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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423화 (424/497)

Chapter 423 - 423. 마지막 정비 (5)

"에이, 부담은요. 다 같이 고생하는데요 뭘."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분위기를 무겁게 잡아 봐야 뭐 하겠는가.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고, 괜히 무거운 분위기가 나와 칸을 짓누를 뿐인데.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부담을 온전히 나 혼자서 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맡은 역할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상황을 판 가르는데 있어서 내가 맡은 일이 작전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뿐이다. 그래, 단지 그뿐인 이야기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행이다. 또 궁금한 것이 있느냐?"

"하나 남았어요. 아니, 두 개요."

"말해 보거라."

"증폭기가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타이머를 설정한 다음에 바로 출구로 향하라고 했잖아요. 만약 타이머 시간이 다 끝났는데 증폭기가 안 터지면 어떡해요?"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나.

기껏 폭탄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설정된 시간이 지났어도 터지지 않고 불발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애초에 증폭기에게 있어서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콜라가 가득 담긴 컵이나 다름없거든. 거기서 네가 설치한 수정은 일종의 멘토스라고 보면 이해가 편할 거야. 그것도 일반 멘토스 수천개 분량의 압축 멘토스."

내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덧대어 설명해주는 칸. 그는 증폭기에 담긴 입자를 액체가 담긴 컵에 비유했다.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을 정도까지 표면 장력을 유지하고 있는 컵에 촉매제를 넣으면 바로 폭발하는 것처럼 증폭기도 폭발하게 된다고.

당연히 해당 반응이 일어나는 원리와 성분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만큼 차이가 있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넘치지 않도록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액체가 모조리 분출되는 결과로 말이다.

불안정한 증폭기를 툭 건드리기만 해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하는 난쟁이 칸이었다.

"그러니 너는 불발이 일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보다는 증폭기가 안정화 상태이기를 바라는 것이 제일 좋겠지. 상태가 멀쩡하다면 위험하게 증폭기를 폭파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긴 하죠···."

"표정을 보니 납득은 한 것 같구나. 남은 하나는 무엇이더냐?"

"제 2연구소는 증폭기만 연구한 게 아니죠? 그것만 연구했다고 하기에는 각 방 면적들이 너무 큰 것 같아서요."

"그래, 네 생각대로 증폭기만 연구하지는 않았다. 입자를 이용한 각종 장비들을 만들고 있었겠지."

칸은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겠지?'

내가 느낀 의문도 뇌리를 툭툭 건드렸다. 어째서 확답이 아니라 추측성이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담아 묻자 답을 곧 알 수 있었다.

"제 2연구소에서 연구하는 것들은 우리가 아니라 귀쟁이들이었거든. 뭐만 하면 기밀, 기밀 어찌나 기밀을 좋아하던지. 덕분에 나는 그것들이 뭘 만들고 있는지 구경도 못해봤다. 뭐, 보나마나 별 볼일 없고, 볼품없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장비들이었겠지."

그리 대단치도 않을 것들을 연구했을 거라 답한 칸은 대부분 연구물들이 미완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래서 내가 각 연구실들을 뒤적거려도 쓸만한 걸 얻지는 못할 거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나가자꾸나. 나는 탄 그 녀석을 도우러 가봐야 한다만,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난쟁이 칸은 제 2연구소 내부 구조도를 연대장실에게 전달하기 위해 챙기는 한편, 테이블 위를 마저 정리했다. 돌돌 말린 구조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한 손으로 뒷짐을 쥔 채 턱 끝으로 문을 가리켰다.

"연대장실 갔다가 지상으로 올라가실 거죠? 같이 올라가요. 위로 올라가서 까악이가 예린이랑 엘리랑 뭐하고 있는 확인해야 하거든요."

"어제 왔다던 그 거대한 새를 말하는 거군. 그냥 밑에서 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내일이 되면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할 텐데."

"가만히 있으면 되려 몸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몸 움직이는 게 마음에는 편하네요."

"네가 그렇다면야 내가 더 말할 필요는 없지."

그리 답한 칸은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미리 병에 우려냈던 녹차가 들어있는 가방을 챙겨 등에 멨다.

이윽고, 나와 칸은 연대장실에 들러 연구소도 구조도를 전달한 다음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는 벙커를 나와 지상으로.

***

"아이들은 저기 있구나."

"아, 저도 찾았어요."

지상으로 올라온 나와 칸은 저 멀리 있는 예린과 엘리를 곧장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칸은 여기서부터 자신은 따로 가야 한다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무전기를 들고 있는 군인들이 있는 위치였다. 위와 아래에 이리저리 치이는 중간 관리자의 낯빛을 하고 있는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

그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춘 나는 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보니 아직 무전기를 키지 않았었구나."

