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26화 (427/497)

Chapter 426 - 426. 마지막 정비 (8)

탄약을 비롯한 여러 물자를 두돈반과 K-21 장갑차에 싣는 작업이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상에서 당장 급하게 끝내야 할 일은 모두 마친 상태. 지상에 남은 인원은 물자와 전차를 관리하기 위해 남은 군인들 뿐이었다.

그들도 전부가 남지는 않았다. 오전부터 일한 군인들은 오후 근무 인원들과 교대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방으로 갈까? 배고프지?"

나는 순식간에 한산해진 공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네···."

이른 아침부터 뽈뽈거리며 힘을 썼더니 에너지 보충이 시급하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예린과 엘리. 그녀들은 먼지가 잔뜩 묻은 옷 소매를 탁탁 털었지만, 손에도 적지 않은 검댕이가 묻어 있었기에 또 다른 먼지가 묻을 따름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까마귀가 천막에서 잠을 청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해산한 사람들처럼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계단과 복도를 지나 도착한 방. 그곳에서는 최미소가 지안이를 품에 안고 살살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바깥을 나갔다 온 것인지 방 한 켠 바닥에는 지퍼가 열린 가방이 놓여져 있었다.

"미소 언니, 저희 왔어요!"

"어서 와. 예린아, 엘리. 그리고 현우씨도요. 세상에, 열심히 일하고 왔구나? 많이 배고프겠네. 얼른 손 씻고 오렴. 밥 미리 해놨어."

곤히 잠든 지안이를 침대에 내려놓은 최미소가 나, 예린, 엘리의 상태를 보더니 한 말이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세안부터 하라며 구석 세면대를 가리켰다.

이어서 우리의 시선이 향한 곳은 테이블이었다. 정확히는 그 위에 올려진 그릇이었고, 그릇에 담긴 주먹밥과 콩나물국이었다.

돌자반과 약간의 참기름으로 버무린 주먹밥인지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가 고소하다. 그리고 콩나물국도 일반적인 맑은 국이 아닌 고춧가루가 팍팍 들어간 얼큰한 국이다.

그걸 본 예린이 군침을 꼴깍 삼켰다. 그건 나와 엘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단 자체는 평소에 먹는 것과 그다지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 우리가 본 것 중 하나만큼은 큰 차이가 있었다.

"···어? 혹시 저 콩나물 그거예요?"

"응. 그거야. 하우스에서 자란 거."

떨리는 예린의 물음에 킥킥 웃는 최미소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콩나물국이 인스턴트 제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나온 콩나물국의 주재료인 콩나물은 엘리가 수경 재배 시설인 하우스에서 처음으로 키워 낸 것이었으니까.

입자의 힘이 벙커 곳곳에 자리잡은 덕분인지 몰라도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벌써 식탁에 올라올 정도로 자랄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벙커 사람들에게도 배급되었겠지.

아직 모두가 받을 정도로 양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우리가 받았다면 다음에는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받는 식으로 차례를 준다면 오래지 않아서 모두가 받을 수 있을 테고.

지금 당장은 콩나물뿐이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감자나 고구마같은 작물들을,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지상을 되찾게 되면 벼를 심어서 쌀을 수확할 수도 있을 거다.

지평선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그날이 기대가 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스턴트가 아닌 이곳에서 키운 식재료로 만든 국을 보니 정말로 군침이 돌았다.

"······."

예린은 이미 눈이 돌아갔다. 여기저기에서 힘을 쓰고 다니느라 살짝 말라붙어 있던 입술이 군침에 의해 촉촉해졌고, 꼬리가 미친 듯이 살랑거리고 있는 걸 보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 빨리 씻고 밥 먹어요!"

그리 말한 예린이 세면대가 있는 곳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같이 일한 건 엘리도 공복감이 심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도 같이 다다다 뛰어 세면대 앞에 도착했다.

세면대는 하나, 빨리 씻고 싶어 하는 사람은 둘 아니, 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밀치는 일은 없었다. 정말 간만에 먹는 신선한 식재료인 만큼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빠르게 세면대로 뛰었던 것과 다르게 최대한 얌전히 돌아와 의자에 착석했다.

"밥···! 많이 먹을 거예요···!"

