 그러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괜히 시간을 끄는 것을 그만두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옆에서 엘리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만, 뭐 어쩌겠나.
그리고 숨겨서 될 일도 아니고, 숨길 일도 아니지 않나.
이 뒤는 나, 엘리, 예린이 나누었던 대화의 반복이었다.
다른 장비없이 오직 수정만 있어도 무전기처럼 사용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감응력이 높아야 한다는 것과 알다시피 예린에게 높은 감응력이 있다는 것.
본래는 감응력이 높아도 온전한 수정의 형태가 아닌 가루 형태로는 발동하기 힘들다는 것과 예상보다 예린의 감응력이 매우 높아서 어찌할 바도 없이 기도가 발동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예린이 수많은 초코바를 해치운 건 기도에 대한 반동으로 큰 에너지가 소모되었기 때문인 듯하다는 것까지.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지수가 물었다. 그녀는 예린이 상태를 살피더니 아무 이상 없다는 판단을 내린 참이었다.
"됐다고? 그래서 뭐 바뀐 게 있어?"
"없어. 정확히는 기도를 누가 받았는지 몰라. 급한대로 나와 엘리가 주변에 뭔가 바뀐 것이 있나 찾아봤는데 일단 주변에는 없었어.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아직 잘 모르겠고."
"그래? 그럼 샤워나 하러 가자. 지금 가면 줄 별로 안 서도 될 거야. 아까 줄 엄청 길었었거든. 엘리 너도 이제 벽 그만 보고 씻으러 가자."
비록 따뜻한 물은 꿈도 못 꾸고, 무진장 차가운 물만 나오지만 몸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며 말하는 지수. 그녀는 꼬리에 묻은 흙알갱이들이 거슬리는 듯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휴우···, 그래요. 다 같이 씻으러 가요.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은 상의하고 나서 해요. 알았죠? 대답."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쉰 한세아는 확답을 바라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다친 사람도 없고, 무엇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할 수 없기에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네···!"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친 엘리는 울상을 지으며 예린에게 사과를 건넸다. 예린은 엘리 언니가 잘못한 건 없다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예린이도 초코바는 이제 그만 먹어. 아직도 배 많이 고프면 차라리 밥을 새로 해 줄게."
"괜찮아요! 배는 다 채웠어요! 역시 초코바는 신이야···!"
만족한 듯 배를 두드리는 예린을 본 나, 지수, 한세아, 최미소는 픽 웃었다.
이윽고.
"미소씨, 수건은 왜 그렇게 많이 들고 갑니까?"
"아, 이거 박지영씨에게 드릴 수건이에요. 아무래도 새 방을 배정받은 탓에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샤워하러 가는 김에 전해주려고 해요. 예전 같았으면 바로 배급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창고 쪽은 아직도 난장판이거든요. 기껏 꺼내도 의류나 이런 수건은 진흙이 잔뜩 묻어서 바로 쓸 수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박지영에게 여분의 옷가지, 담요, 수건 따위들을 챙긴 후, 한정적으로 가동한다는 샤워실을 향해 출발했다.
***
우리가 몸을 씻기 위해 방을 나선지 30분이 지난 시점.
땡땡땡땡땡땡땡땡!
복도에 설치된 비상벨이 마구 울린다. 그와 함께 새로이 설치된 비상 스피커에서 다급한 외침이 전해진다.
[상공에 괴생명체 출현! 비상 대기조는 즉시 지상으로 올라가기 바란다! 다시 말한다! 벙커 상공에 괴생명체 출현! 비상 대기조는 즉시 지상으로 올라가기 바란다!]
이제는 듣기만 해도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은 비상 벨소리에 얼음장 같은 물로 몸에 묻은 흙먼지를 씻어낸 나, 지수, 한세아, 최미소, 엘리, 예린은 시선을 짧게 교환하다가 몸을 돌려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 지수, 한세아, 예린은 지상으로.
최미소와 엘리는 안전한 방으로.
원래는 예린도 방으로 가라고 하려 했으나, 고집스레 고개를 젓는 모습에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급하게 움직여야만 했으니 말릴 시간도 없었고.
"이런 씹! 어제는 지하더니 오늘은 하늘이야?! 내가 이래서 비호에 붙어 있는 대공 레이더 떼서 본부에 설치하자고 했잖아!"
"뭔 자꾸 레이더 타령이야!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걸! 수정만 아깝지! 조용히 하고 뛰기나 해! 빨리 올라가야 한다고!"
우리와 함께 복도를 내달리던 군인들이 총기를 간신히 챙긴 채 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과 사람들이 서로의 동선에 피해를 주지 않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인들과 합류한 우리는 무사히 지상에 올라올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보았다.
[까아아악!]
"······."
경박하게 우는 거대한 까마귀 한 마리와 머리가 아주 산발이 된 여성을 말이다. 녹색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나, 지수, 한세아, 예린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지! 움직이면 쏜다!"
"······뭐에요?"
까만 총구를 들이밀며 자신을 포위한 군인들을 본 신아현이 멍한 얼굴로 한 마디 물음을 툭 내뱉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탓일까. 얼핏 보면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상황 파악은커녕 머리가 상황 인지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과 멍하니 풀린 눈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신아현씨?! 신아현씨가 대체 왜 여기에···?"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걸 인지한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군인들을 대기시킨 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지수, 한세아, 예린은 같이 따라오려다가 지금은 그냥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인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어라, 이현우씨?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아니, 뭐예요 대체? 제가 왜 여기 있죠?"
"그건······ 모르겠는데요?"
"···어이가 없네 진짜."
군인에 이어 나까지 등장한 상황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신아현. 그녀 옆에는 익숙한 까마귀 한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고개를 치켜 든 채 서 있었다.
[까아아악!]
내가 여기 왔노라, 라고 외치는 듯한 울음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