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1 - 421. 마지막 정비 (3)
"왔느냐."
박지영과 헤어지고 칸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내가 들은 말이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칸이 열린 문 너머에서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어서 들어 오거라."
그는 따로 마련해 둔 의자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난쟁이들과 나 사이에 체구 차이가 있다 보니 의자를 따로 만들어둔 것이다.
물론, 이유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습격과 함께 벙커를 강타했던 지진에 의해 방 내부 가구들이 모조리 부서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선반 가득 채워져 있었던 비공정이나 용 조각상들을 비롯한 각종 조각상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보이는 선반에는 텅 비어 있었으니까.
나는 조금 황량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변모한 칸의 방 내부를 가로지르며 칸에게 도달했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방이 좀 휑하게 됐네요."
"어쩔 수 없지. 내 방은 나무뿌리가 완전히 천장을 허물어 버렸거든. 그 과정에서 장식품이고 뭐고 전부 박살이 나 버렸어."
그나마 멀쩡한 것들을 골라내서 급한 대로 고친 것이 지금 방의 모습이라는 난쟁이 칸. 그는 어느 때처럼 녹차를 마시는 한편, 르한이 만든 장비가 어떤지 내게 물어보았다.
"그 녀석 공방에 갔다 온 것이지? 그래, 어떻더냐? 써먹을만 하겠더냐?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장비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수준이어서 네 감상이 궁금하구나."
"개인용 장비로는 못 쓴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서요. 무겁더라도 크기만이라도 작았으면 요긴 하게 쓰긴 했을 것 같지만요."
나는 팔다리를 넘어서 온몸을 뒤덮는 피막을 떠올리며 답했다. 정전기가 일어나 자꾸만 달라붙는 비닐처럼 움직일 때마다 피막은 불편함을 초래했고, 그건 장비의 평가를 안 좋게 내리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뭐, 그게 당연한 결과이겠지. 원래 쓸 만한 장비라는 건 뚝딱하고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 아주 단순해 보이는 장비라도 수많은 개선과 시행 착오를 통해 나온 결과물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완전히 못 써먹지는 않겠던데요? 개인용 장비로 나눠 주는 건 무리고, 단시간에 크기를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크게 만들어서 부상자나 물자를 숨기는 곳으로 써먹자고 했어요. 실제로 입자 소모가 적어서 오래 유지할 수 있는데다가 효과가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라서 그렇게라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아, 물자. 안 그래도 회의에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는 걸 들었다. 지하에 보관해야 하나 싶었건만, 르한의 장비가 쓸모없지 않아서 다행이군."
할 일이 줄어들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중얼거린 난쟁이 칸은 널찍한 테이블 위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건축 구조도였다. 제 2연구소 내부 구조도 말이다.
구조도를 어디에서 얻은 것이 아닌 처음부터 새로 그린 듯 종이 위에는 아직 흑연 가루가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칸이 바람을 훅 불자 남아 있던 가루가 날아갔다.
"···새로 그린 거예요? 전부?"
"그래.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리느라 진땀을 좀 흘렸지. 자, 이제 잡담은 적당히 하고 할 일을 하자. 두 번 이야기해 줄 시간은 없으니까. 현우 너한테 설명을 다하면 나는 바로 한강 쪽으로 가야 하거든. 탄이 자꾸 무전으로 언제 오냐며 성화를 내길래 무전기를 아예 꺼버렸지 뭐냐."
한강 가교 설치 계획에 대해서 말한 칸은 계획이 다소 변경되었다고 했다.
본래 계획 상으로는 여의도에서 시작되는 서강 대교와 밤섬에 가교를 설치해 한강을 넘는 것이었지만, 현재는 여의도 바깥 올림픽 대로와 노들섬에 가교를 설치하는 계획으로 바뀌었다고.
실질적으로 전체적인 거리는 9km로 거의 동일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느 쪽에서 시간을 더 보내냐는 것이다.
밤섬을 통해 이동하면 건너편 지역에서 움직이는데 시간을 더 써야 하고, 노들섬을 경유해 이동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이쪽에서 움직일 수 있었으며 강을 건넌 후에는 철도를 이용해서 단숨에 돌파가 가능했다.
어느 쪽을 경유하든 간에 중간부터는 철도를 통해 단숨에 위를 가로지른다는 계획은 변하지 않긴 했다.
