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20화 (421/497)

Chapter 420 - 420. 마지막 정비 (2)

사락- 사락-

내가 당황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나머지 피막과 상아색 판 더미를 내게 올린 난쟁이 르한. 그는 어느새 내 몸집보다 불어난 그물 막이 나를 완전히 뒤덮은 꼴을 보았고, 눈짓으로 어떠냐고 물었다.

"···이거 너무 무거운데요?"

"역시 그렇지?"

"네, 이거 입고 싸우는 건 꿈도 못 꿀 것 같습니다. 잠입용이라고 하긴 했지만, 애초에 이렇게 무거우면 안 들릴 소리도 들리겠어요. 움직임에도 방해가 엄청 되고요."

나는 피막과 판의 무게에 의한 묵직함을 느끼며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투명한 피막이 아래로 죽 늘어지며 물결무늬를 뽐내고 있었다. 늘어진 것들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르한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내 꼴이 장비를 제대로 착용했다는 소리였다.

'효과는···.'

아직 입자를 운용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효과가 생긴 건 볼 수 없었다. 나는 일단 장비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입자를 몸에 둘렀다.

내가 뽑아낸 푸른 입자를 곧장 흡수하는 피막과 판. 계속 입자를 흡수하고 있는 그것들은 이내 점점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빛을 굴절시키는 건지 통과시키는 건지는 몰라도 확실히 피막으로 둘러싼 부분이 투명하게 변한 것이다. 피막을 고정하고 있는 상아색 판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물결이 퍼질 때마다 효과가 전달되고 있는 듯했다.

표면에 일렁거리는 물결이 지나가는 부위마다 상이 맺히지 않는 것처럼 희미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수준이 높지 않았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 변종들이 몸과 기척을 완전히 숨겼던 성능에 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르한이 말했던 것처럼 열화판이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더 개량이 되어 쓸 만해지겠으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장 내일이 되면 작전 속행을 위해 강을 건너야 하니까.

아직 준비가 덜 되었음에도 회의에서 사람들이 출발일을 늦추자는 의견을 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시간을 주면 줄수록 유리해지는 건 세계수가 있는 일대의 괴물들이었다. 길게 볼 필요도 없이 당장 며칠만 지나도 그 괴물들은 유인 장치의 여파에서 회복하고 말 테니 말이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진격해서 선제 타격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않나.

"어설퍼. 확실히 어설퍼. 이렇게 관찰하는 식으로 보니 참 어설프군. 내가 만들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이야."

난쟁이 르한이 희미한 잔상만 남기고 투명해진 나를 보며 말했다. 더 피곤해진 안색으로 변한 그가 말을 이었다.

"성능이 제대로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다른 조건이 분명히 있는데, 그걸 충족시키지 못해서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한 것 같다. 역시 단순히 입자를 사용해서 장비를 활성화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르한은 일단 그 조건을 정령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다. 그가 현재 추측하고 있는 조건은 정령들의 힘이라고.

변종들이 정령을 잡아 먹어 위장에 오멘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고개를 절로 끄덕일 정도로 타당성 있는 추측이었다.

단순히 정령들이 힘을 빌려주면 되는지, 아니면 정령들 그 자체를 소모시키는 것인지 알아봐야 한다던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팔짱을 끼고 공방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은 나와 박지영에게 설명해주기 위함이라고 하기보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당장 급한 문제는 정령들이 아직 벙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거고···. 이래서야 실험조차 할 수 없지 않나."

"······."

"······."

조심스럽게 장비를 해제한 나와 박지영은 깊게 생각에 빠진 르한을 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괜한 소란으로 그의 생각을 방해한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르한의 말대로 정령들은 아직 벙커 내부에서 목격된 적이 없었다. 예린과 엘리가 습격이 끝난 이후 주변을 한번 둘러봐서 정령들을 발견하긴 했으나,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숨어버리고 만다고.

반지로 부르면 미약한 반응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래도 변종의 습격 탓에 정령들의 경계심이 최고조에 달한 것 같다는 엘리의 설명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건만.

바로 그때.

"박지영. 너도 한번 착용해 봐라. 차이가 있는지 봐야겠으니."

르한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지영을 불렀다.

"알았어요. 이거 그대로 뒤집어쓰면 되죠?"

"그래. 도와주랴?"

"아뇨.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안 그래도 직접 착용한 느낌이 궁금했다며 말한 박지영은 허물 같은 모양새로 작업대 위에 올려진 장비를 푹 뒤집어썼다. 아직 입자의 잔향이 남아 있는 장비가 박지영의 손에 의해 흐느적거리자 물결이 마구 요동친다.