비장한 기세로 중얼거리는 예린. 누가 보면 며칠 굶었나 보네, 싶을 정도로 아이는 입을 앙다물고 제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옆에 나란히 앉은 나와 엘리는 그런 예린의 모습에 픽 웃음을 머금었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최미소가 아이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살짝 주춤했다가 따뜻하게 데운 국을 퍼주며 입을 열었다.

"어어, 많이 먹어. 지수랑 세아한테는 나눠 주고 왔으니까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돼. 근데 살짝 비릿한 맛이 날 수도 있어서 고춧가루 좀 많이 넣었는데 괜찮겠어?"

흰쌀밥이 아닌 주먹밥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지수와 한세아가 간단하게 밥을 챙겨 먹을 수 있게 말이다.

"네! 저는 맑은 것보다 이렇게 빨간 게 더 좋아요!"

"그래. 다행이네. 자, 어서 먹어. 현우씨도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최미소가 그릇을 앞으로 밀면서 한 말에 우리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고, 가장 먼저 빨간 국물에적셔진 콩나물을 노렸다.

···찹

조심스럽게 콩나물을 집은 젓가락. 하지만 콩나물은 여전히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스턴트 제품에 흔히 들어 있는 콩나물이었다면 집기도 전에 흐물흐물하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있을 텐데 말이다.

지금 우리가 집은 콩나물이 신선한 재료라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한 나는 기대감을 품고 콩나물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곧장 씹었다.

아삭-

그와 동시에 기대감을 배신하지 않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신선한 콩나물 특유의 아삭아삭한 식감에 나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동안 먹은 인스턴트 제품이 나쁘다거나 맛이 없었다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역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만큼 맛있는 건 또 없지 않은가.

특별한 고기반찬도 아니며 사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식재료인 콩나물일 뿐이지만,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콩나물이 가히 최고의 식재료라고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후룩-

내친김에 국물도 한번 들이켰다. 이번에도 역시 크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한 느낌이 입안과 식도를 적셨다. 얼큰한 국물이 입안에서 한 바퀴 돌자 살짝 매운 향이 맴돌면서 입맛을 돋우었다.

"크으···."

그리고 어르신들이 내는 감탄사가 실제로 옆에서 들리기도 했다. 아삭아삭한 콩나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넣은 예린이 마무리로 그릇을 들어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난 후에 낸 소리였다.

자그마한 입으로 어찌나 잘 먹는 것인지 보는 사람이 대신 배가 부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맛있냐고 물어보니 볼이 빵빵한 상태 그대로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먹는 것이 제일 좋다는 듯 헤실헤실하게 웃는 모습에 같은 공간에 있던 나, 엘리, 최미소는 킥킥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일 있을 작전 탓에 좀처럼 긴장을 풀기 힘들었는데, 예린이 덕분에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난 후.

예린과 엘리는 아직 샤워실 개방 시간이 아니라서 방에서 간단하게 씻었고, 지금은 침대에 드러누워 색색거리며 자고 있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지안이마저 조용히 자고 있으니 방에 깨어 있는 인원은 나와 최미소뿐. 지수와 한세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방의 시간이 흘러간다. 가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 또한 오늘따라 들리지 않으니 방 내부는 매우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도란도란 나누던 대화가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어느덧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4시 25분. 슬슬 하루 일과를 마친 지수와 한세아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곤히 잠든 아이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최미소가 입을 열었다.

"···현우씨, 그거 알아요? 그이는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간의 긍지라고 했어요. 미래를 위해, 앞날을 위해 살아간다는 건 가장 고귀한 삶의 투쟁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요."

"······."

"내일 다 결정 나는 거죠? 저희가, 아이들이 계속 살 수 있게 되든, 이대로 계속 숨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허무한 끝을 맞이하게 되든 어느 쪽이든 결판이 나는 거죠?"

"네. 내일, 혹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내일 모레에 전부 결판이 날 겁니다."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주세요."

최미소는 지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카타의 머리칼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에 쓸린다. 그러던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예요.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 돌아오는 거죠. 당신뿐만이 아니라 지수랑 세아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해요. 누구 하나라도 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이를 기억해주고 있는 사람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죽지 마요."

괜히 부정 탈 것 같아서 꾹 참고 있었던 말을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하고 말았다는 최미소. 그녀는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칼카타와 한 약속을 지킬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사람들을 살리고 말 테니까. 미래를 위해서."

나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을 상기하며 답했다.

-째깍

내 답이 끝난 직후,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켰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가 지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일 시간이었다.

이제 작전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1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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