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5 - 425. 마지막 정비 (7)
[까아악! 깍!]
등에도 태워줬는데 이번에야말로 계속 같이 있어 주는 것이 아니었냐고 외치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는 까악이를 달랜 건 예린이었다. 아이는 까마귀의 부리를 살살 긁어 주며 반항의 날갯짓을 하는 까악이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나와 엘리는 또 삐치기 일보 직전인 까악이를 예린이 달래는 사이에 신아현이 언급했던 식량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창고에 들린 신아현이 식량을 한가득 챙겨 미리 위로 가져다 둔 가방은 어찌나 꽉 차 있는 것인지 지퍼가 터질 듯 빵빵했다. 무겁기도 무거웠고.
덜그럭- 덜그럭-
바닥에 내려놓자 안에 들어 있는 다량의 통조림이 서로 몸체를 비벼대며 둔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까마귀가 완전히 진정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은 건 거의 동시였다.
아무래도 신아현이 자기를 두고 가서 삐친 것이 아니라 갈 때 가더라도 밥은 주고 가라는 시위였던 모양이다.
부리를 긁어주는 게 아니라 뭐라도 입에 넣어줄 걸 그랬다.
"이거 기름은 최대한 짜내는 게 낫겠지?"
나는 지퍼가 열리고 드러난 통조림들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옅게 반사시키는 캔 대부분은 참치, 연어, 닭가슴살 위주로 이루어진 제품들이었다.
까마귀 체구도 크고 한 캔에 들어 있는 기름 정도야 먹어도 별 탈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수많은 캔에 들어 있는 기름을 전부 먹으면 탈이 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요즘은 기름 자체도 먹어도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는 하나, 그건 많이 먹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뭐든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그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에 담긴 기름을 전부 먹으면 배탈이 나고 말 거예요."
예린도 그렇게 생각한 듯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이는 까마귀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 봤으나 까악이는 어떻게 되든 좋다는 것처럼 자기 전용 그릇을 부리로 툭툭 건드릴 뿐이었다.
"······."
"···그냥 밥이나 빨리 달래요."
나와 예린은 까마귀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엘리는 바닥에 떨어진 까마귀 깃털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까마귀 앞에 그릇이 놓이게 되었다. 움푹 파인 그릇에는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최대한 구역을 나눠 채워진 통조림 내용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품고 있던 내용물을 전부 토해내고 빈 껍질만 남은 캔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엘리가 빈 통조림 캔으로 탑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건 높게 쌓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한순간 강하게 분 바람이 탑을 강타했던 것이다.
그 바람은 드디어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진 까마귀가 날개를 움직이면서 생긴 바람이었다.
와르르-
"아···."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탑을 망연자실하게 보는 엘리였다.
'내려가면 손부터 씻어야겠네.'
엘리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손에 묻은 미끌미끌한 기름에 한숨을 내쉬었다.
캔을 하나하나 따다 보니 단순히 캔을 따는 것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양도 양이지만, 캔의 기름을 많이 먹으면 녀석이 배탈을 앓을까 걱정되어 기름기를 최대한 짜냈기 때문이다.
"휴우···. 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서 먹어, 까악아! 목 마르면 여기 있는 물 마시면 돼!"
예린이 까마귀 부리를 긁어 주며 한 말이었다.
[깍-]
그와 동시에 까악이는 짧게 울음소리를 내뱉었고, 이내 부리를 벌려 퍼먹기 시작했다. 다만, 부리의 크기에 비해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 상대적으로 잘고, 잘게 부서진 상태라 마음처럼 쉽게 먹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높게 쌓여 있던 참치가 부리가 한번 지나가자 통째로 사라진 것이었다. 통조림을 꽤 많이 깐 것이건만, 그 정도의 양은 한 입 거리에 불과했나 보다.
까악이가 아쉽다는 듯 분홍 혀로 그릇의 벽을 불편한 자세로 핥는 것을 본 예린이 충격을 받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기도 전에 밥이 분쇄된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 참치가··· 갑자기 사라졌어···!"
이상하다. 분명히 양이 많았었는데. 조금은 버텨줄 것이라 믿었던 참치를 비롯한 다른 밥까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 묻은 기름이 햇빛에 비춰지면서 반짝거리는 부리를 가지게 된 까악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더 먹을래?"