이내 장비보다는 그물망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인 그것을 몸에 두른 박지영. 그녀는 앉았다가 일어서도 보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보기도 했다. 활동성을 체크하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뒤이어 장비의 내구도를 파악하기 위함인 듯 피막을 팽팽하게 당겼고, 판에 붙어 있는 피막을 쭉 잡아당겨 혹여 쉽게 분리가 되는 건 아닌지 가늠해 보았다.

장비를 평가하는 그 과정은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내린 평가는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나보다 더 혹독한 평가였다.

"이거 별로네요. 현우씨가 말했듯이 이걸 입고 돌아다니는 건 그냥 죽여 달라고 광고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어요. 무게가 무겁고 가볍고를 떠나서 차라리 몸에 걸리적거리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잖아요?"

박지영은 흐느적거리는 피막이 팔과 다리에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탓에 실전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녀는 장비가 무겁더라도 크기를 압축해서 부착하는 식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나마 나았을 거라는 말을 끝으로 장비를 벗었다.

"한 가지 장점을 꼽으라면 입자 소모량이 적다는 거네요. 그거 말고는 솔직히 다 별로···."

"압축이라···. 나도 그걸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이런 말로 변명하기는 싫으나 시간이 너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었어.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르한은 박지영의 평가에 동의한다며 수염을 끄덕거렸다. 그래도 결과물이 좋게 나오지 않자 내심 씁쓸한 듯 침음성을 흘렸다.

인력 부족에다가 이미 과로를 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우리도 한숨을 폭 내쉬었다. 시간에 맞춰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답답함만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너희의 평가는 이해했다. 나도 그 점들을 잘 알고 있었고. 역시 당장은 이걸로 개인 장비보다는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낫겠어. 부상자를 급하게 대피시키는 곳이라던가, 물자의 대량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간이 보급소를 만든다던가. 그런 곳들이라면 크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나와 박지영의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르한에게 우리는 잠시 생각에 빠진 후, 입을 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박지영이었다.

"크기를 늘리는 건 쉬워요?"

"줄이는 것보다 훨씬 쉽지. 단순히 이어 붙이기만 하면 되거든. 아까 네가 말한 압축은 장비를 작게 자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효과는 유지하고 크기를 줄여야 하므로 당장은 힘들다고 말한 거다."

여러 시행 착오를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만큼 충분한 시간 없이 시도하기 힘든 건 당연하다. 괜히 장비를 축소해 보겠다고 이것저것 하다가 한정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낭비된 시간이 너무도 아까우니 말이다.

"확실히 개인 장비보다는 그런 쪽으로 사용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옮긴 물자를 어디에 두고 싸워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거든요."

나는 회의 중에서 나온 의견 하나를 떠올렸다. 강 건너로 물자를 옮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 물자를 어디에 두는 것이 맞는지 의견이 분분했었다.

엉뚱한 곳에 두었다가는 원활한 물자 보급은커녕 어처구니없게 물자가 모조리 손실될 수도 있으니 위치를 신중하게 결정해야만 일이었으니까.

비록 주변의 환경과 동화하는 효과가 원본에 비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당장 모습을 숨기는 것에는 그만한 효과가 없겠지.

후방으로 이송해야 하는 부상자들과 물자를 괴물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기는 일에는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완전히 쓸모가 없어지진 않아서 다행이군. 그럼 나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나머지 작업을 시작하마."

"네, 알겠습니다. 오늘 나온 이야기들은 제가 연대장님에게 바로 보고 드릴게요. 어르신, 그 외 다른 건 없죠?"

"그래. 내 볼일은 끝났어. 나는 이것만 알려주면 되었거든. 아, 이현우 너는 칸에게 가 봐라. 연구소 구조에 대해 설명해 준다고 했다."

"마침 잘됐네요. 현우씨는 바로 칸 어르신에게로 가요. 저는 보고하러 갈 테니까."

난쟁이 르한이 아마 지금쯤이면 한창 연구소 구조도를 그리고 있을 거라며 내게 말해주는 것과 동시에 박지영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견은 없었기 때문에 곧장 알았다며 수긍하는 몸짓을 보였다. 르한은 다시 작업을 재개하기 위해 작업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나중에 봐요."

"네."

르한의 공방에서 할 일을 마친 우리는 그곳에서 나온 뒤 각자 몸을 돌렸다. 서로 향해야 할 곳을 가기 위해서 빠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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