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22화 (423/497)

Chapter 422 - 422. 마지막 정비 (4)

"만약에, 우리의 예상과 달리 홀에 설치된 장비에 증폭기가 아직 미완성이라고 한다거나 불안정한 상태라고 뜬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그걸 폭파시키는 것."

목을 충분히 축인 칸이 한 말이었다. 그는 상황이 그렇게 된 이상 증폭기를 폭파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네? 하지만···."

나는 말을 흐렸다. 증폭기 하나만 믿고 가는 작전인데, 그걸 터트린다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지다 못해 확실해지기 때문이었다.

제 2연구소까지 가는 길은 험난할 것이 분명하고,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건만. 막상 길을 뚫고 도착한 곳에서 큰 수확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탈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증폭기를 강제로 폭파시키면 주변 검은 입자는 물론 아군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주고 말겠지. 허나,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미완성인 상태로 보관되고 있는 거라면 증폭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으니까."

"······."

"힘을 제대로 내지도 못하는 그걸 믿고 싸우다가 전조도 없이 터지면 더 큰 피해를 본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야.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우리의 제어 하에 있을 때 터트리는 것이 제일 낫지."

난쟁이 칸은 불안정한 증폭기를 터트려서 주변 일대를 전부 들어낸 후에 세계수의 심층부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하에 자리 잡은 심층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땅을 파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과 함께.

"심층부로 이어지는 통로가 아직 제 1연구소와 연결되어 있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계수의 씨앗을 연구하던 제 1연구소는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은 남산 중심부 깊은 지하의 실험실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가 있는 곳이다.

제 2연구소는 애초에 독립적인 시설로 지어졌기 때문에 심층부와 거리 자체는 가깝더라도 그 사이에는 쉽게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자연물로 이루어진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연구소 사이를 가득 채운 공간인 남산이 다른 보안 시설, 그 무엇보다 더 탁월한 효과를 내었던 것이다.

땅을 파서 터널을 만드는 것 자체는 난쟁이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터널을 파서 이동 통로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때가 주변에서 온갖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무작정 땅을 판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천장이 무너지지 않게 지지대를 계속 받쳐 주는 작업과 상당한 양의 흙을 계속해서 퍼내야 하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제 2연구소에서 증폭기를 꺼내 제 1연구소로 진입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기도 했다. 한가롭게 터널을 뚫는 공사를 할 시간 따위는 없지 않은가.

"어지간해서는 붕괴되지 않는 튼튼한 통로가 있긴 있지. 내가 직접 설계하기도 했고. 하지만 글쎄, 나는 그 통로가 멀쩡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재앙으로 변한 그것이 처음부터 한 일은 자기 심층부와 이어진 통로를 부수는 거였을 테니. 그것이 바보도 아니고 유일한 통로를 내버려둘 리가 없지 않느냐."

"···그래서 일대를 전부 갈아엎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 아까도 말했듯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 증폭기가 터지는 과정에서 뿜어지는 에너지에 의해 검은 입자든 무엇이든 입자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모조리 날아갈 거고, 그 과정에서 네가 살려면 이걸 사용해야 해."

증폭기 폭파의 여파가 자연물과 인공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정상이긴 하나, 남산 자체가 지독하게 오염된 상태라 일대가 전부 휑하게 들어내질 것이라는 난쟁이 칸. 그는 아직 미완성인 또 다른 수정을 내게 들어 보였다.

"이건 과부하로 쓰는 수정이 아닌 네가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줄 수정이다. 네가 엊그제 상대했던 그 변종처럼 역장을 몸에 둘러줄 거다. 당연히 이것 또한 입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폭파의 피해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아주 약간의 시간 정도는 벌어 줄 것이야."

"······."

"그러니 폭파에 휘말려 죽고 싶지 않다면 타이머 설정한 후에 이 수정을 작동시키고, 연구소에 진입한 인원들과 함께 죽어라고 달려라."

그는 증폭기 봉인 시설이나 다름없는 제 2연구소 자체는 그것이 터지더라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으나 그동안 아무런 관리를 받지 못해서 거대한 에너지 파장을 지금도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한 설명은 전부 증폭기가 불안정한 상태일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증폭기가 안정화 상태에 접어들었다면 의미가 없는 설명이야."

"······."