칸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무전기를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무전기가 여러 목소리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어르신, 무전 듣고 계십니까. 언제쯤 출발하실 예정이십니까. 지금 탄이-- 제 얘기는 왜 자꾸 꺼내요? 그냥 방에 가서 빨리 나오라고 하면 되는데!

- 그렇지 않아도 아까 보냈었는데 방에 안 계신다고 해서···. 금방 찾아서 갈 테니까 일단 먼저 시작하고 있어 봐봐.

아무래도 우리가 방을 나선 사이에 기다리다 못한 군인들이 방을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칸의 방으로 왔을 때는 우리가 다른 곳에 있었기에 중간에 엇갈린 듯했고.

"탄 이 녀석아. 엉뚱한 곳에서 성질이 급한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구나.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 군인 말대로 기초 공사부터 하고 있거라."

무전기에 대고 칸이 그리 말하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군인들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이내 칸을 발견했고, 한숨 돌렸다는 생각에 낯빛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나는 이만 가보마. 내일 보자꾸나."

"내일이요?"

"그래, 내일. 아마 오늘 밤은 노들섬에서 보낼 가능성이 높아. 다리를 만든다는 게 마냥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칸은 그 말을 끝으로 수염을 휘적거리며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다리를 바삐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칸과 군인들은 함께 차량에 탑승했고 곧장 도로를 내달려 한강 대교와 연결되어 있는 올림픽 대로로 출발했다.

가교를 설치하기 위한 마지막 팀이 장벽을 넘어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수없이 갈라져 울퉁불퉁해진 도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올린 까닭이다.

'···괜찮겠지.'

노들섬에 위치한 건물들의 내부에 나무 인간들이나 변종이 있다 하더라도 난쟁이들과 군인들이 모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믿었다. 무엇보다 일반 총기만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 듯했고 말이다.

게다가 주변의 괴물들이 유인 장치에 이끌려 모조리 강 너머로 이동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내가 노들섬에 괴물들이 있더라도 한시름 놓을 수 있도록 한몫하고 있었다.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 내 눈에 보이는 건 가건물 잔해를 전부 한쪽으로 치우고 모습이 드러난 전차를 정비하고 있는 중인 또 다른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지연없이 내일이 되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탄약을 비롯한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 시의 쉴 틈도 없이 바삐 움직이는 군인들은 사고가 터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면서 무거운 물자를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비호 복합에 장착되지 않았었던 유도 미사일을 포드에 넣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유독 눈에 띄는 빈자리 하나가 있었다. 몇 없는 가건물에 정차되어 있던 K-21 장갑차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군인들과 함께 가교 설치 인원의 호위 차량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확실했다.

'그런데 까마귀는 어디 간 거야?'

전방에는 원래 내 목적이던 까악이는 보이지 않고, 까마귀를 구경한다던 벙커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예린과 엘리가 자리에 남아 탄약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옮기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을 뿐이었다.

생존을 위해 매일같이 놀이를 빙자한 달리기 훈련을 하는 벙커 아이들은 까마귀가 보이지 않자 돌아간 모양이다.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어? 오빠다!"

한쪽 볼에 검댕이가 잔뜩 묻은 예린이 내 접근을 알아채고 귀를 쫑긋거렸다. 살짝 아래로 쳐져 있던 꼬리가 위로 솟아 물음표 모양으로 휘어진다.

기온이 제법 쌀쌀한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기 위해 바람을 모아 불어주던 엘리도 예린의 반응에 고개를 내게 돌렸다.

사람들 또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다가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오빠!"

호다닥 달려온 예린.

"여기서 사람들 돕고 있었구나. 까악이는?"

"까악이는 그 넝쿨 언니랑 함께 정찰하러 나갔어요! 나간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아마 곧 돌아올 걸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갔다 온다고 했었거든요."

내게 폭 부딪힌 아이는 시선을 위로 올려 흐른 시간을 가늠해보더니 한 2시간 정도 지났다며 말해주었다.

"까마귀 타고 날아간 거야? 근데 벌써 2시간이나 지났다고?"

"네!"

"······."

2시간이면 무리하지 않는 선을 이미 넘은 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작게 그리 중얼거리자 예린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혹시 몰라 무전기를 건네 주기는 했으나 아무리 무전을 해도 받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라고.

예린이 불만스레 입을 삐죽거린 그때.

[까아아악!]

하늘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히는 걸 보니 까마귀나 신아현이나 양반은 못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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