그러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상황 속에서 굳이 위험한 지역에서 시간을 더 오래 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교를 설치하는데 들어가는 힘 또한 차이가 있었다. 밤섬에 설치해야 하는 가교의 총길이는 대략 800미터였고, 노들섬에 설치해야 하는 가교의 총길이는 600미터가 채 되지 않았으니까.
물론, 안전한 여의도가 아닌 상대적으로 위험한 여의도 외부에서 작업을 진행하는 만큼 난쟁이들이 가교를 설치하는 동안 그들을 지켜야 하는 병력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아마 지금 군인들은 난쟁이들을 호위할 병력을 차출하는 중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가교 만드는걸 도와주고 나면 나는 수정도 계속 손을 봐야 하니 할 일이 태산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에 최대한 집중하거라.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하고."
그리 말한 칸은 피곤해 보이기는 했으나, 눈빛만큼은 흉흉하게 살아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은 나를 본 그가 구조도 한 켠을 가리켰다.
"제 2연구소, 그러니까 증폭기 보관소 구조 자체는 매우 단순해. 처음 설계할 때부터 구조를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거든. 괜히 복잡하게 만들어서 동선을 어그러트리는 건 나도 취향이 아니기에 알았다고 했었지."
칸이 처음으로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가장 좌측에 있는 연구소 입구였다. 그곳이 바로 내가 가장 먼저 노려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처음 연구소 정문으로 들어가면 우측 복도를 따라 걸어라. 좌측 복도는 폐쇄된 구역이니 당장 볼 필요도 없어.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우측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 비상시에 내려오는 격벽이 하나 보일 거다. 연구소가 봉쇄되었으니 자동 보안 절차로 격벽이 내려와 복도를 막고 있겠지. 먼저 그걸 부숴야 한다. 만약 이미 부서져 있다면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고.
"
칸의 손가락이 구조도 위를 긋는다.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뻗어진 복도와 입구 앞에 조그맣게 형성된 작은 공간을 표시한 선이 손가락에 짓눌렸다.
그리고 일자형 복도 중간중간에는 얇은 판 모양의 벽이 그려져 있었다. 칸이 말한 격벽인 모양이다.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합금으로 이루어진 문들이 보일 텐데, 이 또한 둘러볼 필요는 없다. 애초에 방이 몇 개 있지도 않고,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대부분 망가져서 얻을 것이 없을 거야."
칸은 다른 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연구소 진입에 성공했을 때 한눈팔 시간이 없을 것 같았기에 이견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우측 복도와 연결된 방들의 크기가 꽤 크다는 것이다. 무엇을 연구하는 방이었길래 각 방의 크기가 큰 것일까.
'면적을 보면 연구실이라고 하기보다는 연구동에 가까운데.'
의문이 들긴 했으나, 칸이 질문을 던지는 건 이야기가 끝난 이후라고 말했기에 잠자코 이어지는 칸의 설명을 들을 뿐이었다.
"복도의 방들을 지나면 그 끝에는 갑자기 확 넓어지는 홀이 하나 나올 거야. 각종 장비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고. 대부분을 증폭기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확인하는 장비다. 그 장비들이 아직 작동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제 2연구소뿐만이 아니라 졸린 사의 각 연구소는 비상 시를 대비해서 자체 전력을 생산하는 설비를 갖추고 있으니까."
특히 증폭기가 보관되고 있는 제 2연구소는 봉쇄가 되어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이 된다고 하더라도 최소 수년간은 버틸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말하는 칸이었다.
"물론, 전력 공급이 원활하다고 해도 그것이 장비의 노후화를 막아주는 건 아니니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지. 증폭기에서 뻗어 나오는 에너지 파장은 장비를 망가트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거든.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장비가 작동하는지 확인은 해 봐라."
그는 만에 하나 연구소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을 경우는 그대로 홀을 지나치면 된다는 말을 끝으로 목을 축였다. 떡진 수염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병에 담긴 녹차가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긴 침묵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졌다.
'외부와 단절이 되어도 수년간 버틸 수 있다는 건 건물만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을 포함한 말인 걸까.'
나는 부디 후자이기를 바랐다. 제 2연구소에는 누나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연구소를 봉쇄했다는 인물이 내 누나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 지금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건 누나의 생존이었다.
'ㅁ'자로 둘러진 복도와 그 내부를 거대한 규모의 방들이 채우고 있는 제 2연구소 어딘가에서 누나가 살아 있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했다.
하고 싶은 말도, 해주고 싶은 말도, 해야만 하는 말도 너무 많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