"증폭기가 멀쩡하다는 가정 하에 네가 할 일은 아주 단순해. 홀을 지나 안쪽으로 더 파고들어가면 'ㄱ'자로 꺾인 코너가 나올 텐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지나온 격벽과 달리 매우 두껍고 커다란 문이 있을 거다."

"문이 또 있어요?"

"봉인 시설을 겸하는 곳이라 하지 않았더냐. 보안 인증 없이는 절대로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강도가 높은 문이,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부수지도 못하는 문이 있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네게 문제 될 건 없어. 네가 그 문 앞에 선다는 건 정문의 보안 인증을 통과했다는 소리이니까."

사실상 연구소로 진입하기만 하면 그 뒤는 일사천리라고 말한 칸은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앙에 보관되고 있는 증폭기가 있을 것이며,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멀쩡한 증폭기를 활성화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끝으로 설명을 마쳤다.

병 안에 남아 있는 녹차를 재차 벌컥벌컥 들이킨 그가 말을 이었다.

"당장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나머지는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해. 결국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건 현장에서 얻은 정보들이니 말이다. 내가 알려 준 예전의 정보들이 아니라. 아무튼 설명은 여기서 끝이고, 궁금한 것이 있느냐?"

"제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다 이해했어요. 근데···."

"근데?"

"······아까 칸이 연구소는 외부와 단절이 되어도 족히 수년간은 버틸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 수년이라는 기준에는 내부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기준인가요?"

나는 자체 전력 생산으로 내부 에너지 공급을 유지할 수 있다는 칸의 말을 상기하며 물었다.

"그건 아니다. 전력이 공급되어도 사람은 전력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니 애초에 기준에서 논외야. 처음부터 안에 사람이 지낸다는 걸 염두하고 지은 건물도 아니고. 그래도 버티려면 버틸 수는 있을 거다. 단지 그게 최소 며칠, 최대 몇 주일 뿐이지. 정말 오래 버틴다고 해도 두 달이 한계겠지."

난쟁이 칸은 봉쇄 절차 진행 후 내부 인원은 전부 빠져나가고, 그 뒤는 설비가 자동으로 유지 보수가 되는 환경으로 구성했다고 했다. 비록 그 노력이 무색하게 현재는 세계수에 의해 엉망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두 달···."

나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이야기에 낙담했지만, 애써 어두워진 낯빛을 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바로 눈치챈 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메이벨. 그 녀석 때문이냐?"

"···네."

"너나 그것이나 참 딱해. 뭐, 이런 세상에서 딱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예전에 내 누나가 제 2연구소에 있으며, 연구소를 봉쇄한 사람이 내 누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누나가 살아 있을 거라느니,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거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을 따름이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체온을 가진 손이 전해주는 위로를 받은 나는 이어서 다른 이동 통로는 없냐고 물었다. 예를 들면 환기구나 비밀 통로 같은 곳들 말이다.

"혹시 복도 말고 다른 통로는 없는 거예요? 구조도 보니까 내부가 생각보다 단순해 보여서요."

"내가 제 2연구소가 무슨 장소라고 했었지?"

"증폭기 보관소, 봉인을 겸한 공간이라고 했었잖아요."

"그렇지. 그 말인즉슨, 사람 그것도 성인 남성이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통로가 따로 없다는 소리다. 봉인 시설에 그런 통로가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빈 공간을 허술하게 둘 리도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발견 즉시 틈을 전부 메워서 네가 말한 다른 통로는 존재하지 않아. 지하라 당연히 창문같은 것도 없어."

결국 답은 정면 돌파 밖에 없다는 설명에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조금이라도 쉽게 돌아가는 방법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요행조차 없을 거라는 칸의 단언에 앓는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못 배겼던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긴 했으나, 솔직히 연구소 내부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해.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것이 전부 쓸모가 없어질 정도로 토사가 내부를 뒤덮고 있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이 너를 맞이할 수도 있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는 전부 너 하기에 달렸다."

자꾸만 부담을 줘서 미안하다고 말한 칸은 재차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1차 목표인 제 2연구소.

나는 그곳이, 그곳의 내부가 멀쩡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문이 멀쩡해도 토사가 내부를 채우고 있다면 증폭기가 멀쩡할 가능성이 가뜩이나 더 낮아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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