[깍-]
배가 충분히 부르지는 않아도 요기는 채울 수 있었다는 듯 부리를 살며시 젓는 까악이. 녀석은 이내 부리로 그릇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이어서 부리를 살짝 벌리는 것이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모양새였다.
"아, 이거 입에 넣어달라는 거지?"
[깍-]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싹싹 긁어서 줄게."
[까악-]
계속해서 맞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는 까악이와 대화를 나눈 예린은 이어서 그릇에 흩어진 내용물을 손으로 모아 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까마귀 입에 넣어 주었다.
나와 엘리도 눈치껏 아이를 도와 자세를 더욱 낮춰 아기 새가 먹이를 받아 먹듯이 부리를 벌린 까악이 입에 나머지를 넣어 주었다.
이런 행동을 보니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 새 같다는 감상이 들기도 했고, 행동을 보고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지능이 있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까악이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인지 기름이 묻은 부리 대신 머리를 내밀어 살짝 우리에게 비볐고, 지수와 한세아가 만든 천막에 들어가 사라졌다. 뒷정리는 우리에게 맡긴다는 것 같은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녀석이 잠을 자러 사라지자 남은 건 텅 빈 그릇과 캔. 그리고 나, 예린, 엘리 뿐이었다.
"예린아, 엘리. 너희 아직 여기 있을 거야?"
나는 난장판이 된 주변을 정리하며 물었다. 정리는 자신의 알 바가 아니라는 녀석의 행동이 어이가 없긴 했지만, 우리도 새가 뒷정리까지 하는 걸 처음부터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따름이었다.
"음···, 네! 여기 있으면서 사람들 일하는 거 도울 거예요. 오빠는요?"
"나는···."
잠시 말꼬리를 늘리며 침묵했다. 당장 오늘 할 일을 마친 나는 지수처럼 훈련하러 갈 수 있고, 한세아를 돕기 위해 탄약고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훈련과 다르게 강화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없기에 한세아 옆에 있어 주면서 기력 토템 역할밖에 못하겠지.
게다가 그녀들을 도와주는 것이라면 최미소가 해주고 있을 테니 지금 내가 굳이 그 역할을 뺏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미소가 뭐라도 하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예린과 엘리를 도와주고 같이 내려가는 편이 좋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럼 나도 여기 남아서 도와줄게. 아직 옮길 건 많아 보이니까."
"좋아요!"
나, 예린, 엘리는 물자를 정리하는 군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경계 병력과 호위 병력 등, 인원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지만 다른 벙커 사람들도 일손을 돕고 있어서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도와서 빨리 쉬게 하는 것이 내일을 준비하기에 더 낫지 않겠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합류했고, 일손을 도왔다. 탄약으로 가득 찬 탄통들이 하나, 둘씩 두돈반에 실린다. 수류탄을 비롯한 크레모아 같은 장비들이 들어 있는 상자도 같이.
사람들은 물자를 옮기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사람들의 속을 채우고 있는 까닭일까.
평소 같았으면 이런저런 잡담과 함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작업이 진행될 텐데, 묵묵히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내색은 하지 않으려 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탓에 지속적으로 긴장감이 쌓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작업을 도운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묵직한 분위기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이현우씨, 내일 비가 올 것 같습니까?"
"비요?"
나는 사람들 아니, 그들 중 일부인 군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게 늘어진 옅은 구름들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내가 그러는 사이에 군인이 말을 이었다.
"내일 비만 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비가 오면 놈들이 강해지지 않습니까."
그의 말대로 비가 내리는 날에는 교전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괴물들에게 온갖 강화 효과를,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효과를 부여하니까.
만약 내일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라면 작전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비는 우리에게 불리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부디 내일 날씨가 오늘처럼 좋기를 바라는 것뿐.
지금 사람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그에 대한 걱정 때문인 듯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겠지.
내일 중요한 작전이 시작된다는 것에서 오는 부담감,
위험한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에서 오는 긴장감과 두려움,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드는 공포, 지금이라도 작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 하는 망설임, 하지만 어떻게든 나아가야 한다는 책임감, 일이 잘 풀리면 악몽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
이를 포함한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벙커를 오늘따라 조용하게 만든 것일 터다.
"내일, 비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 부분을 전부 이해하고 있는 나는 그저 이런 말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푸른 하늘이 내일이 되어도 유지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